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신기능묘(神奇陵墓) (1)
“정 형은 아까 오 형을 소매라고 부르더군요.”
해원기가 말을 건네자 정록이 입맛을 다셨다.
“그게, 나이로 보나 역용의 재주로 보나 내가 당연히 오라버니뻘이 되니까. 킁.”
별로 자신 없는 코 울림이지만, 정록은 진즉 오소민이 여자란 걸 알았다는 뜻이다.
해원기가 귀여움이 지나친 정록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전에 태산을 향할 때 증명단이 조사하듯 묻는 바람에 다들 나이를 밝힌 적이 있다. 오소민이 스물다섯이었으니 정록은,
“올해 스물여덟이고, 오 소매에게 역용을 가르쳐준 게 나거든, 요.”
덧붙인 설명에 해원기가 눈을 껌벅거렸다.
“그럼 기묘생(己卯生)입니까?”
“그렇, 어, 해 대협도? 동갑?”
생년을 따지는 이유가 뻔해서 정록도 조금 놀란 모양. 고개를 끄덕이는 해원기를 향해 인상을 쓴다.
“그거 정말이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동안으로. 허, 누가 믿겠소?”
이거야말로 누가 할 소리인가.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데. 그런 해원기를 보던 정록 역시 눈가에 주름을 잡다가 와락 상체를 내밀었다.
“난 높임말이 영 어색해서. 해 대협, 동갑내기끼린데 그 말투 좀 어떻게 안 될까?”
대뜸 나오는 반말에 해원기가 쓴웃음을 환하게 바꾸었다.
“좋소. 아니, 좋네. 호칭도 서로 형으로 하지.”
동갑이란 게 묘하게 친밀감을 주는 이유.
정록의 활달함에 물들었는지 해원기가 선선히 동의했고,
말이 편해지자 대화 또한 술술 나아간다.
“개방의 신비라는 게 딴 게 아니거든. 뭐 거지가 남녀를 구분할 리 없지만, 장로까지 올라간 여자는 극히 드물지. 어렸을 때 노조의 지시로 역형대법의 기초를 일러준 적이 있고, 다시 얼굴을 본 건 십여 년이 지나서. 여전히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구먼. 쳇.”
혀를 차며 얼굴을 구기는 정록.
개방 내부에서도 윗자리에 있는 이들이나 녹림장관의 몇몇밖에는 모르는 사실이고.
소위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는 말이 본래 오소민의 성별을 숨기는 의미라는 건데.
정록도 꽃 파는 소녀로 알았던 해원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보니 속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런데 역형대법이라면 정 형의 사승(師承)은…….”
말을 끄는 이유가 있고,
정록이 구겨진 자신의 얼굴을 슬쩍 돌렸다.
“해 형은 검왕이니까, 그걸 물어볼 것 같더라. 선친이 고화문(古畵門)의 기명제자(記名弟子), 난 제대로 선사의 유학을 이어받았다고 재전제자(再傳弟子)라네. 뵌 적도 없지만, 선사는 주장선(拄杖仙)이란 외호를 쓰셨다고. 킁.”
과연.
해원기가 알기로 역형대법은 과거 강호사괴(江湖四怪)로 일컬어졌던 금기서화(琴棋書畵)의 네 기인, 그중 주장선 한우령의 독문절학이었다.
사부와 함께 협의를 행하다 불운하게 유명을 달리한 괴걸. 이미 한 세대 전이거늘 그 맥이 끊이지 않고 이렇게 후대를 두었구나.
“다행히. 참으로 다행히 정 형에게 이어졌.”
감개 어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록이 벌컥 목소리를 높인다.
“뭐가 다행이야? 아주 죽을 똥을 쌌다구. 사백(師伯)이라는 종노선생(鍾老先生)한테 전신 뼈마디란 뼈마디는 다 부러졌지, 얼토당토않게 녹림의 장관에 어울린다고 노조에게 끌려가 온갖 도둑질에 동원되었지…… 나 참.”
해원기가 전하려던 위로의 말을 대뜸 끊으며 커다란 눈을 부릅뜨다가,
갑작스레 기승을 떨던 게 무안했는지.
정록이 뺨을 긁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도 맹주가 몇 가지 가르쳐주면서 보살펴준 은혜 때문에 참고 지내는 거야. 이제 됐지?”
성격이 괴팍했던 주장선과 가장 가까웠던 이는 탁 소숙이었다.
정록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중에서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랄까.
해원기가 잠시 입을 닫고 미소를 지었다.
주장선의 역형대법을 확인한 후에는 다른 걸 물을 생각이었는데.
