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201화 (201/410)

제51장 경위분명(涇渭分明) (1)

“신기한 석대 위에 보배로운 병의 정자라. 아니! 저거, 혹시 스스로 빛을 낸다는 야명주(夜明珠) 아닌감? 귀하디귀한 보물이 두 개씩이나.”

정록이 정자의 편액을 풀어 읽다가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종유석이 가득한 지하광장을 환상적인 광경으로 바꾼 두 개의 구슬.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야명주라면 능히 성(城) 하나와 바꿀 정도의 엄청난 가치이니.

녹림의 족제비 눈이 돌아갈 수밖에.

그러나 정록은 성급하게 뛰어가는 대신에 마치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필경 하찮은 도둑 따위가 아니다.

흙투성이 한심한 몰골이 되도록 고생해서 이른 장소. 그만큼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고, 아울러 금은보화를 목적으로 오지도 않았으니까.

거울처럼 반듯하게 다듬은 석대와 육각의 병처럼 세워진 정자를 자세히 훑다가,

시선이 해원기에 멈추었다.

선뜻 말을 걸기 어려운 기묘한 표정과 눈빛.

가만히 눈치를 보자,

“하, 이런 일이.”

짧은 탄식과 함께 정록을 향하는 해원기의 얼굴.

기묘한 표정과 눈빛이 일종의 감개(感慨)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눈치 빠른 정록이 두 눈을 껌뻑였다.

“뭐야, 여기, 아는 곳인가?”

아는 곳인데 이 고생을 했을 리 없지.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라 걸 알면서도 묻게 된 건, 해원기의 탄식과 감개가 꼭 잃었던 고향을 되찾은 듯했기 때문이다.

해원기가 입가에 쓴웃음을 매달았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해야겠지. 아니, 아는 곳이라기보다는…… 흠, 인연이 있다고 해야 할까.”

스스로 생각해도 엉터리 같은 대답을 하는데.

키릭.

종유석 사이로 울리는 묘한 소리.

정록의 표정이 홱 바뀌었다.

“해 형, 자네는 정자를. 나는 이 광장의 입구를 확인할게.”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날린다.

해원기도 얼른 정신을 차렸다.

정자의 편액 하나로 확신하긴 이르다. 야명주 두 개의 휘황한 빛으로 뒤덮인 지하광장, 얼마나 넓은지, 어떤 구조인지, 또 무엇을 간직했는지 아직 하나도 모르는 상태.

더욱이 조금 전에 울린 건 분명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 지하에 들어온 이는 해원기와 정록만이 아니잖나.

정록이 말한 대로 서둘러 정자를 향했다.

과거에 사부는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에서 보병요(寶甁窯)를 찾았다고 했다.

세상에서 잊힌 천외육가의 하나인 신기역(神奇域).

호수 안의 섬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크기인 군산 일부분이 사실은 온갖 신통한 물건을 빚어낸 거대한 가마였다나.

어린 마음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들었던 희한한 모험 얘기.

결국에 주인 없는 그 가마는 사마의 계략에 이용되다가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신기역 보병요의 유일한 유물은 도리어 엉뚱한 경로로 해원기에게 전해졌었다.

당세에 녹림노조라 불리는 방송서의 가신(家臣) 셋, 녹림삼성(綠林三星)이 장강(長江)의 수채(水寨)에서 우연히 얻은 청강주(靑江珠)를,

사부의 제자가 된 해원기에게 선물로 증정했었고.

해원기는 그 청강주에서 소위 보병청강이라는 엄청난 힘을 얻지 않았던가.

그런 해원기가 지금 또 정록과 함께 이른 곳.

또다시 녹림의 인물과 신기역 보병요의 유적으로 보이는 장소를 찾다니.

기연(奇緣)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순이 가득해서 걷기도 어려운 지형에서 유일하게 평평한 석대. 표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워 대체 어떤 기술로 가공한 것인지.

해원기가 빠르게 석대를 살피면서 신중하게 정자로 접근했다.

딱히 별다른 기관이나 함정은 없는 듯.

그러나 정자 앞에 이르자마자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정자에 오르는 댓돌 세 개.

석판과 마찬가지로 매끈하게 다듬은 댓돌 표면에 글자가 아롱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의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하늘의 뜻. 기화만단(奇貨萬端)의 신기역은 이를 받들고자 애를 썼지만, 도리어 인심은 노력하지 않고 요행으로 일확천금하려는 욕심에 물들었다. 신기역이 만들어낸 온갖 기특한 물건이 마침내 기화(奇貨)라는 옳지 않은 단어로 쓰이게 되었으니. 이에 만단의 기화를 전부 세상에 흩어버리고 보배로운 병을 빚어내던 가마의 불을 껐도다. 오호라, 본디 천외(天外)에 있어야 할 본분을 잊고 세속에 끼어들었던 업보런가!」

첫 번째 댓돌. 과연 여기는 신기역 보병요의 유적이다.

