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02화 (202/410)

제51장 경위분명(涇渭分明) (2)

천년을 넘게 전승되어온 비전.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후대가 고심참담 남겨놓은 유일한 보물.

그렇다 해도 위험한 처지에 빠진 친구보다 더 귀중하진 않다.

사귄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해원기에게 정록은 빈 병 따위보다 몇 백 배 소중한 동갑내기 벗.

엄청난 진동에 넘어가던 보병을 겨우 손바닥으로 받쳤을 뿐, 미처 챙길 틈은 없었다. 보병을 쥐고서는 발검제형과 재단경위를 두 손으로 펼칠 수 없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

종유석 기둥으로 막혀버린 보병정이 하나도 아쉽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인명(人命)이지 빈 병 따위가 아니다.

우릉, 우르릉.

날뛰는 말 위에 올라탄 것처럼 흔들리는 지면, 천장에서 와르르 떨어지는 종유석과 사방에서 마구 터져 나오는 누런 물줄기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

열주처럼 늘어섰던 기둥들이 제멋대로 나뉘어 벽을 만드는 통에 방향까지 헷갈리고,

굉음과 진동 탓에 주변의 기척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버렸다.

해원기가 얼른 정록을 둘러업고서 주위를 살폈다.

내상이 중한 정록을 위해 독보적인 검왕법신의 호신지기(護身之氣)를 한껏 확장했으나,

언제까지 버틸 수만은 없는 노릇.

정록이 억지로 일러준 ‘와해력산’과 여 대부란 자가 외치던 ‘토석환원’이란 말이 이 험경을 벗어날 유일한 단서다.

‘정교한 구조의 보병정도 오직 돌로만 구축되었다. 와해력산은 와력, 즉 진흙과 돌로 흩어진다는 뜻. 토석환원 역시 굽고 다듬었던 형태를 잃고 본래의 재질로 돌아간다는 말이니.’

종유동굴로 이루어진 지하광장.

거울같이 매끄러운 기초도, 정교한 구조의 정자도 석재 이외에는 쓸 것이 없다.

쪼개진 석대가 파도처럼 출렁이고, 위에서는 부서진 종유석이 비가 되어 쏟아지며, 아래에는 박살 난 석순이 마구 날려서.

말 그대로 전부 흙먼지와 돌가루로 화하는 원인.

그건 물이다.

정록의 한쪽 팔을 바짝 당긴 해원기가 오른손을 우측으로 힘차게 뻗었다.

검왕수의 사지무성.

예전 대첨산에서 쏟아지는 눈보라를 헤쳤을 때처럼 밀려드는 와력과 토석을 벌리고선,

막 돌기둥에 의해 닫히려는 틈으로 몸을 날렸다.

황금이 녹아 흐르는 것 같았던 물줄기. 그 흐름을 쫓을 셈이다.

정면으로 불쑥 다가오는 기둥을 피해 이 대부가 훌쩍 물러났다.

잠깐 사이 차단된 시야. 이가 갈리는 더벅머리도, 정교한 형태의 정자도 전부 가려졌고.

심지어 좌우로 나뉘어 정자로 향했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 대부!”

급히 곁으로 다가온 요술사가 납작한 팔각패(八角牌)를 들어 보였다.

철컥, 철컥.

팔방(八方)과 팔괘(八卦)가 뒤섞여 이리저리 돌아가는 패.

“혼돈(混沌)이 무수한 미로(迷路)를 만드는 이런 진세가! 여 대부의 말대로라면 지하광장은 금방 붕괴할 거요. 서두르지 않았다간.”

진법과 술법에 뛰어난 요술사가 무척 당황한 얼굴로 말을 맺지 못한다.

기관과 진세가 한꺼번에 발동된 지하광장의 급변. 당장 그 위험을 경고하던 여 대부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대부의 뒤를 받치려던 요술사와 감 대부가 다행히 한곳에 모였으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뿐 아니라, 입구 부근에 있었던 여 대부와 황의경장들도 보이질 않는 상황.

팔각패를 보이는 동안에도 영사태화를 익힌 감 대부는 쏟아지는 종유석을 쳐내기 바쁘고,

이 대부 또한 정신없이 뒤집히는 광경에 일 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회합을 위해 오래간만에 나온 강호. 이번에는 틀림없이 기대했던 것을 손에 넣어 큰 공을 세우리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전권을 위임받았었다.

책임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려고 한껏 신경을 써서 화산에 일부러 손을 보태주기까지 했건만.

목표에 닿으려는 순간, 이런 꼴이 되다니.

‘이게 전부 그놈…….’

해원기라는 놈 때문이다. 절세검왕이라는 전설의 주인공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더벅머리의 허름한 꼬락서니.

퍼펑.

