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신기능묘(神奇陵墓) (3)
“이제 조용하네. 그 새로 온다던 놈들 맞으러 나갔나?”
정록이 얼굴을 돌리며 귀를 마구 문질렀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바로 뒤. 우물처럼 파인 형태의 토굴은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 교묘하게 가려져서 바로 옆을 지나가도 알아채기 쉽지 않다.
두 사람이 바싹 웅크린 채 겨우 앉을 넓이.
한쪽 면에만 판자를 대고 그 가운데에는 둥그런 죽통(竹筒) 끝이 삐죽 튀어나왔는데,
조금 전까지 계속 귀를 붙이고 있었던 정록은 어지간히 간지러웠던 듯.
해원기가 그런 정록에게 새삼스럽게 감탄을 표했다.
“허, 이거 대단하구먼. 미리 이런 장치까지 다 갖추어놓는다니, 도굴꾼도 만만치 않은걸.”
본래 지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멀찍이서 동정을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록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해원기를 끌고 온 이곳.
과거에 도굴꾼들이 준비해둔 장소란다.
은신해서 망을 보기에도 적당하고, 땅밑으로 파묻은 죽통을 민가까지 이어붙여서 소리를 전할 수 있게 해놓았다.
전성통(傳聲筒)을 갖춘 망루 겸 은신처.
“응, 나도 처음 봤을 땐 기가 막히더라고. 오면서 얘기했듯이 왕릉 도굴은 시작부터 규모가 달라서 말이야. 그때도 공부가 되었지만, 덕분에 이렇게 편히 놈들 얘기를 다 듣잖아. 흐흐.”
도굴도 공부라는 친구. 짓궂은 웃음에 해원기의 얼굴이 풀어졌다.
당나라 전성기의 황제였던 현종의 묘역이다. 배장된 고력사의 무덤에도 묘지기를 두었을 터.
그러나 원나라를 거치면서 관리 체계가 다 흩어졌고, 살 곳을 찾아 묘지기들도 떠나갔다.
세상에서 잊혀가는 폐묘가 되었는데.
그래도 제왕의 묘역을 도굴하는 건 상당한 준비가 필요한 일.
묘지기와 일가붙이가 산다고 여겨질 몇 채의 민가도 사실은 과거의 도굴꾼들이 다시 지은 거라나.
만일에 대비해 능묘를 시찰하러 온 관원으로 위장까지 하면서,
장기간 머물러 무덤을 샅샅이 뒤질 만반의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큰 무덤이요, 귀한 물건이 숨겨져 있다고 여겼기 때문.
이 토굴까지 안내하는 동안 소위 도굴꾼의 투자(?)란 걸 정록을 통해 알게 되었으나,
막상 민가 내부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세상의 이면이 신기하기 그지없지만.
해원기가 다시 정색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쪽에는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기척을 조심하세. 저들은 만만치 않아.”
해원기와 정록이 번갈아 청력에 집중하고서야 겨우 민가 안의 대화를 엿들을 만큼 전성통의 기능이 별로지만,
역시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정록이 바로 바닥의 흙덩이로 죽통 입구를 틀어막는다.
“해 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자, 검왕의 분부시다, 일단 조용히!”
그러면서도 기어이 농담 한마디는 덧붙여야 직성이 풀리는지.
오는 내내 경공으로 은근히 해원기를 살폈던 정록이다. 도대체 검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더벅머리 청년의 능력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장안에서 위남을 거쳐 태릉의 입구까지, 그리고 다시 포성 외곽을 돌아 여기 고력사의 무덤에 이르는 상당한 거리.
복잡한 성안, 널찍한 관도, 황량한 벌판, 험난한 산길. 지형도 다르고 방향도 바뀌며 속도조차 완급을 오갔거늘, 초행길이라는 해원기는 조금도 어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토굴에 이르자마자 지친 숨을 겨우 삼키던 정록과 달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중간인지 훤히 보이지만,
위를 올려다보면 정상이 코앞인지 아득히 하늘 끝인지를 알 수 없다던가.
‘나로서는 잴 수 없구먼. 킁.’
그렇게 코 울림까지 속으로 울리게 한 해원기가 만만치 않다고 평가한 적들.
제왕군림신공을 익혔다는 밀각의 이 대부, 공동과 아미를 집어삼킨 현신장 셋. 농담을 덧붙이면서도 정록의 표정은 단단히 긴장한 빛을 띠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세웠다.
“정유시(正酉時) 쯤 된 거 같은데. 여긴 몇 차례나 도굴을 당한 곳이라 조금 있으면 길이 열릴 걸세. 동창이 뭐하러 빈 무덤에 들어가는 걸까?”
전성통으로 엿들은 대화.
도면까지 찾아 묘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이다.
태릉을 놔두고 고력사의 무덤을 여는 목적. 설마 재물은 아니겠지.
해원기가 잠시 눈썹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동창의 도굴. 관병 삼백을 거느리고 당당히 묘를 여는 행위를 도굴이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능묘를 담당하는 관원도, 토목 일을 할 일꾼도 데려오지 않고.
