소설리스트

검왕춘추-204화 (204/410)

제51장 경위분명(涇渭分明) (4)

우지직.

갑작스레 귀를 울리는 소리. 뒤쪽에서 뭔가가 길게 쪼개지는 듯하고, 곧이어 커다란 폭음이 이어진다.

퍼펑!

돌기둥이 대여섯 개나 박살이 나면서 자욱하게 밀어닥치는 돌가루와 흙먼지.

“여 대부! 이쪽에 있는가?”

“존자와 신승은 뭘 하는 게요? 어서…….”

눈을 가리는 흙먼지 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들어오자,

해원기가 와락 몸을 돌렸다.

정록을 말릴 새도 없다. 돌기둥을 부수고 먼저 뛰어드는 자들은 요술사와 감 대부, 그 뒤를 따라 목소리를 높여 재촉한 자는 이 대부가 틀림없다.

와해력산의 어지러운 기문진식도 끝내 이들을 묶어놓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정록이 빠른 말로 설명했던 대로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효력이 무뎌졌기 때문인지.

흩어졌던 자들이 고스란히 한데 모여 여 대부가 있는 곳으로 뚫고 들어왔다.

처음 마주친 해원기를 우습게보고 까불었던 여 대부와 황의경장들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지만,

이미 한 차례 상대했었던 이 대부와 현신장 셋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정록은 막 약효가 돌았을 뿐, 완전히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특히 오온존자가 위험하다.

이렇게 밀폐된 공간이야말로 독이 가장 위력을 떨치는 곳이니까.

해원기의 두 손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상하좌우를 점한다.

아직 상대는 해원기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손 쓸 틈도 주지 않고 일거에 때려눕혀야 한다.

재단경위의 만검천인이 저사직금의 오의로 공간을 누비고,

검림소연이 치밀하게 짜인 공간을 수주개와의 오의로 쌓아 올렸다.

검상을 고를 겨를이 없었기에 여 대부를 제압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은 신왕검, 왼손은 추상검.

츠츠츠.

묘한 소리가 공간을 타고 퍼지는 것 같았지만,

쿠릉, 쿠르릉.

돌기둥이 부서지면서 기관진식이 한꺼번에 영향을 받았을까. 더욱 심해진 굉음이 지하광장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해원기조차 이 묘한 소리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서두르는 심정이 앞서서.

그런데.

딸랑, 딸랑.

흙먼지가 가라앉기 전에 종소리가 먼저 울리고,

그 소리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다른 기합을 동시에 지르는 자들.

“이얍!”

“차앗!”

어마어마한 힘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콰앙!

지하광장이 통째로 무너질 것 같은 폭발에 앞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깨진 돌기둥과 종유석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검왕오형의 두 가지를 엮어 가공할 검역(劍域)을 펼치던 해원기가 충격에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

제왕신공, 붕익천강, 열폭노도. 한 번씩 겪어봤던 공력이 하나로 뭉쳐서 더욱 놀라운 위력을 이루었다.

따르르륵.

그 와중에도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종소리.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파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서운 예기가 좌우에서 날아들었다.

비이이잉.

촤아아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단주와 맹렬하게 회전하는 독고저(獨股杵). 둘 다 승려가 지니는 물건이니 그새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암기로 쳐낸 것인데.

해원기의 두 손이 거침없이 양쪽을 베어갔다.

비록 여럿의 공력이 합해진 강력한 반격 때문에 검역이 흔들려버렸지만, 두 손의 검상은 아직 그대로.

무서운 예기를 토하는 단주와 독고저를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

파삭.

단주와 독고저가 가루로 화하는 것보다 해원기의 신형이 불끈 치솟는 게 먼저.

좌우로 펼쳤던 두 팔이 날개라도 되는 양, 두 발이 공중을 번갈아 차며 앞으로 나아가니.

퍽, 퍽.

“크윽.”

머리와 어깨를 짓밟힌 감 대부가 거꾸로 꼬나 박힌다. 곳곳의 석순이 터져 엉망진창인 땅바닥, 나름 영사태화의 기예로 몰래 미끄러져 다가오다가 꼼짝없이 석순 구멍에 처박혀버렸다.

우르르르.