커다란 파편이 바로 코앞에 떨어지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가 부득부득 갈리지만, 지금은 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빌어먹을 지하광장에 파묻혀 고력사의 무덤을 대신 채워줄 수야 없지.

“감 대부는 퇴로를. 여 대부의 위치를 찾아! 신술사는 존자와 신승을! 빨리!”

급박한 처지라 말투조차 아랫사람 부리듯.

그러나 감 대부는 물론, 요술사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세 사람이 함께 손을 휘둘러야 할 만큼 파편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해서.

전신을 보호하며 어떻게든 벌어진 틈을 찾을 생각뿐.

그런 그들의 눈에 정자의 한 귀퉁이가 힐끗 스쳐 간다.

파파파파.

덩굴이 뻗는 듯한 사지무성의 검기로 쏟아지는 돌조각을 베어내며,

해원기가 부신수영의 신법으로 돌기둥을 끼고 움직였다.

아무리 오랜 세월 굳어진 종유석 기둥이라도 손쉽게 부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의지를 지닌 것처럼 늘어서 벽을 이루는 건 기관과 진세에 의한 작용.

함부로 부셨다가 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쿠르릉.

뒤늦게 밀려오는 기둥을 빙글 돌아 피하면서 바닥의 석순들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여기는 태릉 묘역의 끝. 지하의 수맥은 당연히 위수(渭水)다.’

태릉의 위치는 위남현 오룡산 여맥인 금속산. 그리고 고력사의 무덤은 지맥의 흐름이 끝나는 포성 남향산 서촌이었다.

위수는 감숙(甘肅)에서 발원해 황하(黃河)로 들어가는 가장 큰 지류. 남향산은 남향(南向)의 음차(音借)이고, 서촌이니 고력사의 무덤은 동쪽으로 기댄 형태일 터.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감숙에서 발원한 위수가 황하가 되어 발해로 흘러가니까.

보병정의 댓돌에서도 ‘도도황하’라는 구절이 있었잖나.

비록 혼란한 지하광장에서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이 기관진세를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물. 보병정과 석대에서 시작된 변화가 어느 쪽으로 퍼져나가는지를 파악하면 방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신음과 함께 바짝 당겨 잡은 정록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정 형, 어깨를 꼭 붙잡게.”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고 빠르게 자신의 허리를 더듬었다. 요대자에서 백초환을 꺼내 등 뒤로 건네는 동안에도 오른손은 파편을 막느라 쉴 틈이 없지만.

“어, 움움. 추, 출구는 아마 동쪽. 폭파된 입구가 서쪽이니. 후우, 후우.”

해원기가 준 환약이 무언지 물어보지도 않고 아까 다하지 못했던 말부터. 억지로 심호흡을 하며 힘을 내려고 애쓰는 걸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해원기가 굳이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군. 정 형이 와해력산이라고 일러줘서 일단 진세를 움직이는 물의 흐름을 살피는 중일세. 그런데.”

파팍.

당장 머리 위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파편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정록이 해원기의 등에 기댄 채 힘겹게 바닥을 디뎠다. 여전히 출렁거리는 지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판에 무슨 흐름을. 후읍, 와해력산은 소멸진(消滅陣)이라 멈출 수가 없다고. 후우, 그런데 천장에서 종유석이 떨어지는 건 우리가 내려온 통기구가, 그러면 이 바닥이 아마. 흠.”

내상을 입지 않았다고 해도 공력을 끌어올려 집중해야 제대로 설 수 있을 지면의 요동이다.

지하광장의 천장은 바로 정록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흠뻑 젖었던 통기구.

통기구 안을 떠올리자 해원기의 두 눈이 환하게 빛났다.

과연 주장선을 계승한 사람답게 복잡한 지형의 기묘한 환경을 놓치지 않고 기억했던 듯.

바닥에 흐르던 옅은 개울. 정록과 달리 해원기는 동시안으로 그 개울이 아주 맑은 걸 똑똑히 보았었다.

지하광장의 천장에는 맑은 물이, 지하광장 내부에는 누런 물이.

정록은 기관의 동력인 물이 바닥을 출렁이게 하는 데 주의하려고 한 말이었으나.

해원기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맑은 물이 종유석을 떨구고, 누런 물이 바닥을 뒤흔든다. 와해력산의 진세는 두 가지 물에 의해 소멸로 나아간다.

“아하.”

해원기가 짧은 탄성을 토하며 다시 정록의 팔을 잡았다.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사자성어 하나.

경위분명(涇渭分明).

출렁이는 바닥으로 향하려던 시선이 퍼뜩 들려 종유석을 쏟아내는 천장을 살핀다.

못을 박듯 내리꽂히는 뾰족한 종유석과 파편이 시야를 뒤덮지만, 그 사이로 구슬을 꿰듯 이어지는 선 하나를 기어이 찾아냈다.

경수(涇水)는 맑고 위수는 탁하다. 훨씬 예전에는 경수가 탁하고 위수가 맑았다고도 하고.