정록이 괜히 자기 혼자 떠들어댄 거다. 그래서 이 동갑내기가 상당한 능력을 지녔다는 걸 알게는 되었지만.
대화가 멈추는 게 싫었는지.
정록이 또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는 일단 해 형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또 유 타주가 괜스레 감상에 젖는 바람에 묻지를 못했는데. 그 육악지력의 셋인가 하는, 아미의 둘과 공동의 하나가 전부 화청궁에 나왔다고? 그것들 실력이 어땠나?”
화제가 다시 돌아가자 해원기가 미소를 지웠다.
신화에서 예(羿)에게 퇴치되었다고 전해지는 태고의 악수 여섯. 육악지력의 셋으로 여겨지는 자들.
“당금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울 걸세. 확실히 상리에서 벗어난 능력, 그러나.”
“그러나?”
해원기의 지나온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당금 무림의 고수라면 비천무영 황정리와 화산검협 마린일 터.
그들조차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다니 정록이 믿기 어려웠으나 해원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중각경(頭重脚輕). 그런 느낌이 없지 않더군.”
정록의 한쪽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워낙 큰 눈이라 그다지 티가 나진 않지만, 이렇게 한쪽 눈만 다른 모양이 되는 게 정록의 특징.
그리고 일부러 지어낸 게 아니라면, 상당히 놀랐다는 반응이다.
두중각경.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가볍다. 그저 시정에서 쓰이는 속된 표현에 불과하나, 무인에겐 심각한 의미.
정록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을 때 나왔던 세 사람이 모두 이를 경계하라고 가르쳤었다.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면 어찌 되는가. 무거운 머리를 가녀린 다리로 버티면 결국 흔들흔들 엎어지기 마련이다.
철금선생 종지음, 녹림노조 방송서, 그리고 천극 탁관영. 아득한 경지에 오른 진정한 고인(高人)들과 같은 말을 하다니.
해원기가 자신의 내력을 궁금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록 역시 이 검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싶었다.
사천을 돌아보며 아미파의 두 괴승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은 정록이지만, 그걸 이렇게 간단히 평가하는 건 그 이상의 경지여야 가능할 터.
해원기가 자신의 말에 조금 어폐가 있다고 여기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정체 모를 독공이나 괴상한 병기 따위가 그래서 필요했겠지. 미리 알고 방비한다면 어찌 오랜 세월 한길을 걸은 고수의 상대가 되겠나. 더구나 난세를 겪은 분들이거늘.”
자칫 황정리나 마린에게 실례가 될까 덧붙인 말이지만,
그만큼 비천무영의 경공이나 화산검협의 검학으로도 쉽지 않은 상대들이다.
그뿐인가. 밀각의 대부라는 자들 또한 전부 희귀한 신공절학을 지녔으니.
해원기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한다.
“나도 역시 검이 있어야.”
결심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온 건 새로 사귄 친구와의 대화가 편했기 때문일지도.
정록이 한쪽 눈을 거의 감을 정도로 찡그렸다.
윗대에서 팔자의 언약인가 뭔가로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게 해서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지만.
검왕의 검.
그 이름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검왕이라는 친구가 어디에다 두고 이렇게 맨손으로 돌아다니는 걸까.
해원기가 손을 천천히 말아 쥐면서 시선을 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음, 역용술에 관해 좀 알려주겠나?”
화제를 바꾸자 정록이 표정을 고치고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야 동갑내기라고 말을 놓은 사이지만. 어쩐지 검왕이라고 전해진 이 더벅머리 친구의 기질을 알 듯한 기분.
온화하고 차분한 게 지나쳐 답답할 정도로 진중한 면이 있다. 지금의 질문도 그저 흥미로 입에 올린 게 아니요, 역용술을 배우려는 건 더더욱 아닐 터.
“역용화신에 능한 자를 만났구먼? 그게 누군가?”
기민하게 되묻자 해원기가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지나온 이야기에서 제갈봉의 부분은 대강 생략했거늘, 이 친구는 잘도 짚어낸다.
제갈봉의 신세나 그간의 행적, 그리고 오소민의 대응이 마음에 걸려 아직은 공개를 보류할 생각이라,
“누구라고 밝히긴 그렇고. 음, 완전히 다른 사람, 음성이나 체구뿐 아니라 얼굴까지 바뀌더군. 그것도 눈앞에서 옷을 휙 뒤집는 순간에. 그렇게 신기한 역용술은 처음 봤네. 아, 물론 자네를 만나기 전이라.”
정록은 옷이 아니라 그야말로 머리를 숙였다가 드는 사이에 바뀌는 수준.
