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03화 (203/410)

제51장 경위분명(涇渭分明) (3)

철엽산은 얇은 철판을 우산처럼 엮은 일종의 모자로 낙석(落石)을 막는 데 유용하고,

철봉과 갈고리, 조그만 삽도 전부 흙과 바위를 파헤치기 편리한 도구.

무덤 밑의 숨겨진 비고를 발굴하려고 미리 황의경장에게 지니도록 했었다.

워낙 지하광장의 변화가 불시에 격렬하게 발생해서 둘이나 기관에 희생되었으나, 황의경장 다섯은 본래 동창의 한 조였고, 이번 발굴을 위해 건네준 도구도 평범한 것들이 아니다.

철봉은 좁아지는 틈을 버티는데, 갈고리는 끌어당기거나 끌려가는데, 삽은 막히거나 묻힌 걸 파는데 쓰지만,

얼마든지 기병(奇兵)으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철엽산을 암기로 날릴 수 있듯이.

불쑥 들이닥친 해원기와 정록을 공격한 것도 바로 이 기병들.

선풍결을 펼쳤는데도 삽날에 정록의 허리가 상했고, 갈고리에 해원기의 소매가 뜯겨나갔으니.

처음 해원기를 보는 여 대부로선 얕보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동창 밀각의 대부.

처음 강호에 나선 김에 수하들 앞에서 위신을 세우려는 심정도 당연하고.

머리에 쓴 전립, 얼굴 아래를 가린 면사, 좁은 어깨의 마른 체형임에도 꽤 그럴듯한 위세가 일어나는데.

불쑥 얼굴로 날아드는 검기에 화들짝 놀랐다.

쨍.

황망히 들어 올린 철필로 쳐내긴 했지만, 팔뚝이 울리는 충격. 상반신이 휙 젖혀질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되찾는다.

그러나.

곧장 어깨 뒤쪽에서 파고드는 날카로운 기운은 또 뭔가.

회의 장포가 와락 부풀고, 허리가 급격히 돌아가며,

큰 호선을 그리는 철필에선 먹물이 번지듯 퍼지는 경력.

피잇.

그러나 먹물 같은 경력도 소용없이 어깻죽지에서 핏줄기가 튀어 오른다.

“윽.”

하마터면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갈 뻔했다. 대체 어디서 날아든 기운인지.

따질 틈이 어디 있나. 전신이 몇 자루인지도 모를 검에 난자될 판인데.

여 대부가 미친 듯이 철필을 휘둘러야만 했다.

자부하는 사문신공을 한껏 끌어 올리고, 얼마 전에 연성한 장원필법을 있는 대로 펼쳐 내니.

단숨에 팽창하는 공간 위로 무수한 글자들이 누빈다.

해원기가 손을 쓰는 것도 보지 못했거늘. 아니, 더벅머리의 손에 검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판에 이 무슨 꼴인가.

당황해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전력을 쏟아냈고,

그렇게 불안한 시야에는 자신이 물러나라고 한 황의경장 셋이 어느새 근처로 말려든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또한 난데없이 베어드는 검기를 피하기에 급급할 뿐.

출구를 가리키는 거로 여겨지는 천장의 한 줄기 선.

그 밑의 공간이라도 종유석의 파편과 누런 물줄기는 여전히 쏟아진다. 다만, 그 횟수와 양이 현저히 줄었고, 무엇보다도 어지럽게 오가던 돌기둥의 움직임이 극히 완만해서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관진식을 벗어난 건 아니다.

해원기의 눈이 나동그라진 정록을 빠르게 살피고 돌아가자마자,

발검제형과 재단경위가 한꺼번에 시전 되었다.

쓸모없는 예의나 차리는 고지식한 성격이라고 흔히 오해하지만, 해원기는 결코 일의 경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여 대부가 뭐라고 지껄이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교적 변화가 적은 이 공간에서 단숨에 적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었고,

일단 결정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는다.

휘이이이잉.

파편과 물줄기를 밀어내는 광풍 속에 오악검법과 절세오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섬전과 추풍이 발검제형의 오의인 수발여의에 녹아들고,

해운파랑검과 기수검봉이 재단경위의 오의인 저사직금을 이루니.

어깨를 벤, 보이지 않는 검기를 찾아 미친 듯이 날뛰는 여 대부와 파도처럼 밀려들고 구름처럼 뒤덮이는 검기에 휘말린 황의경장 셋을 한곳에 몰아넣고는,

두 손을 벼락같이 뒤집었다.

순식간에 검상을 바꾼다.

유리검은 신왕검으로, 본연검은 추상검으로.