「다시 천외로 돌아가련다. 비(雨)의 후예를 자각하는 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인적 드문 서쪽 끝, 세상의 물(水)이 시작되는 근원에 기대어 쉬련다. 마침 구름(雲)의 후예가 매(鷹)를 보내어 길을 일러주었구나. 아직 육가의 정분을 기억해 은혜를 베풀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을 버릴 수 없어 다시 이런 곳을 마련해야만 했으니.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망집이려나. 단 하나 남은 가신(家臣)을 환관으로 만들어 천하의 기보(奇寶)를 모으도록 하고, 나는 술(酒)과 시(詩)에 미친 척 천하를 뒤졌도다.」

두 번째 댓돌을 읽는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이 보기엔 모호한 내용이지만, 천외육가의 뿌리를 아는 해원기로선 보병요의 마지막 후대가 천금가(千禽架) 천응령(天鷹嶺)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고.

정자를 지은 이까지 추측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

지하광장은 바로 고력사의 무덤에 가려졌었다. 그렇다면 고력사를 가신으로 두고 같은 시기에 술과 시로 이름을 날린 자. 주선(酒仙)이며 시선(詩仙)으로 불렸던 사람.

이백이었을 줄이야.

「잃어버린 푸른 강이여, 곤곤장강(滾滾長江)의 정화를 잃은 죄를 어떻게든 갚고 싶었다. 그래서 보병을 여기에 안치하여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이미 태고(太古)에 사라진 하백지정(河伯之精)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만약 바람(風)의 후예가 집안에 남겨준 예언이 맞는다면, 도도황하(滔滔黃河)의 정화는 기어이 제 주인에게 돌아갈 터라. 하찮은 망집에 그나마 한 줄기 위안이 되는구나. 혹여 이 글을 읽는 이 있다면, 혹여 도도황하의 주인이 내가 기대하던 그분이라면. 부디 가르침을 저버리고 몰락한 이 우매한 후예를 용서하시길. 아아, 서글프도다.」

글을 끝났고 아무런 서명도 없었으나.

해원기는 누가 이 보병정을 지었는지 알았고, 천천히 시선을 정자 안으로 옮겼다.

기이한 인연.

지밀경(至密境) 풍뢰동(風雷洞)과 마찬가지로 천외육가의 또 한 집안이 이렇게 사라졌구나. 해원기 앞에서.

천고의 시선으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이 신기역 보병요의 마지막 후예란 사실이 놀랍기는 하지만, 그보다 이렇게 무너진 집안, 최후의 비원을 읽는 심정이 그저 수수(愁愁)로울 뿐.

해원기의 안타까운 눈에 정자 가운데 오도카니 놓인 조그만 병이 들어왔다.

육각의 난간, 육각의 지붕. 목재를 써도 어려울 정교한 구조를 돌로 다듬어 만든 기막힌 정자를 병 하나만이 지키고 있다.

어른 손바닥만 한 길이, 아래쪽은 둥글고 늘씬한 목을 따라서 위로 가면 사각으로 바뀐다. 흰 바탕에 분을 바른 것처럼 뽀얀데, 네모난 주둥이만 푸르스름하게 빛이 나는.

한눈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작은 병.

‘음.’

해원기가 정자 위에 오르며 미간을 모았다. 병을 보고 다가가자 자신의 내부에 일어나는 기이한 느낌.

묘실에서 추락한 후에 얼핏 느꼈던 친근감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자신이 흡수한 청강주는 본래 보병청강(寶甁靑江)이라고 불렸다지만, 녹림삼성이 발견한 것은 청강주뿐.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던 보병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두었을까.

신기대와 보병정을 짓고, 고력사의 무덤을 덮개로 삼아 감추면서까지.

동창의 밀각이 찾는 물건이 이 보병이라면.

아직 남은 의문을 가슴에 품고서 보병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콰쾅!

귀청을 찢는 폭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해원기의 귀에,

“으어헉, 위험해!”

정록의 다급한 고함이 들리고,

쾅, 쾅.

폭발과 함께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리는 광경. 그러면서 지하광장 전체가 뒤흔들린다.

와드드드, 콰콰콰.

종유석이 뚝뚝 떨어져 석순이 박살나고,

황금이 녹아 흐르는 것 같던 물줄기가 돌연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거울처럼 매끈하던 석대가 좍좍 갈라지더니, 보병정이 몸서리치듯 마구 떨어대니.

왈칵.

