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95화 (195/410)

제49장 후회유기(後會有期) (3)

이런 장면, 전에도 있었다.

오소민이 해원기를 소개한답시고 풍진삼우의 두 사람을 놀려먹었을 때.

똑같은 상황이 새삼 여기까지 따라온 이유를 되살리지만,

해원기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혔다.

포만개 유항이 오소민의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네 글자 편지만 전하면 해원기가 찾아오리라는 걸 예상했다는 뜻.

다만 해원기의 반응이 지나치게 빨라서 개방도가 배치되기 전에 이르렀던 것이니, 이제 얘기를 듣기만 하면 되는데.

외부인이 있다.

그것도 알만한 인연.

취개 단삼육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포만개다. 아마도 과거의 난세를 직접 겪은 사람일 터.

그렇기에 해원기와 관련된 많은 배경을 알고, 이런 장면을 연출했겠지.

소녀의 신분을 슬그머니 알려준 단어 두 개는 전부 사람을 가리킨다.

한때는 녹림대제(綠林大帝), 한때는 녹림천자(綠林天子), 또 한때는 녹림군자(綠林君子). 외호마저 기분 따라 멋대로 붙였던 괴걸. 십여 년 전부터는 나이가 들었다고 녹림노조로 바꿨다나.

자신이 아니라 남들이 부르는 외호를 이렇게 장난처럼 바꿔 붙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녹림이란 두 글자를 당당하게 내세우는 이.

바로 전설처럼 전해지는 녹림의 진정한 영웅이요, 든든한 배경인 방송서이고.

그가 새로이 녹림의 정예를 모아 정비한 핵심 조직이 녹림장관(綠林壯觀). 당세에 이 녹림장관의 주인이 또한 방송서의 하나뿐인 따님이다.

탁 소숙의 부인, 즉 해원기에게는 숙모가 되는 방온화(方溫華).

포만개가 ‘노조’와 ‘방 관주’를 들먹이며 키득거렸으니.

이 귀여운 소녀는 틀림없이 녹림장관에 속한 인물이다.

해원기의 이름만 듣고 당장 검왕이란 이름을 떠올릴 만큼.

하지만,

뭔가 기묘한 감각에 해원기가 선뜻 반가움을 표하기 어려웠다.

귀여운 용모, 어린 나이, 꽃 파는 소녀.

그러나 용모와 다르게 영악하고, 나이와 다르게 노련하며,

심지어 이 다루에 들어와서는 소녀 같지도 않다.

눈 한쪽만 찡그리는 표정은 귀엽다기보다 괴상하고, 오소민을 누이동생 취급하는 데다가, 말투나 행동이 전혀 외모와 어울리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는 제갈봉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요사스럽기까지.

가만히 바라보자 녹화라는 소녀가 겨우 정신을 차리곤,

급히 두 손을 얼굴 앞에 모아 쥔다.

“이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녹림장관의 화호초 정록(丁祿)이 삼가 검왕을 뵈옵니다!”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데.

그 자세와 목소리에 해원기가 비로소 자신이 왜 기묘하게 느꼈는지 깨달았다.

윤곽이 뚜렷한 어깨와 힘이 실린 낭랑한 음성.

남자다.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정록이 해원기의 놀란 심정을 아는지 얼른 두 손을 풀어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양쪽으로 둥글게 만 머리 형태를 순식간에 풀어내는 재주. 그걸 대충 하나로 엮으면서 들어 올리는 얼굴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다란 눈에 오목조목한 생김새는 그대로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 기민하고 익살맞은 청년이 되었으니까.

바로 눈앞에서 이루어진 기막힌 변화에 해원기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허! 이런 역용술(易容術)이.”

정록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용술이 아니라 역형대법(易形大法)이랍니다. 흉한 꼴을 보여드렸군요.”

약물이나 면구(面具) 따위로 변장하는 역용술을 한참 뛰어넘는 기예.

여간해선 익히기 어려운 기예이긴 해도, 꽃 파는 소녀처럼 차려입은 채로 히죽거리는 사내는 확실히 괴상했다.

일단 인사를 마치고 나니 본래 성격이 나오는지.

“이렇게 뵐 줄 몰랐습니다. 에, 배분을 따지면 골치 아프니까 저도 그냥 해 대협이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잠깐 이 분타에 빌붙어 있었더니 이런 행운이 생길 줄은. 흐흥, 부유한 집안에는 역시 얻어먹을 게 많군요.”

해원기와 포만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놀리고,

포만개의 짓궂은 웃음도 쓴웃음으로 바뀐다.

