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96화 (196/410)

제49장 후회유기(後會有期) (4)

정록은 그런 유항의 심정은 관심도 없는 눈치.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깃발 먼저 꽂는 놈이 임자라. 이때라고 설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맨날 구주정문이니 전통이니만 따지다가 뒤통수 맞는 건 당연한 이치지. 새로운 생기(生機)라고 여겨서 좋았는데. 쩝, 이게 아무래도 누구 손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리. 얼마 전에야 동창이 배후란 걸 알았지만.”

땅콩 한 줌을 통째로 입에 털어 넣더니,

“우적, 정작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더란 말이지요. 슬쩍 귀띔해줘도 전혀 알아먹지 못하고. 이제는 전부 저 잘난 것만 내세우느라 거지나 도적 따위가 눈에 차겠나. 흐흥.”

이번엔 습관이 아니라 뚜렷하게 비웃는 코웃음.

해원기가 허리를 세웠다.

“사천 쪽 얘기인 것 같습니다만. 정 형, 자세히 알려주겠습니까?”

정록이 입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우연히 만난 검왕. 아직 무슨 일로, 어떤 이유로 장안에 왔는지 듣지 못했다. 그래도 희귀한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되는 대로 화제를 주워섬기는 판이었는데.

이 평범한 얼굴의 더벅머리 청년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히 진지하다.

한바탕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

워낙 발랄(?)한 성격에 엉뚱한 짓을 일삼는다고 화호초라는 별호가 붙은 정록이다.

꼬박꼬박 ‘정 형’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기분 좋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입술에 냉큼 침을 발랐다.

난세가 끝나면서 각 문파가 자신의 본산을 찾으려는 건 당연한 행동.

예전 사대검계로 묶였던 아미와 청성도 자연스레 산으로 돌아가 문호를 열었으나 두 파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본디 수선자성(修仙自成)을 목표로 하던 청성파는 흩어진 비전을 수습하자마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으나.

적잖은 절과 암자가 두루 산재한 아미산은 일단 중의(衆意)를 모으는 게 우선.

흔히 아미파라고 하지만, 종파와 전통이 서로 다른 불문이 구주정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하나로 여겨졌을 뿐이다.

백여 년 전에야 천하가 인정하는 성승이 출현하면서 금정암을 중심으로 단합했으나, 이제는 아득한 전설.

사대검계에 천불각이란 형태로 참여했던 이들은 대부분 보광사와 비래전 출신. 난세와 떨어져 절을 닫았던 복호사와 화엄탑은 이미 무림과 연을 끊은 셈이라 아미파의 재건은 어차피 천불각에 의해 주도될 흐름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완전히 예상을 뒤집었다.

갑자기 조용하던 아미산이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이더니,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내란.

복호사와 화엄탑이 천불각을 힘으로 짓밟았다.

불문 성지에 어울리지 않는 이 폭거에 천불각 승려 중에는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한 이도 있었는데.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긴 곤란하다나. 아니, 그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그다지 믿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연락도 닿지 않은 청성파야 그렇다 쳐도, 사천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는 당문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가련한 애원이 미처 이곳 섬서까지 이를 수가 없더라고, 요.”

해원기의 존대에 지나치게 흥이 올라서 자꾸 말이 짧아지는 걸 겨우 참는다.

그런 어투에는 관심도 없는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소림사에서 인광에게 미리 들었던 얘기. 진여신승과 오온존자가 복호사와 화엄탑에 등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정록은 관찰하는 처지라서인지 주변 사항이 조금 더 첨가되었고, 덕분에 어느 정도 사천의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구란와자 때문에 알게 된 사람들. 당문의 오매불망 당령과 황보세가의 황보관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부분이다.

“섬서로도 구원을 요청할 셈이었나 보군요.”

말을 받아주자 정록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사실 자파의 내분을 밖으로 드러내는 건 난감한 일이지만, 이전에 사대검계였던 인연에, 노검객들끼리의 친분에 기댈 수도 있잖수. 하지만 거리는 너무 멀고, 걸리는 점도 없지 않아서. 크흥.”

버릇인 코 울림.