대충 얼버무린 설명에 정록이 슬쩍 해원기를 살피다가 시선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제 막 친구가 된 사이.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역용이란 건 그리 대단치 않아. 약물과 도구를 써서 분장하는 정도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남의 흉내를 내는 재주와 수련이 필요하지. 뭐, 아예 대상의 얼굴 가죽을 벗겨서 뒤집어쓰는 인피면구(人皮面具)라는 사악한 방법도 있지만, 이것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네. 여기까진 일종의 기예나 술수에 속하고.”
아는 바를 정리해 진지하게 답해주는 게 도리다.
천천히 얼굴을 해원기에게 돌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니,
다시 조금 전의 꽃 파는 소녀로, 그리고 시장에서 음식 장사를 할 것 같은 아주머니로, 또 자리를 뜬 유항과 비슷한 모습이 되는 놀라운 변화.
“역형대법 같은 게 제대로 이치를 지닌 공부지. 선사의 유학은 바로 화의(畫意), 인지(認知)를 바꾸는 무학의 일종일세. 아까 시장통에서 여기 다루에 이르기까지 자네가 봤을 인물들이라 전혀 괴리가 없지.”
해원기의 눈이 깊은 호수처럼 변했다.
정록이 기꺼이 일러주는 도리. 박대정심의 의지가 자연히 귀를 기울이게 한다.
시장통에서 꽃 파는 소녀, 싸구려 음식을 파는 노점, 그리고 다루에서 흔히 보이는 한가한 노인들. 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라 이상하게 여길 수가 없다.
얼굴색을 바꾸는 약물을 쓰지 않아도, 눈썹과 입술을 그리고 수염을 붙이는 도구가 없어도,
머리 형태와 표정의 조그만 차이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정녕 심오한 이치를 바탕으로 한 기공(奇功).
“그런데 굳이 여러 무공을 섞어서 완전한 변형을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더군. 신근(伸筋)과 축골(縮骨)의 공력을 익혀 체격을 바꾸고, 혈류(血流)와 환용(幻容)의 기예를 더하여 얼굴을 자유자재로 고치는. 뿌리는 당대(唐代)에 서역에서부터 전래한 기환(奇幻)의 술법이라지. 이 방면에선 통틀어 기환요술(奇幻妖術)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지 않은 구석이 있지만, 능히 역형대법과 비견될만할걸.”
좋지 않은 구석.
인상을 쓰면서 도로 제 얼굴로 돌아온 정록이 머리를 젓는 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인피면구라는 사악한 방법과 같은 수준의. 그렇기에 그냥 역용술이 아니라 요술이라고 불렀을 터.
“나와 비슷할 정도라면 기환요술을 깊이 익혔을 거고. 그럼 심성이 영향을 받았을 텐데. 외양이 바뀌면 성격이나 기질도 따라가면서 심성이 몇 갈래로 나뉘거든. 누군지 몰라도 상종하지 않는 게…….”
정록의 설명을 들으면서 해원기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요술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정록이 말을 끝내기 전에 급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유항.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다가 손에 든 종이를 탁자에 올린다.
“이거 분타주로서 면목이 없군요. 황가약포가 그저 은밀히 정보 거래만 하는 곳인 줄 알았더니. 쩝.”
쓴 입맛을 다시는 건 의외의 상황이라서다.
종이에 쓰인 글씨를 보는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화산에 날아들었던 편지와 같은 서체. 제갈봉이 쓴 글이다.
“현신장과 밀각 대부가 태릉(泰陵)으로 향했다. 금의위가 인솔하는 관병도 수백은 되는 듯. 목적은 불명. 일단 먼저 살피러 떠나니 황가약포에 선을 대둘 것. 응? 누가 보낸 거지?”
옆에서 내용을 소리 나게 읽은 정록이 눈을 껌뻑거렸다.
보낸 이를 밝히지 않고 짤막하게 쓴 글. 상당히 촉박한 상황에서 쓴 것 같은데.
해원기가 대답보다 유항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태릉이 어디입니까?”
자신이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던 황가약포에서 서신이 날아든 바람에 곤혹을 감추지 못하던 유항.
그러나 내용이 간단하지 않기에 얼른 말을 받았다.
“동북쪽 위남(渭南) 외곽에 있는 당 현종의 능묘입니다. 현신장 셋과 밀각 대부라면 설마…….”
해원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섬서의 지리에 어둡지만, 자신이 지나온 길은 기억한다. 위남은 바로 화산의 서쪽. 운대봉에서 괴이한 짓을 벌였던 밀각이 화청궁에서 현신장과 회합한 건 화산을 다시 치기 위함인가.
“엇, 움직일 때인가. 좋아!”
정록이 기다렸다는 듯 따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