지하광장이 이제는 목이 메는지,

잦아대는 굉음을 대신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울림을 흘리기 시작하고.

비스듬히 앞으로 몸을 날린 해원기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부서진 돌 조각과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한쪽으로 몰려나오는 자들.

이 대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두리번거리기 바쁘고, 지친 듯한 모습으로 모여드는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가운데에는 두 손으로 낙혼금종을 부여잡은 요술사가 눈을 부릅뜬 채.

감 대부는 석순 구멍에 처박혔고, 구석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황의경장들과 함께 나뒹구는 여 대부.

쿠쿵.

해원기가 다 볼 때까지 참아주었던가. 지하광장이 돌연 한 치나 푹 꺼지면서,

드드드드드.

거대한 진동과 함께 천장이 폭삭 내려앉았다.

[지금이야. 기관진식이 깨지면 동력이었던 수맥이 왕창 빠지지. 금속산 방향!]

요술사의 종소리를 따라 막강한 장력이 해원기의 검역에 부딪히자마자,

정록의 전음이 급하게 귀를 울렸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정록의 생각. 해원기는 미처 따질 시간도 없었다.

적들이 돌기둥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는 순간에도 정록은 서슴없이 자신이 제안했던 계획을 시작했고,

여 대부의 시체는 어느 틈에 파묻었는지. 해원기가 암기를 부수고 감 대부의 머리통을 밟았을 때는 벌써 여 대부의 복장으로 바뀌어 황의경장들이 쓰러진 곳에서 뒹굴고 있어서.

장안의 다루에서 잠깐 보여주었던 그 신통한 역형대법.

해원기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광경은,

이미 여 대부가 되어서 이 대부들에게 발견되는 정록이었다.

보병요 신기역 최후의 유적인 이 지하광장.

그 오랜 세월 숨겨왔던 비밀을 다 드러낸 후에,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모든 걸 무로 돌리며 소멸해버렸다.

이백과 고력사, 대조주가가 기대했던 결과가 어떻든.

해원기에게는 정록을 놔두고 떠나는 게 더 마음에 걸렸고.

[정 형, 왜.]

[처음에 약속했, 잖나…….]

기어이 전음으로 되묻는 말에 뚝 끊긴 정록의 대답. 소멸진에 의해 지하광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공간도 닫혀버렸나.

전혀 다른 공동(空洞)으로 들어선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었다.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을 했단 건가.

와해력산의 동력은 수맥. 지하광장을 움직여 소멸진을 가동했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수맥의 원류 쪽은 순간적으로 텅 비게 되었다.

그건 아주 짧은 시간. 또 외부에서 지세를 살폈을 때와 지하의 수류가 예상과 다른 경우도 많아서, 지리(地理)와 수리(水理)가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

어디서 갑자기 물이 밀어닥쳐 휩쓸려버릴지.

정록이 비록 금속산 방향이라고 외치긴 했으나, 이 땅속에서 동서남북을 어찌 가늠하랴.

해원기가 공력을 한껏 일으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공동을 지나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차라리 곧장 위로 뚫고 나가는 편이 나을 터.

잠시라도 정신을 흩트릴 수 없는 조건. 그러나 두고 온 정록 때문에 해원기는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채 서두르기만 할 뿐이어서.

마냥 공동을 따라 나아가기만 하는데.

‘약속이라니. 처음에 정 형과 내가 무슨 약속을. 으음?’

아련하게 귓가에 남은 정록의 전음을 되새기던 해원기가 불쑥 몸을 세웠다.

갑자기 전해지는 기이한 느낌.

체내의 진기가 돌연 들끓으며 오른손으로 힘차게 뻗더니,

그대로 우측의 벽을 후려갈긴다.

검왕수고 뭐고 무슨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퍼억.

습한 공동 벽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다른 공간이 드러나고, 해원기가 얼떨떨한 채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래야 할 듯한 기분에.

그냥 좁은 공간, 바위로 사방이 막혔고 습기는 조금 덜하고.

체내의 진기가 또 끓어오른다. 이번에는 분명히 아래쪽. 배꼽을 중심으로 아랫배에서부터 사지로 꿈틀꿈틀 퍼지는 기운.