“어이, 부유한 집안이라니. 여긴 개방의 분타라고. 세상에 거지에게 빌붙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장안제일의 도둑고양이라며. 도둑고양이가 아무것도 없는 집에 들까? 이렇게 목 좋은 곳을 유 선배만 차지하란 법은 없지. 하여간 유 선배나 오 소매나, 거지가 살림이 피니까 더 야박해.”

“야박하다니. 다 땀 흘려 구걸해서 모은 재산이거늘. 누구처럼 남의 전낭을 훔치길 했는가. 어흠.”

“그래서 먹는 건 내가 직접 해결했잖수. 뭐, 구걸한 밥그릇을 빼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흐흥.”

서슴없이 주고받는 대화가 꽤 허물없는 사이인 듯.

그래도 소위 산적이 거지에게 빌붙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

해원기가 좀 궁금해졌다.

“두 분은 어떻게…….”

슬쩍 끼어들자 정록의 얼굴이 바로 돌아온다.

“아, 해 대협 덕분이죠. 크흥.”

말할 때마다 코를 울리는 게 버릇인지. 그러나 뜻밖의 대답이다.

“태원에서 연락이 들어왔더랍니다. 노조가 옛날에 돌봐주었던 사람들, 호중객잔 말이지요. 근래에 관부의 토색질이 갈수록 심해지는 판이라 은근히 줄을 대고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압송된 놈들이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사건 처리는 흐지부지. 흐흥, 수상한 냄새가 나서 이리저리 더듬어 보다가, 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장안에선 역시 유 선배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장풍무명 진자현.

바로 직전에 화산에서 겪었던 싸움의 원인이 또 이렇게 이어진다.

대첨산 호중객잔을 마련해준 이가 방송서. 호중객잔의 식구들이 태원을 거쳐 항산으로 향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녹림에 소식을 알렸던 듯.

태원 관아에서 벌어진 사건이 장안으로 연결되는 건 장풍보가 섬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핍민반(官逼民反), 관이 핍박하면 백성은 돌아서기 마련이다. 살길을 잃은 백성이 최후에 몰리는 곳이 바로 녹림이니.

녹림장관의 정록이 수상쩍은 사건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터. 더구나 해원기가 관련된 일이잖나.

“해 대협의 이름이 나와서 관주께서 직접 명을 내렸거든요. 일단 진위부터 확인하라고.”

정록의 힐끔거리는 눈에 해원기의 무거운 표정이 들어왔다.

평범한 얼굴.

어수룩하게 남의 심부름이나 할 것 같은 이 청년이 검왕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나.

시장에서 자신의 소매치기를 대뜸 잡아낸 것만으로도 보통이 아니다.

노조와 관주는 검왕이 여간해선 무림에 나오지 않으리라고 했는데.

과연 얼마나 대단할까.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원기가 잠시 침음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랬겠지.

호중객잔의 식구들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듣고 의아했겠지.

육 년. 무심하게 흐른 시간이 짧지 않다.

“음, 정 형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에? 에.”

‘정 형’이란 호칭이 낯설어서 정록이 애매하게 말을 받자,

“두 분께는 제가 직접 뵙고 말씀을 드려야 하니, 잠시 보고를 늦춰주면 좋겠습니다.”

“아, 그게…….”

정록이 녹림장관에서 나온 건 무엇보다 해원기의 출현을 확인하기 위함. 태만할 수 없는 임무라 대답이 또 애매해지는데.

“제가 처리할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해원기의 정중한 요청에 정록의 낯이 확 풀어졌다.

“크흥, 그, 그럽시다. 뭐. 해 대협의 부탁이니. 하하, 그 대신.”

‘정 형’에다 ‘도와주십시오’. 어쩐지 웃음이 헤프게 나오다가 그 큰 눈이 반짝 빛을 발하면서.

“해 대협을 끝까지 돕게 해주면. 괜찮지요?”

대뜸 조건을 내건다.

노조와 관주에게 자주 들었던 과거의 전설. 과연 검왕은 그 전설의 후예답게 스스로 처리할 일이란다.

기민한 정록은 대번에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고 의욕이 부쩍 일었다.

검왕과 함께라. 흥미진진할 게 틀림없다.

“감사합니다.”

사의를 표하는 해원기는 ‘끝까지’ 돕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다루 가장 안쪽에 대나무로 둘러싸인 초당.

작은 탁자에 자리를 나누어 앉자 해원기가 바로 말을 꺼냈다.

“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오소민은 개방의 순행장로다. 아무리 급해도 남의 방파에 함부로 묻기 어려운 일. 완곡하게 예의를 갖추어 묻자 유항이 몇 번 입맛을 다셨다.

