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후회유기(後會有期) (2)
어느새 문 앞에 섰을까.
“개방 분타가 어딥니까?”
자신도 놀랄 만큼 목소리가 커져서 마치 고함을 치는 것 같았다.
막 의자에 앉았던 제갈봉이 엉거주춤 일어나,
“어, 남문(南門) 쪽의 자은사(慈恩寺) 옛터…….”
어안이 벙벙해 묻는 대로 답이 나오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기가 방을 뛰쳐나갔다.
파당.
방문이 떨어져 나갈 듯 소리를 내고, 좁은 방이 확 하니 밝아졌을 때.
이미 해원기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내던져버린 봉서.
제갈봉이 비로소 종이를 들어 읽어보곤 머리를 갸웃거렸다.
의혹이 담긴 시선, 도톰한 입술이 살짝 열리며,
“개방의 신비라는 유룡개라.”
작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녀 또한 생각지 못했던 듯.
미시(未時)가 막 지났으니 훤한 오후. 아침부터 강한 햇볕이 내려쬐인 데다가 많은 사람이 몰린 큰 성시라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질 때다.
생전 처음 와보는 장안이니 지리를 알 턱이 없지만,
무작정이라도 찾아 나서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왜 갑자기 작별을 고할까. 개방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렇다 해도 오소민이 직접 찾아오면 될 것을. 편지 한 장 달랑 보낼 친구가 아니거늘.
더구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단 네 글자. 예의를 갖춘 상투적 작별의 말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다.
답답하다.
어둡고 좁은 방 안보다 더 후덥지근한 느낌.
황가약포를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남쪽으로 달렸다.
길을 모르는 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생소한 장소에서 목적지를 찾는 데에는 남다른 경험을 지녔으니까.
터진 옷 여기저기를 붕대로 감고, 발목에는 감발을 두르고서 익숙하게 달음박질치는 건,
바로 육 년이나 해왔던 쾌체의 모습이다.
하북의 고성(古城)에선 이런 식으로 성 내를 심부름 다녔었다. 장안이라면 이런 모습이 전혀 희한하지 않을 터.
뛰다가 조그만 노점이나 문이 활짝 열린 가게 앞에서 목청을 높이는 것도 익숙하게.
“자은사 옛터요!”
그러면 바쁘지 않은 이가 지름길을 알려주기 마련이다.
“그 길로 내려가.”
“저기 삼 층 누각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서화(書畫) 골목 가운데로 가게나.”
주전부리를 파는 이, 주루의 점소이, 짐을 부리는 하인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같은 처지를 이해하고 목청을 높여준다.
복잡하게 뒤엉킨 심정인데도 이렇게 길을 가르쳐주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쩐지 아련하게 느껴졌다.
쾌체를 그만두고 강호에 발을 들인 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으니,
이제 반년쯤 지났을 뿐인데.
해원기가 머리를 흔들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지름길을 찾은 덕에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높다랗게 솟은 거대한 첨탑이 보인다.
자은사 옛터라니 절은 없어졌겠으나.
절터라면 당연히 탑이 있을 터.
그리고 처음 와보는 장안이지만, 어렸을 때 글을 통해 배운 적은 있다. 장안의 명물인 대안탑(大雁塔)을.
당나라 현장(玄奘)이 천축에서 불경을 가지고 와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는 대안탑.
막상 그 밑에 이르자 막막해졌다.
칠 층이나 되는 높이가 삼십 장이요, 탑좌(塔座) 기단의 한쪽 면이 십 장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 그리고 주변은 절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대한 시장이 되어 엄청난 인파가 복작거린다.
이게 절터 맞나 싶을 만큼.
그러나 사람이 많은 곳엔 거지가 모이는 법.
해원기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주위를 유심히 살폈고, 기단 그늘에 옹기종기 모인 몇 명의 거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방에 몰린 천막을 피해 어렵사리 그들에게 다가가려는데.
문득 등을 건드리는 느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게 사람의 본능이지만, 해원기는 도리어 허리춤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착.
“어?”
깜짝 놀라 해원기를 쳐다보는 동그란 눈. 놀라기는 그 손목을 잡아챈 해원기도 마찬가지.
등을 건드린 느낌과 거의 동시에 요대자로 다가온 손을 인지했다.
소매치기.
사람이 많은 곳에 거지만 모이는 게 아니지.
하지만, 서로가 너무 의외여서 잠시 그렇게 마주 봐야만 했다.
양쪽으로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칼, 톡 튀어나온 이마 밑에는 왕방울만 한 눈, 오뚝한 코와 조그만 입술이 뽀얀 볼살 가운데에서 움찔거려 귀엽기 그지없다.