이 예기치 못한 변화에 해원기가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진기가 뜻하지 않게 움직이는 건 심상치 않은 일. 흔히 주화입마(走火入魔)라 부르는 좋지 않은 현상의 조짐일 수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신왕공을 익힌 해원기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변화에는 이유가 있고, 어떤 이유든 바르게 이끌면 합당한 변화를 낳는 법이다.

더욱이 꿈틀꿈틀 사지로 퍼지는 기운이 낯설지 않아서.

화청궁에서 적들과 싸울 때 이끌었던 온천(溫泉)의 수기와 닮은 점이 있다.

심호흡 한 번 했을까.

해원기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오른손이 다시 뻗었다. 아까와 달리 왼손이 그린 둥근 원을 뚫는 발검제형의 형태.

파팟.

꽉 막힌 바위틈 사이가 벌어지며 홀연히 후끈한 열기가 끼치고,

쿠르르.

주변을 흔들며 울려 퍼지는 물소리. 아까의 지하광장처럼 또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만도 한데.

해원기의 표정은 차분하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이 발검제형을 다시 이룬다.

그리고.

콰콰콰.

사방을 막았던 바위들이 해원기의 뒤쪽으로, 방금 있었던 공동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펑!

가파른 언덕 한구석, 겹겹이 쌓인 바위들 사이에서 돌처럼 단단하게 뭉쳤던 흙더미가 내던진 것처럼 날아가며,

치솟는 물기둥 속에서 빠져나온 해원기가 굵은 나뭇가지 위에 내려섰다.

촤악.

전신에서 뿌려진 물방울이 비처럼 흩어지지만, 어두운 밤에 울창한 숲. 그저 나무와 풀만이 놀라 흔들릴 뿐.

마침내 지상에 이르렀다.

“해시(亥時)쯤 되었나. 밤중에 목욕은 처음이군.”

소위 족제비 구멍이란 샛길을 통해 고력사의 무덤에 들어간 게 유시. 거의 두 시진을 지하에서 헤맸으니 온몸이 젖은 채 바라보는 밤하늘에 감개가 없을 수 없다.

날이 밝았다면 해원기에게서 모락모락 오르는 더운 김이 보였을 터.

해원기가 타고 나온 뜨거운 용출수는 이제 힘을 잃고 주변을 적신다.

잠시 방향을 살피던 해원기의 시선이 자신이 나온 구멍을 향했다.

“황하의 한 방울, 결국은 사부님 말씀대로 보병은 수정지력(水精之力)이었다. 청강황하(靑江黃河)가 마침내 어우러졌으니. 하아!”

변화의 이유를 마침내 깨우쳤으나,

기쁨보다는 탄식으로 말을 맺는다.

정자에서 진동으로 쓰러지던 보병을 손바닥으로 받쳤을 때, 그 손바닥으로 떨어졌던 딱 한 방울.

그게 바로 경수와 위수의 사이에 놓인 보병이 수백 년간 축적한 하백지정이었다.

보병을 잃은 청강주는 이미 완전하지 않았었고, 그 청강주를 풀었을 때 기연의 일부분이 또 동강에게 나누어져 버렸었다.

언젠가 사부가 일러주었던 가르침. 보병청강이 능히 신왕공 대지체의 무한한 힘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 예견했었는데.

과연 한 방울의 하백지정이 더해지자 보병지력, 진정한 수정지력이 완성되면서 단숨에 지상으로 빠져나올 용출수의 흐름까지 찾아냈다.

참으로 기막힌 인연의 안배지만,

그런 기연보다 정록이 왜 모험을 감행했는지 깨달은 게 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처음 만나서 정록이 내걸었던 조건.

끝까지 돕게 해주면 해원기에 대한 보고를 잠시 미루겠다고.

그저 단순한 핑계로 여겼건만, 정록에게는 해원기와 맺은 약속이었나 보다.

동갑내기라고 막 말을 놓기 시작했던 벗.

새로 사귄 친구에게는 그 약속이 무엇보다 중요했던가.

후끈하게 김이 오르는 해원기의 전신. 체내의 진기가 무덤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충일해져서 젖은 옷이 다 말라간다.

놀라운 일이지만, 누구도 보지 못했고.

검왕은 또 혼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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