대신 절정의 무공을 지닌 자들이 직접 나섰다. 그것도 역사적인 도읍에서만 은밀히 회합한다는 무리가. 제왕의 능묘를 놔두고 배장된 환관의 무덤에.
다른 목적이 있다.
낙양의 용문석굴, 장안의 고력사 무덤, 제갈세가에서 유출되었다는 도면.
‘뭘 찾으려는 건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고리를 찾기 어려운 문제.
굳이 육악지력의 셋을 지닌 자들을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터.
무엇이든지 간에 분명히 동창이 획책하는 음모를 밝힐 단서가 된다.
눈을 들어 정록의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얼굴을 보았다.
“먼저 들어가 봐야겠는데. 음.”
관병 삼백, 이 대부와 현신장 셋, 그리고 새로 온다는 고수 둘. 어찌해야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정록이 멀쩡한 얼굴로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뭔 짓을 하는지 궁금하던 판이라. 일단 조금 아래로 내려가세.”
해원기의 미간이 살짝 주름을 잡았다.
조금 아래면 관병들이 한참 파내던 입구 쪽. 기껏 기척을 숨기고 엿들은 보람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잔 건가.
정록이 찡긋 한쪽 눈을 감는다.
“몇 차례 도굴하면서 길을 냈지만, 매번 같은 길로만 다녔겠나. 오래된 무덤은 쉬 무너지기에 피신할 샛길을 따로 파놓지. 꾼들끼리는 족제비 구멍이라고 부르는 게, 요 아래 있거든.”
말을 끝내자 웅크렸던 자세 그대로 살금살금 토굴 밖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딱 족제비 같다.
해원기가 비로소 정록에게 왜 화호초란 별호가 붙었는지 이해했다.
꽃 파는 소녀로까지 순식간에 외모를 바꾸는 재주는 그야말로 여우 뺨치고,
도굴이라는 짓까지 공부로 익혀 써먹는 이 능란함은 족제비보다 더하다.
다시 풀어지는 얼굴 근육을 느끼면서 해원기가 부신수영으로 기척도 없이 정록의 뒤를 쫓았다.
족제비 구멍이란 말 그대로.
한 사람이 바짝 기어야 겨우 들어갈 좁아터진 흙구덩이가 또 오래 방치되어 군데군데 무너지고 막혀서,
용을 쓰며 나아가는 정록 뒤에서 해원기도 흙범벅을 면할 수 없었다.
일 각쯤 걸렸을까.
퍽.
두 사람이 트인 공간으로 굴러 나왔다.
“퉤, 퉤. 흙덩이로 저녁 끼니를 때울 줄은 몰랐구먼. 젠장.”
앞에서 구멍을 뚫느라 어지간히 고생한 정록의 입에서 욕지기가 절로 나오지만, 바로 곁의 해원기를 보곤 얼른 목소리를 낮춘다.
“여기가 전실(前室)일걸세. 여기가 끝인 줄 알았다가 관곽이 텅 비어서 후실(後室)을 찾아냈다더군. 값나가는 게 꽤 있었다던데. 지금이야 뭐. 킁.”
한때 큰 권세를 누리던 고력사. 현종의 능묘에 배장까지 되었으니 무덤 안도 평범하진 않아서.
돌을 깐 포도(鋪道)가 길게 묘 안으로 이어지고, 관곽이 놓인 묘실(墓室) 좌우에는 벽장 형태의 공간과 진열대가 놓인 호화로운 구조다.
그러나 이 묘실도 교묘하게 나누어져 진짜 시신과 보물들은 뒤쪽에 따로 감추어두었다나. 결국 전부 도굴되어 남은 거라곤 진짜 먼지가 되다가 만 뼛조각 몇 개뿐.
해원기가 머리와 얼굴에 붙은 흙더미를 떼지도 않고 묘실의 문 쪽에 시선을 보냈다.
“아직 묘실 석문의 기관까지 오지 않은 듯하군. 서두르세.”
이런 호화로운 무덤에 기관이 없을 리 없다.
묘를 열어 포도를 따라 오는 것만으로도 능숙한 도굴꾼들이 무수히 해를 입었고, 특히 마지막 묘실 석문을 여는 데에 무진 고생을 했다는 소문.
전부 정록이 열심히 공부한 덕에 알게 된 내용이다.
허나 상대는 해독한 도면을 지녔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재빨리 묘실 내부를 훑어보고 다시 족제비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게 정록과 상의한 계획이었다.
금은보화가 있든 없든, 희귀한 보물이 남겨졌든 말든.
육악지력의 셋을 대동한 이유가 될만한 게 무엇일지.
정록이 얼른 전실의 중앙으로 움직였다.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석곽(石槨)이 벽면에 붙었고, 그 앞에는 역시 석재를 다듬은 낮은 책상과 촛대가 제사상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정록이 바쁘게 촛대 두 개를 돌리고 제사상을 이리저리 흔들자,
그긍.
낮은 음향과 함께 석곽이 한 치쯤 밀려 나온다. 미리 들었던 대로 해원기가 석곽을 옆으로 미니 비로소 드러나는 좁은 입구.