짙은 녹의(綠衣)를 맵시 나게 걸쳤고 왼쪽 팔에는 대나무로 엮은 꽃바구니를 걸쳐서 딱 꽃 파는 여자애 차림.
나이는 십칠, 팔 세 정도일까.
이 바닥에서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솜씨가 이렇게 맥없이 당한 게 믿기지 않아 그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기만.
해원기 역시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소녀가 소매치기란 게 믿을 수 없었다.
멍하니 마주 본 건 잠깐.
소녀가 얼른 잡힌 손을 당기며 몸을 꼬았다.
“어마나, 왜 이러시나요? 제가 아무리 꽃이나 파는 계집이라도. 놓으세요!”
통통한 볼살을 복사꽃처럼 물들이며 목청을 높이니.
해원기가 화들짝 손목을 놓아야 했다.
“아니, 낭자가…….”
“멀쩡하게 생긴 분이 어찌 이런 짓을. 흑.”
소매를 들어 눈가를 찍는 시늉.
꼼짝없이 못된 무뢰배로 보일 판. 벌써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난생처음 겪는 황당한 상황에 해원기가 어쩔 줄 모를 때,
인파를 뚫고 한 노인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어이쿠, 여기 있었구먼. 워낙 사람이 많아서…… 허어, 녹화(綠花) 아니냐? 아직도 꽃을 다 못 팔았구나. 쯧쯧.”
커다란 두건을 삐딱하게 쓰고 불그레한 얼굴에 질 좋은 금의를 입은 육십 대의 노인. 돈푼깨나 있어 뵈는 차림에 실눈이 연신 웃음을 흘리며 해원기와 녹의 소녀를 번갈아 본다.
한참 찾은 듯 해원기를 반기고,
꽃을 파는 녹의 소녀와도 안면이 있는 듯.
이 노인의 등장에 녹화라고 불린 녹의 소녀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지만,
“그냥 오면 된다고 그리 일렀거늘. 꽃 심부름까지 시켰는가? 그 양반도 참. 뭐, 할 수 없지. 둘 다 따라오려무나.”
노인이 연신 머리를 저으며 탄식처럼 말을 잇고는 바로 몸을 돌린다.
대강 누군가 이 노인에게 쾌체를 시켜 꽃 심부름을 시켰다가 오해가 생겨 벌어진 일이라는 거다.
잠깐의 소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흥미를 잃었고,
녹의 소녀도 눈만 데굴데굴, 놀리던 입을 꼭 다물고서 아무 소리 없이 뒤를 따르니.
한바탕 구경거리가 될 소란이 유야무야.
해원기도 미간을 모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매치기의 기습(?)도 뜻밖이었지만,
부유해 보이는 노인의 때맞춘 등장도 지나치게 공교롭다.
소녀도, 노인도 처음 보는 얼굴.
해원기가 장안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아는 이는 제갈봉과 오소민 둘.
개방의 장안 분타를 찾으려고 온 대안탑 아래에서 우연히 이런 기묘한 상황이 이루어질 리 없다.
녹의 소녀와 부유한 노인이 무슨 의도로 접근했는지 알려고 순순히 말을 따랐다.
복잡한 시장통을 뚫고 도착한 곳은 작은 찻집.
옛 도읍에 많은 인구가 사는 장안에선 차를 즐기는 여유 넘치는 풍속도 곳곳에서 볼 수 있기에 크고 작은 다루(茶樓)가 적잖고.
언제나 인파가 몰리는 대안탑 주변은 더욱 그렇다.
간판도 없이 단층의 건물이지만, 여기도 만석. 조롱(鳥籠)을 들고 나와 새를 놀리고, 연초를 피우며 떠들고, 작은 향로에 향을 피우고서 씨앗 따위를 까먹고.
번잡하고 시끄러워 정신이 없을 정도.
노인이 그 사이로 능숙하게 움직여 안쪽으로. 녹의 소녀도 익숙한 듯 팔랑팔랑 따라간다.
그렇게 들어간 좁은 방은 다루의 가장 깊숙한 내실일 터.
빽빽한 대나무로 둘러싸 꽤 운치 있게 꾸민 초당(草堂)에 이르자 노인이 비로소 몸을 돌려 두 손을 모았다.
“해 대협이시지요. 개방 장안 분타를 맡은 유항(劉項)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의외.
해원기가 유항이라고 이름을 밝힌 노인을 잠시 쳐다보다가 마주 예를 취했다.