해원기가 잠깐 기억을 되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검계를 이끌던 검노선생(劍老先生), 종남파의 영락진인, 화산검협 마린의 장인인 천주마검 공손무원은 한때 종횡강호 십팔마검으로 불렸던 이들.

윗대를 찾아 아미파의 참혹한 내란을 진정시키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섬서와 사천이 지경을 맞댔다고 해도 아득히 먼 거리.

그래도 화산보다는 그나마 가까운 편인 종남산까지 어떻게든 갈 수 있었을 텐데.

정록이 곧장 말을 이었다.

“당문은 종남 쪽과 연결되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거든, 요. 뭐, 종남파에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에둘러서 표현하는 걸 답답해하는 눈치.

해원기가 ‘걸리는 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인 청령선고의 특별한 신분. 도문에 출가까지 했어도 여전히 당문의 직계라는 사실은 잊히지 않고. 그만큼 껄끄러운 사이일까.

해원기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잠깐 눈을 감았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

대첨산 화전민 마을의 무참한 사건이 없었다면 발을 들이지 않았을 세상.

그러나 무림은 사부에게서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변했구나.

문파니, 체면이니.

불쑥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시 눈을 떴다.

“정 형은 쉴 틈이 없었겠습니다.”

사천의 얘기도 얘기지만, 정록이 이 섬서로 온 이유는 처음에 호중객잔 때문이었다고 했으니.

화제를 바꾸자 정록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거, 관주께 좀 말해주면 좋겠소이다. 어지간히 부려먹는다니까. 킁, 그래도 당세의 암류에 일찍부터 주목한 사람은 우리 관주뿐이지요. 겉으로 보이는 동창이 다가 아니란 거. 그 바람에 나는 갈아붙일 얼굴이 모자랄 지경이라.”

머리를 긁던 손이 통통한 볼을 잡아당겨 우스꽝스러운 꼴을 만드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유항이 비로소 끼어들었다.

“얼씨구, 자기 얼굴에 금칠도 적당히 해야지. 본래 싸돌아다니는 성격인 주제에. 여우인지 족제비인지 모를 행실이 그나마 이렇게 옳게 쓰이는 건 전부 방 관주 덕인 줄이나 알아.”

정록의 자기 자랑을 타박하며 시선을 해원기에게 돌린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무림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나부터 생각하고, 남과 거리를 두고, 귀찮은 일은 질색이요, 좋은 일이라면 달려드는 법이랍니다. 실상 아미파가 종남이나 화산에 구원을 청했다 해도 지금의 종남과 화산에 아미를 도울 여유는 없을 겁니다. 더구나 아직 내막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이상,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니. 마침 얼마 전에 방주께서 밀명을 내렸습니다.”

나이 먹은 티가 난다.

예전에 백협맹에도 참가했던 유항은 먼발치에서나마 사부를 본 적이 있는 사람. 혹시나 해원기가 당세의 무림에 실망할까 은근히 염려한 듯.

얼른 화제를 이어 붙였다.

“본 방 전 분타가 궁가중(窮家衆), 즉 총타에서 파견한 인원과 함께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도록 하셨지요. 그래서 사십팔걸(四十八傑) 중의 열 명이 제때 화산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 순행장로가 갑작스레 총타로 향한 것도.”

신중한 언사.

개방 총타에서 길러낸 정예인 궁가중을, 방주의 밀명을 이렇게 해원기에게 밝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파격이다.

정록의 자랑에 어느 정도는 자극을 받은 듯, 개방 역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

해원기가 다시 오소민이 남긴 전언을 되새겨보았다.

당혹스럽게 작별을 고한 이유는 여전히 미심쩍지만,

그러면서도 해원기가 찾아올 걸 예상하고 남긴 얘기들.

동창의 진짜 목적을 밝혀야만 한다.

육피구단, 표리부동이란 수수께끼에도 그런 뜻을 담았겠지.

지금은 친구를 믿고 움직여야 할 때.

해원기가 머리를 들어 유항과 정록을 보았다. 자신이 직접 겪었던 그간의 상황을 이들에게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꽤 긴 이야기.

찻잔에도, 주전부리에도 손을 대는 이가 없다.