어떻든 이 두 개의 지류는 바로 장안에서 제왕의 능묘가 있는 곳을 감싸고돌아 합류하며, 그 합수처(合水處)에서 두 지류가 섞이지 않고 뚜렷이 구분되기에.

청탁(淸濁)이 확연히 나뉜다는 뜻으로 경위분명이란 성어가 생겼다.

이는 대량의 토사를 끌고 흐르는 황하에서만 일어나는 독특한 현상. 곧게 흐르는 강(江)이 아니라 굽이치는 하(河)가 대지를 품는다.

위(渭)는 물이 복잡하게 꼬였다는 글자요, 경(涇)은 또한 경(徑)이러니.

지면을 흔들고 석순을 터뜨리는 누런 물은 지하광장 전부를 혼돈의 미로로 만들지만, 천장의 종유석이 떨어진 흔적은 곧장 한쪽으로 뻗어 나가 길을 가리킨다.

쿠르릉.

또다시 굉음과 함께 늘어서려는 돌기둥들.

해원기가 그보다 먼저 오른손을 힘차게 떨쳤다.

우웅.

조금 전까지 피하기만 했던 돌기둥을 대우신장으로 억지로 묶어놓고 벌어진 틈으로 빠르게 몸을 날린다. 착지할 곳은 종유석이 떨어져 길을 가리키는 천장의 한 줄기 선 아래.

그런데.

막 정록을 끌고 내려서려던 해원기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선풍이 일었다.

차차창.

“윽.”

황급히 일으킨 선풍결에도 정록이 허리가 찢겨 나동그라지고, 해원기의 소매도 한 움큼 잘려나갔다.

기습을 가한 자는 황의경장 셋. 각기 짧은 철봉과 갈고리, 조그만 삽을 들었고. 그 뒤에 선 여 대부와 마찬가지로 머리에는 전부 얇은 철판을 우산처럼 엮은 철엽산(鐵葉傘)이란 걸 뒤집어썼다.

화약이 터진 입구에 있던 자들.

여 대부가 면사 위의 눈을 가늘게 떴다.

“용케 이쪽으로 기어들었구나. 알고선지 우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선 거지. 우선 네놈부터 꿇려놓고 대부와 현신장을 찾아야겠다.”

촤륵.

말과 함께 손에 철필(鐵筆) 한 자루를 쥐며 성큼 앞으로 나선다.

무너지는 지하광장 안에서 출구의 단서를 찾아낸 사람은 해원기 혼자만이 아니었다.

본래 기관토목을 전문적으로 익힌 여 대부다.

도해를 풀어낸 요술사가 있으니 뒤에서 보조만 할 생각이었는데, 입구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 대부가 아예 자신을 앞세워버렸고.

헤진 도해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던 입구.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살펴야 했거늘, 안달하는 이 대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약을 동원했다.

물론 먼저 침입한 자가 있었으니 그 결정이 옳았다고 해야겠으나.

입구의 폭파에 휘말려 메뚜기처럼 튕겨 나간 놈, 녹의를 입은 그놈은 근처의 조그만 비석을 읽다가 큰 손해를 본 듯.

내부의 상황을 확인할 새도 없이 뛰쳐나간 이 대부들과 달리, 여 대부는 그 조그만 비석에 주의했다.

과연 손 쓸 틈도 없이 발동한 기관과 진세의 내용이 그 조그만 비석 위에 새겨져 있었으니.

토목환원의 소멸진을 빠져나갈 단서는 바로 천장에 있음을 간신히 발견했고.

혼돈의 미로에서 가장 피해가 적은 길을 겨우 골라냈다. 그 와중에 황의경장 둘을 잃긴 했어도.

그런데 대뜸 뛰어 들어온 해원기와 녹의를 입은 놈.

그간의 사정은 이 대부에게서 들은 간단한 설명뿐. 뜻밖의 방해를 받아 먼저 인솔했던 대부 둘을 귀환시키면서 자신과 감 대부를 급히 불렀고, 그 방해의 주인공이 전설의 검왕이라나 뭐라나.

설명이 워낙 간략하기도 했지만, 검왕이니 뭐니 그다지 믿기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직접 보니 가소롭기까지 하다.

새파랗게 젊은 더벅머리. 동료로 보이는 녹의를 걸친 젊은 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따위가 검왕이라고?

여기서 이놈들을 전부 잡아 꿇리고, 다른 대부와 현신장을 무사히 구해내면 그래도 체면은 세울 수 있을 테지.

밀각의 대부에 오른 실력. 고생해 익힌 사문신공(斯文神功)과 마침내 완성한 장원필법(壯元筆法)의 위력을 보여주마.

신변을 지키던 세 명의 황의경장을 물리고 혼자 나서는 여 대부에게선 자신이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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