번쩍.

번개 치듯 신마공무가 내리꽂히자,

“으악!”

“켁.”

비명이라도 제대로 지른 건 여 대부 하나. 손에 든 기병이 두 동강 난 황의경장 셋은 돌기둥을 들이박고 뻗어버렸다.

순간적으로 고통에 비명을 지른 여 대부의 바로 앞에 해원기가 내려섰으나,

여 대부의 눈은 엉뚱하게 공중을 향한 채.

여전히 해원기의 종적을 찾지 못한 시선이 자신의 끊긴 오른손을 쫓는 중이고,

뒤집었던 두 손을 옆으로 풀어낸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철필을 쥐고 날아간 자신의 손을 보는 고통이 너무 심한가.

여 대부의 전신이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벌벌 떨리다가,

뚝.

듣기 거북한 소리. 마침내 스스로 목이 꺾여 그 자리에 허물어져 버렸기에.

무른 과일이나 계란 따위를 벽에 던진 것처럼 곤죽이 되어버린 황의경장 셋에다, 바로 앞에 목이 부러져 주저앉은 여 대부까지.

자신의 두 손이 만든 끔찍한 광경에 해원기가 인상을 쓰다가 얼른 몸을 돌렸다.

지나쳤다.

이렇게 심하게 손을 쓸 생각은 없었건만,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힘이 실리는 바람에.

청강지력에 풍뢰결을 모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검왕오형의 오의가 발현되었기 때문일까.

뜻을 세우고 손을 떨치자,

상대가 맥을 추지 못했다.

어쩌면 새로 투입된 이자들의 실력이 기존의 대부나 현신장에 한참 못 미쳐서일지도.

하여간 어처구니없을 만큼 싱거운 도살에 입맛이 썼고,

더 따져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 싸움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지켜본 정록. 어느새 상반신을 세우고서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어, 이거, 지독하, 아니, 엄청나구먼.”

해원기의 얼굴이 펴졌다.

삽날에 상한 허리에 피가 배어 나오긴 해도 자못 혈색이 돌아온 정록의 얼굴.

“괜찮나?”

“아, 음. 나에게 먹인 거 백초환이지? 예전에 복용한 적이. 그렇지, 복원고도 있나?”

약효가 돈 덕에 상처가 깊지 않은 모양이다. 약왕당을 잘 아는 듯해서 해원기가 두말없이 요대자에서 복원고를 꺼내주고,

정록이 고약을 허리에 바르며 두리번거렸다.

“어떻게 출구로 향하는 길을 찾은 모양이네만, 으음.”

백초환에 복원고. 내외상을 치유하는 명약이지만, 정록의 목소리는 아직 힘이 없다.

폭발을 뒤집어쓰고, 적의 신공을 정통으로 맞은 셈이니.

“서두르세.”

부축할 요량으로 손을 내미는 해원기에게 맥없이 쓴웃음을 짓다가,

“이래서야 또 업혀야 할 텐데. 젠장. 그나저나 그놈들이 찾던 건 보병일 게야. 자네, 손에 넣었겠지?”

멈칫. 정록의 팔을 잡으려던 해원기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보병정에 병을 놔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건 빈 병, 이곳을 축조한 이가 기대했던 정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것 같아. 이미 깨져버렸을걸.”

처음 진동에 쓰러지던 보병을 겨우 손바닥으로 잡아 세웠었다.

이백이 댓돌에 남긴 글귀에서 ‘도도황하’의 ‘하백지정’이라 했던가. 당세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결국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희망은 헛되이 스러진 것이다.

이미 지하광장이 소멸로 나아가는 이 난리 통에,

석대가 쪼개지고 정자가 무너지는 혼란 속에,

그 자그마한 병이 남아날 리 없다.

그런데 정록의 표정이 이상해지며 커다란 눈 한쪽이 일그러졌다.

“그 병, 뭔지 알아? 이 지하광장을 누가 지었는지는? 혹시라도, 이런, 자네가 석대로 내려올 때 정자로 달려간 자들…… 제길, 나 때문이잖아.”

두서없는 질문 끝에 자책의 욕설이 덧붙는다.

이 판국에 서두르지 않고 왜 이러나.

정록의 말이 빨라졌다.

“입구의 비석, 이곳을 지은 대조주가의 인물이 남긴 연기(緣起)가 새겨져 있었어.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나쁜 거로 알았던 이백과 고력사가 사실은 동문(同門)이었고, 그들의 위탁으로 신기대와 보병정을 지었다더군. 대조주가도 지파(支派) 같은 위치였다나, 하여간 지하광장에 특별한 기관진식, 소위 와해력산의 소멸진이라는 걸 베푸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보병을 수호하기 위해서 모든 난관을 기어이 극복했다고. 그 보병은 바로 그 문파의 상징 같은 보물, 감로보병(甘露寶甁)이 정식 이름인데.”