“유 분타주셨군요. 용케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장안 분타를 찾던 참이었으나, 개방도가 어찌 알았을까. 더구나 일면식도 없는 장안 분타주가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걸까. 쉬 믿기 어렵다.
일단 인사부터 하긴 하는데, 그런 해원기의 심정을 훤히 아는 듯, 유항이 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순행장로께서 떠나면서 언질을 주었거든요. 혹시 찾아오실지 모른다고. 그래서 부리나케 다시 애들을 황가약포까지 풀었는데.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허, 게다가 장안제일의 도둑고양이랑 먼저 만나셨을 줄이야. 허허허허.”
이유를 설명하면서 녹화라는 소녀를 보다가 너털웃음이 터진다.
개방의 분타주가 이렇게 부유한 차림을 한 건 그렇다 쳐도, 세상 귀엽게 생긴 소매치기 소녀가 장안제일의 도둑고양이라.
해원기의 시선도 자연히 녹화에게 향하는데.
녹화가 팔뚝에 걸쳤던 꽃바구니를 조그만 차탁 위에 홱 내던지더니,
“뭐야. 개방에서 유일하게 호의호식하는 거지인 장안 분타주 포만개(飽滿丐)가 이렇게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이라? 어쩐지 오 소매(小妹)가 평소와 다르게 내빼더라니. 당신, 정체가 뭐야?”
두 손을 턱 하니 허리에 얹으며 묻는 소리.
커다란 눈을 한쪽만 잔뜩 찡그려 노려보는 괴상한 표정에, 이 무슨 거친 말투인가.
육십 대의 개방 장안 분타주를 앞에 두고 명호를 거침없이 입에 올리고,
더구나 오소민을 아는 듯. 십칠 팔 세 먹은 얼굴로 ‘소매’란다.
장안 분타주 포만개 유항.
십 년이 넘도록 개방이 내실을 기하면서 천하에 산재했던 분타의 수도 많이 줄였고, 그만큼 분타주의 수준도 높아졌다.
해원기가 전에 잠깐 만났던 제남 분타주 적각개는 당금 개방 방주의 제자. 제남보다 훨씬 큰 장안의 분타를 맡은 포만개는 그 연륜에서 이미 적각개보다 위일 터.
그런 포만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야료(?)를 부리는 소녀가 신기하지만,
그걸 받아주는 포만개도 묘하다.
“어이, 화호초(花狐貂), 순행장로가 그 말을 들으면 가만있지 않을걸. 그리고 남의 신분을 알려면 먼저 자기부터 소개해야지. 그러다가 그 높은 콧대가 폭삭 주저앉는 불상사가 생길 판이야. 흐흥.”
꽤 친분이 있는 모양. 자신도 녹화를 명호로 부르면서 은근히 놀려댄다.
내심 기대하는 게 있는지 녹화와는 대조적으로 작은 실눈이 바쁘게 해원기를 살피고.
오소민을 찾으러 왔다가 장안 분타주를 만난 건 좋지만,
이 무슨 엉뚱한 상황인지.
해원기가 조금 어이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인사를 잊는 성격은 아니다.
다시 손을 모으고서,
“해원기라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변치 않는다. 앉았다고 성을 바꾸고, 일어섰다고 이름을 바꿀 리 있겠나.
그러면서 뚱하니 바라보는 시선에,
화호초라는 녹화가 대뜸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열다가.
“흥, 이 아가씨가 누군데 함부로 소개하, 에? 이름이 뭐라고? 해원…….”
같잖게 훑어보던 한쪽 눈이 갑자기 흔들리고, 허리에 올렸던 두 손이 축 늘어진다.
해원기의 이름을 되뇌다가 뭔가 기억이 난 듯.
왕방울만 한 두 눈이 소리가 날 정도로 닫혔다 열리곤,
“풍화절세, 응양구천의. 검와앙?”
비틀린 입술을 뚫고 조그만 코를 울린 목소리가 초당이 울리도록 높아졌다.
경악이 지나쳐서 괴상망측한 표정과 소리를 내지만, 그럴수록 더 귀여워지는 얼굴.
포만개가 기다리던 장면에 기어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이 모습 잘 기억해두었다가 두고두고 써먹어야지. 노조(老祖)께선 몰라도 방(方) 관주(觀主)가 아시면. 크헤헤헤.”
꽤 짓궂은 웃음인데.
이번에는 해원기가 눈을 크게 떠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귀여운 얼굴을 살펴야 했다.
‘노조’, ‘방 관주’. 포만개의 즐거운 지껄임 속에서 화호초라는 이 소녀가 누군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