유항과 정록 모두 해원기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저절로 몸이 앞으로 나왔고,

“제가 말재주가 없어서 빠뜨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대강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해원기가 말을 맺자 똑같이 잔뜩 굳은 표정을 짓는다.

유항이 먼저 수염을 만지며 혀를 찼다.

“쯧, 아홉 개의 금오혈석, 그리고 육악지력. 설마 사일신화일 줄은. 단목 가주의 생각에 이견을 달 사람이 누가 있겠소만, 참으로 당혹스럽군요. 더구나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한. 으음.”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벽세의 잔재가 드문드문 보이고, 지부의 오대마도가 다시 출현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 그토록 어렵게 되찾은 강호의 안정이 사상누각에 불과했었나.

난세를 겪은 유항과 달리,

정록은 조금 다른 부분에 주의했다.

“뭔가 덜떨어진 짓거리란 느낌이 드는데요. 암암리에 이루어진 겁표가 그리 쉽게 성공한 것도, 하북 팽가나 반룡령이 여태껏 단서도 찾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중원의 상권을 갈취하는 작자들이. 게다가 멀쩡한 백성들은 왜 끌고 들어가는 건지? 독으로 한 마을을 몰살시키고, 연극으로 내기에 몰두시키고, 축제로 날뛰게 한다? 영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아, 그 오온존자란 놈이 희한한 독을 쓴다고, 했죠. 육악지력이 오대마도보다 더 강하다는, 뭐야, 그런 막강한 능력을 죄다 나눠 가지면. 그 위에 더 엄청난 놈이 있다는 거야? 이거, 생각할수록 헷갈리는데, 요.”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마구 내뱉는 의문.

벽세든, 지부든.

그저 전해들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게 당연하지만,

해원기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지금껏 자신은 사건 가운데 처하느라 생각만 많았지, 이걸 전부 멀찍이 놓고 보지 않았구나.

들은 얘기를 한꺼번에 뭉뚱그려 조망한 정록의 의문이 훨씬 객관적이라는 걸,

황연히 깨달았다.

지나치게 깊이 따지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지혜로운 자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 사고에 골몰해서 환경과 조건을 잊는다.

반면에 뭐가 뭔지 모르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건 우둔한 자의 처사.

뻔히 답이 앞에 있는 데도 엉뚱한 곳을 헤매게 마련이다.

지혜로우면 주저하기 쉽고, 우둔하면 고집스럽게 실수를 범한다.

가장 단순한 문제를 간과했었다.

동창에 태상이라고 불리는 자가 있다. 동창에게 교활한 지혜를 건네준 경수사 주지 묘능이란 자가 있다.

금오혈석이 사일신화에 나오는 대로 지상에 떨어진 아홉 개의 태양이든, 혹은 그중에 육악지력이 끼어있든.

이 모든 일을 획책하고 주지한 자가 있을 터.

그는 누구이고, 무엇을 노리는가.

딱딱딱.

주변을 둘러싼 대나무 숲을 넘어 맑은소리가 갑자기 전해지자,

유항이 표정을 고치면서 일어섰다.

“실례지만 잠깐 나가봐야겠습니다. 녹화야, 해 대협 잘 모시고.”

뭔가 두드리는 음향이 의미를 지닌 듯. 서둘러 예를 취하고 떠나는 유항의 뒤에다 정록이 목소리를 높였다.

“요깃거리 좀 가져오쇼. 배가 고파!”

그리고선 해원기를 향해 히죽 웃으며,

“난 배가 고프면 잡생각이 많아져서. 그나저나 개방의 격석호출(擊石呼出)은 오랜만에 듣는걸.”

돌을 쳐서 불러내는 신호다. 그러고 보니 분타주인 유항을 오래 잡아놨었다.

해원기가 새삼스레 허기를 느끼며 마주 빙그레 웃었다.

커다란 눈에 볼록한 양 볼. 여장에 깜빡 속을 만큼 귀여운 상이면서 말에는 거침이 없는 정록. 쾌활한 성격이다.

마찬가지로 쾌활한 오소민이 남장여자란 걸 알자마자, 여장남자인 정록을 만났으니.

기묘하다고 할 수밖에.

심각한 화제에서 벗어나자 정록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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