쥐려던 보병이 그대로 해원기의 손으로 쓰러져버렸다. 병이 깨질까 봐 반사적으로 내민 손바닥. 겨우 주둥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걸 막았는데.

본래 빈 병이었나. 이슬 같은 게 한 방울 흘렀을 뿐.

그러나 흔들어볼 새도 없었다.

퍼펑.

“뭐야? 이놈은 어디서 나온 거야?”

“이따위 함정이 있다니. 그럼 아직 기관이 더 있을 수…….”

“잡아! 무조건 잡으라고!”

어지럽게 뒤섞인 목소리는 분명히 밀각의 대부와 현신장이었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정록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기에.

채 십 장도 되지 않는다.

해원기가 벼락같이 몸을 돌렸다.

몸에 걸친 녹의 곳곳이 찢긴 채 정자로 몸을 날린 정록의 바로 뒤.

이 대부의 제왕군림신공이 무지막지한 장력을 토하고, 좌우로는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소매를 활짝 펼친다.

붕익천강이라던 괴이한 돌풍과 줄기줄기 뻗는 차가운 기운이 정록의 전신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해원기의 두 손이 빠르게 갈마들었다.

발검제형과 재단경위.

정록의 위급함 때문에 급하게 쳐내긴 했어도 이미 오의를 깨달은 검왕수가 공간을 거침없이 꿰뚫는다.

퍼퍼퍼펑.

무지막지한 장력, 괴이한 돌풍, 줄기줄기 뻗는 차가운 기운.

검왕수와 부딪쳐 터지면서 주변의 종유석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그러지 않아도 지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지하광장이다.

격돌의 여파에 위에 매달린 종유석이 아예 소나기처럼 떨어지고, 석순들은 화산처럼 터져나가며, 누런 물줄기가 사방에서 분수처럼 치솟는다.

해원기를 발견한 이 대부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놈! 존자, 신승, 저 정자를!”

단박에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고, 허리를 뒤틀어 억지로 앞으로 움직였다.

도해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올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꽤 시간을 잡아먹었고. 마지막 석문은 도저히 열 수가 없어서 억지로 화약과 힘까지 썼거늘.

그렇게 이른 곳에 엉뚱하게 해원기가 먼저 와 있다니.

폭파한 석문 근처에서 메뚜기처럼 튀어 달아난 놈은 또 뭐냐.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일이 전부 헛수고가 될 판.

종유석으로 가득한 지하광장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정자.

목표한 물건의 소재를 직감했고, 벌써 빼앗겼을까 안달이 났다.

녹의를 입은 메뚜기보다 저 더벅머리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설사 절세검왕이라 할지라도.

간신히 석판 끝에 내려선 정록. 훌쩍 정자를 벗어나 비틀거리는 정록을 급히 부축한 해원기의 눈썹이 바짝 솟구쳤다.

갈기갈기 찢긴 녹의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허옇게 질린 얼굴은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탓.

석문을 파괴한 화약과 이어진 막강한 장력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해 형, 여기 아직 와해력산(瓦解礫散)의 기관진도(機關陣圖)가 남았. 추, 출구는 오직. 커억.”

왈칵 토해낸 핏물이 해원기의 앞섶을 물들이는데도 어떻게든 말을 전하려고.

해원기의 두 눈에 불꽃이 확 피어오르면서,

주위를 무섭게 훑었다.

좌우로 돌아 정자를 향하는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손바닥 두 개를 어지럽게 교차하며 정면으로 다가드는 이 대부.

그리고 뒤이어 낙혼금종을 꺼내든 요술사와 뱀처럼 바닥을 미끄러져 오는 감 대부.

파괴된 입구 근처의 여 대부와 황의경장 몇을 제외한 전부가 덤벼들지만,

해원기는 정록을 뒤로 돌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지하광장을 뒤흔드는 무서운 진동보다 더한 노기가 들끓어서 모조리 베어버릴 셈.

그런데.

쿠르릉, 쿠르릉.

소란스러운 지하광장에 갑자기 전해지는 또 다른 굉음.

쩍쩍 갈라진 석대가 제멋대로 일어서고 가라앉으며 위치까지 바뀌고, 그 사이로 열주처럼 늘어섰던 종유 기둥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든다.

지하광장 전체가 마치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 장난감마냥.

덤벼들던 자들이 모조리 멈칫거리고, 입구에 섰던 여 대부의 놀란 외침도 중간에 끊겼다.

“지하 건축이 전부 토석(土石)으로 환원…….”

쿠르릉.

돌연히 석벽으로 가로막힌 듯 시야조차 격절(隔絶)되면서.

정록의 어깨를 잡은 해원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뒤에 있었던 정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정록을 구하느라 빈 병을 그대로 놔둔 정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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