그 입구 안으로 똑같은 형태의 공간이 보였다. 진짜 묘실인 후실.
해원기와 정록이 지체하지 않고 곧장 후실로 뛰어들었다.
빠르게 사방을 훑는 둘의 시선.
그러나 앞의 전실과 다를 바 없이 여기도 그저 석곽과 제사상뿐. 눈에 띄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선사의 가르침 중에 기관을 알아보는 항목이 있긴 해도. 여긴 딱히 걸리는 부분이 없네. 크흥.”
화예(畵藝)를 바탕으로 하는 고화문인 만큼 숨겨진 의미를 찾는 안목이 남다른 정록이 맥없이 코를 울렸다.
몇 번이나 도굴을 당한 무덤에 뭐가 남았을 리 없지. 하다못해 뼛조각에 붙은 금박까지 모조리 벗겨내는 도굴꾼들이잖나.
해원기의 눈에서도 은은한 비췻빛이 사라져갔다. 동시안에도 특별하게 보이는 부분이 없다.
헛수고.
괜히 정록만 고생시킨 셈이고, 또 그 족제비 구멍으로 서둘러 빠져나가야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드드드드.
돌연히 전해지는 진동.
“어?”
발밑의 석판이 제멋대로 출렁거려 정록이 비틀거리고, 해원기도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지진이 났나.
얼핏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
퍼펑!
바닥이 뻥 뚫리면서 전실과 후실, 묘실이 통째로 무너져버렸고.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해원기와 정록이 아래로 떨어졌다.
석곽과 돌 탁자, 벽장과 선반 따위가 모조리 부서져 쏟아져 내린다.
횃불이 훤하게 앞을 비추자,
평탄하게 아래로 경사를 이루던 포도가 뚝 끊겨 계단으로 바뀐 게 보여서.
요술사가 만족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묘실을 둘로 나누어 후실을 감춘 건 눈속임. 진짜는 기관의 중추를 입구에 숨겨놓은 것이라니. 둔갑삼가의 잔머리는 알아줘야겠소이다.”
오른쪽에는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왼쪽에는 이 대부와 면사로 얼굴 아래쪽을 가린 회의인 둘. 그리고 황의 경장을 단단히 갖추어 입고 횃불을 든 자들이 앞뒤로 열 명.
넓지 않은 포도를 꽉 채운 많은 인원이지만, 함부로 움직이는 이는 하나도 없다.
이 대부의 복면 속 눈매가 가늘어졌다.
“비록 도면이 제갈세가에서 유출된 것이라지만, 지하 건축의 이런 변화는…… 흠, 여(余) 대부는 어떻게 보시나?”
좁은 어깨에 마른 체형을 지닌 회의인이 머리를 살짝 틀었다.
“글쎄요. 저라고 뭐. 그래도 굳이 건축만 따진다면 이 무덤은 대조주가의 손이 미친 듯합니다만.”
상당히 맑고 힘이 담긴 음성. 훤한 이마와 굵은 눈썹이 나이가 그리 많은 것 같진 않다.
“과연 여 대부의 기관토목 쪽 안목은 남다르구먼. 여 대부와 감(甘) 대부, 두 사람이 가세하니 아주 든든하오. 일단 비고가 있다는 건 믿을 만하다는 얘기인데.”
통통한 체구의 회의인이 감 대부. 이 둘이 단 대부와 조 대부를 대신해 새로 밀각에서 왔다는 자들인 듯.
이 대부가 은근히 거드름을 피우는 게 마땅찮은 오온존자가 대뜸 여 대부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조주가든 뭐든 어차피 둔갑삼가지. 뭐 색다르게 아는 건 없나? 고력사의 무덤이 비고 위에 지어진 이유라든가.”
그러나 대답은 다른 쪽에서. 이런 질문을 기대했던 것처럼 감 대부란 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침 그간의 조사에서 어느 정도 결론을 얻었답니다. 현종의 태릉을 금속산에 정한 게 사실은 고력사의 뜻이고, 고력사에게 이를 종용하면서 아예 이곳에 배장한 무덤의 기관까지 부탁한 자. 그가 서쪽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이유가 바로 이 비고를 폐쇄하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여 대부보다는 자못 부드러운 말투.
누구나 호감을 느낄 싹싹한 대답에 다른 이들의 시선도 모여든다.
새로 대부 둘이 도착하자마자 무덤 안으로 들어왔기에 간단한 인사만 나누어서 아직 자세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무뚝뚝한 진여신승도 궁금했던지 바로 되묻는다.
“그가 누구?”
이제껏 추정만 무성해서 낙양과 남경에서의 회합도 번번이 허탕에 그쳤었다. 이번 장안에서야 비로소 기대하던 비고를 찾는다면 바로 밀각의 결론이 맞았다는 뜻.
감 대부의 면사 속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컴컴한 지하에서 무료함을 달랠 소재로 떠들 생각이었습니다만. 하하, 시선 이백입니다.”
뜻밖의 이름. 이 대부와 요술사를 포함한 모두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