“쩝, 저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터라. 우선 장로가 일러준 대로 전하겠습니다. 사태가 빠르게 커지고, 복잡하게 꼬이면서 초점이 흐려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이 한곳에 몰리면 내부의 핵심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해 대협의 신분이 드러날수록 동창의 진짜 목적이 밝혀질 터, 마침 적절한 기회가 왔기에 조속히 방주를 직접 뵈어야만 한다. 네, 그리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지요. 음.”

부유한 상인처럼 잘 다듬은 턱수염을 긁는 건 난감하기 때문.

들은 대로 고스란히 전하긴 하지만, 유항 자신도 대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과거에 방주와 팔선을 따라 백협맹(百俠盟)에 참가했던 터라 이 전언이 중요하다는 걸 직감했고.

처음 만나는 해원기에게 순행장로가 방주를 만나러 간다는 기밀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들어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

사태가 어떻고, 핵심이 어떻고는 둘째 치고,

적절한 기회가 무엇이며, 그래서 조속히 방주를 만나야 한다니.

무엇보다 왜 해원기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유항의 입을 빌려 전하는가.

그런데 유항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마지막에 희한한 말을 덧붙여서 더 헷갈렸더랍니다. 육피구단(六皮九蛋), 표리부동(表裏不同). 흐으음.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엥? 오 소매가 그런 소리를? 그거 피단 파는 가게에서 장삿속으로 써 붙이는 건데. 손님이 찍어서 피단을 맞추면 여섯 푼, 그냥 계란이면 아홉 푼 내라고. 피단이 먹고 싶었나?”

한심스러운 유항의 말투에 정록이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지만,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했다.

피단은 간장에 졸인 오리 알. 큼직한 계란으로 만들어 속여 파는 경우도 있다. 장안은 워낙 큰 곳이니 아예 내기로 만들어 파는 모양.

하지만, 해원기와 오소민만이 아는 단어가 들어 있는데 어찌 못 알아듣겠나.

아홉 개의 금오혈석, 그중에서 풀려난 거로 여겨지는 육악지력.

맞추면 여섯 푼, 틀리면 아홉 푼에 겉과 속이 다른 피단이란 광고는 분명히 이것을 가리키는 말일 터.

다만, 여전히 의미는 불통이다.

오소민은 무엇을 알리고자 하였나.

다루이니만큼 작은 탁자 위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간단한 주전부리가 올려져 있었다.

정록이 땅콩 한 줌을 쥐면서 작은 과자 몇 개를 해원기에게 건넸다.

“자, 이거라도. 뭐, 내가 주인은 아니지만. 흐흥, 그나저나 동창이 드디어 나설 자신이 붙었나 봅디다? 내가 도울 해 대협의 일이라는 게.”

유항과 주고받던 익살스러운 말투 그대로지만, 커다란 눈이 기대하듯 가늘어진다.

해원기가 작은 접시를 받으며 새삼스럽게 정록과 유항을 보았다.

오소민을 찾느라 경황이 없다가 비로소 분위기를 깨달았다.

동창.

유항도, 정록도 이미 아는 듯하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녹림장관도 동창에 유의했던 모양이군요.”

개방이야 취개를 비롯한 풍진삼우가 진즉 동창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녹림장관은 어떤 상황일까. 그저 호중객잔 때문만은 아닐 터.

정록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옆자리의 유항을 가리켰다.

“당연하잖습니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거지와 도적이 느는 법. 어떻게든 산채를 줄여 장관 하나만 꾸려서 유유자적하시려던 노조의 희망이 산산이 깨진 지 어언 십여 년, 족보도 없고, 실력도 갖추지 못한 가난뱅이 도적들이 야금야금 생겨나더란 말이지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살필 수밖에요. 자고로 환관이 득세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흐흥.”

속된 말투라도 내용은 절실하다.

유항이 찻잔을 들다가 머리를 끄덕인다.

“옳은 말. 녹화니 뭐니 놀리긴 했습니다만, 이 정 소제와 저는 안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고향도 섬서 남쪽과 파중(巴中) 근처라 가깝고. 서쪽으로 치우친 지역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 지 꽤 되었는데. 후, 난세가 끝난 기쁨에 젖었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나 봅니다.”

뜨거운 차를 식히려고 숨을 분 게 아니다.

해원기를 만나자 무안한 심정이 절로 한숨을 내쉬게 하였다.

백 년이 넘는 난세를 끝낸 분의 후대.

개방도, 녹림도 내실을 기한다는 이유로 시야를 좁혔던 게 실책이었다는 자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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