해원기가 보병을 놔둔 건 정록을 구하려고 정자에서 뛰어나왔기 때문.

그 사실을 인지했다손 쳐도 갑자기 비석의 연기를 늘어놓을 때는 아니다.

아무리 진세의 변화가 약화된 공간이고, 지하광장의 출구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정록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달리 항아월백(嫦娥月魄)이라고도 불렸다네. 서왕모(西王母)의 불사약(不死藥)을 담았다는 전설까지 적혀서. 에, 황당하지만, 웃어넘길 수 없는 부분이잖나. 크흥.”

오랜만에 코를 울리는 버릇이 나오면서 해원기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

해원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미 장안의 다루에서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했으니, 정록이 이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바로 사일신화에 얽힌 금오혈석.

사일신화의 말미에 부연되는 또 한 가지 이야기는 항아분월(嫦娥奔月)이라고 한다.

사일신화의 주인공 예의 부인이 항아. 천상의 선녀였던 그녀는 예를 따라 세상에 내려왔으나,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는 모두 아홉 개의 해를 떨어뜨리고, 인세에 해를 끼치는 악수들을 처단하느라 노상 가정을 버려둔 남편 탓. 그러다가 이 부부의 가련한 처지를 동정한 서왕모가 지상에서나마 영원히 살도록 불사약을 증정했는데, 남편을 원망했던 항아는 남편 것까지 자신이 복용하고 떠올랐으나, 하늘의 꾸짖음이 두려워 마침내 달로 도망가 달의 여신이 되었다는 내용.

감로보병을 달리 항아월백이라고 불렀다니.

아홉 개의 금오혈석을 아홉 무리의 도적에게 도둑맞고, 예가 처단했다는 여섯 악수(惡獸)의 힘이 현신장이란 자들에게 보이는 지금.

동창의 밀각이 이 보병을 찾는 건 절대로 황당하다고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다.

쿠르릉, 쿠릉.

그 잠깐의 대화 중에도 지하광장의 울부짖음은 더욱 강해지고,

쏟아지는 파편과 물줄기를 휘감은 돌기둥이 또 방향을 바꾼다.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었다.

“간과할 수 없어도 지금은 여기를 벗어나는 게 먼저일세. 자세한 얘기는 나가서…….”

“이 소멸진은 수맥을 이용한 거지. 지하광장은 물로 뒤덮이겠지만, 입구가 저 지경이 되었고, 들어온 자들은 전부 상당한 고수. 게다가 오랜 세월이 지났단 말이야. 대조주가의 인물은 대략 삼백 년쯤 버티는 게 고작일 거로 예측했거든. 보게나, 저 돌기둥들.”

쿠릉, 퍼퍽.

굉음은 여전하지만, 위치를 바꾸는 돌기둥 중에는 서로 부딪쳐 부서지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천장의 종유석도 떨어지다가 기둥과 얽혀 그냥 멈추는 현상까지.

심지어.

“여 대부! 어디 있나?”

펑, 펑.

“존자, 신승, 이쪽으로!”

서로 부르는 소리와 장력을 내치는 소음까지 뒤섞여 들린다.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흐를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서둘러 벗어나야 하거늘, 정록은 왜 해원기의 말을 끊는지.

“끙.”

정록이 해원기의 손을 잡고 일어서더니 엉뚱하게 여 대부의 시체를 향해 움직였다.

“해 형, 이곳의 수맥은 아마 금속산에서 뻗어 나올 거야. 해 형의 능력이면 충분히 뚫고 나가겠지만, 지금의 나로선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자칫 짐밖에 되지 않고.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뭘 하는 건가, 정 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뭐 하러 여 대부의 시체로 가는가. 이해할 수 없는 언동에 해원기가 급히 말을 받자,

엉거주춤 여 대부의 시체를 살피던 정록이 고개만 돌려 씩 웃는다.

“나라면 폭파된 입구를 통해 나갈 수 있을 걸. 그러면 다시 무덤 밖, 서촌으로 나오잖아. 백 명의 관병에 금의위도 늘어선. 간신히 위험을 벗어난 밀각의 대부라야 반겨줄 거 아니겠어? 흐흥.”

역형대법을 익힌 정록이니 여 대부로 변신하겠다는 뜻인 건 알아들었으나.

이 상황에 이런 엉뚱한 생각이라니.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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