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후회유기(後會有期) (1)
여산을 넘어왔으니 장안의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
워낙 거대한 고성(古城)이라 높다란 성벽에 대문도 세 개. 남쪽과 서쪽에도 마찬가지로 세 개씩 성문이 있다는 말에 꽤 놀랐다.
개봉을 잠시 구경했지만, 이 장안의 규모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터.
대충 둘러봐도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하고 어디까지 펼쳐졌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면적이지만,
어느 곳이나 가장 많은 건 가난한 골목이다.
동문가의 북삼방이 바로 그중 하나. 동쪽 성벽을 따라 길게 늘어진 지역은 좁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번화가로 향하는 큰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졌다.
이 골목에서 그나마 그럴듯한 간판이라도 내건 집이 바로 황가약포.
가난한 이가 많은 만큼 아픈 이도 많고. 고단한 삶이 기댈 곳이 바로 이 약포라서 찾는 이가 끊이질 않는다.
앞에서는 환자를 받고, 진맥을 하고, 침이나 뜸을 놔주고.
뒤쪽에 달린 작은 마당에는 십여 개의 아궁이가 약탕을 달이느라 바쁘다.
그 한구석의 작은 방.
제갈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해 소제, 조금 더워도 이해하지? 그럼 나는 요깃거리를 장만해 올 테니까 그동안 눈 좀 붙여.”
앉은뱅이 의자 두 개와 낡은 침상 하나가 전부인 방.
제갈봉은 마치 이 황가약포의 주인인 듯, 환자와 의생이 뒤섞인 건물을 거침없이 지나서 여기까지 해원기를 데려왔다.
“여기는…….”
“괜찮아. 나와 가까운 이가 운영하는 곳이고. 여러 가지 소식을 얻을 수 있지. 주변 상황이 어떤지도 알아볼 겸. 쉬어.”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곤 바로 문을 닫아준다.
지친 해원기를 위해 쉴 시간을 얼마라도 더 내주려는 마음 씀씀이.
해원기가 비로소 컴컴한 방안 낡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덥다.
밖으로 난 창은 판자로 덧대 가렸고, 마당 쪽의 창에는 두 겹이나 천을 씌웠다. 그래도 워낙 낡아서 곳곳에 벌어진 나무 틈과 구멍투성이.
덕분에 후원의 약탕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가 많이 들진 않지만, 여름날에 숨이 턱 막히는 건 어쩔 수 없다.
등을 켜지 않아서 어두워도 해원기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어서.
침상과 방안을 잠시 훑어보다가 허리에 찬 요대자를 끌렀다.
화산, 화청궁. 상당한 거리를 뛰어다니고 거친 싸움을 겪었던 탓에 옷차림이 엉망이다.
부욱.
너덜너덜해진 경장의 소매를 아예 절반쯤 뜯어내고, 바짓가랑이도 다시 감발을 쳐서 단단히 묶었다.
끼니도 거르고 진력도 많이 소모했지만, 요대자에서 붕대를 꺼내 터진 곳을 꼼꼼하게 감는 게 먼저.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니 전혀 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낡았어도 청소가 잘 되었고, 자주 이용한 흔적이 있다. 약포의 의생이나 일꾼도 낯설게 여기지 않고.’
제갈봉의 거점 중 하나일 것이다.
차림새를 대충 정리하자 다시 요대자를 허리에 묶고 침상 위에 단정히 앉는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차분히 두 눈을 내리감았다.
잠심침령.
후덥지근한 방안의 더위를 아예 느끼지 못하는 듯,
어둠 속에서 차츰 기척을 지운다.
해원기의 내력은 이미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여산을 넘어 장안으로 오는 동안, 틈틈이 미앙보식을 운용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제갈봉에게 쉴 곳을 찾았던 것은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해서였다.
삼라잠종진과 칠색천막.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제갈세가 비전 중의 비전. 제갈봉이 신산와룡의 뿌리를 되찾았다는 말에는 큰 의문이 없다.
그러나 오소민이 은근히 보인 경계심 또한 당연한 반응.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검왕의 신분을 아는 사람.
사부가 마지막으로 조용히 일러준 훈계다.
제갈봉이 봉대저라는 이름으로 반룡령의 위탁을 받아 해원기를 찾았을 때부터, 묘한 느낌이었다.
해원기의 정체를 파악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긴 했으나, 사실은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고.
그러면서 필요한 순간에 연락을 취해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셈이다.
제갈세가의 기구한 운명을 하소연할 상대를 찾았다라.
강호에서 지운 사부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그저 잠깐의 소문에 불과했던 검왕이 그 후대란 추리까지.
동창의 깊숙한 내막을 아는 데에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아직 제갈봉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남을 추적하는 일은 혼자서 하기 어렵지. 향락사귀란 자들이 방비하기 어려운 무리를 무수히 거느렸던 것처럼. 구란와자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놓친 적이 없고. 이 약포도 상당히 오래 운영한 듯하다.’
간단한 조직이 아닐 터.
해원기가 자신의 주변부터 찬찬히 생각을 다듬었다.
어리숙하고 답답해 보이지만, 바보가 아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행사에 서투른 점이 적지 않지만,
배우고 익힌 능력은 어떤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
검왕이니까.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고 지나온 일들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신왕공이 깊어지면서 불현듯 깨어난 상상지(上上智).
‘인광과 수진에게 들은 대로. 그 셋은 유래를 알 수 없는 능력을 지녔다.’
아미와 공동에서 온 셋.
낙혼금종을 울리던 요술사, 냉기와 화염을 뿜어내던 진여신승, 그리고 괴이한 독과 더불어 거창한 바람을 일으키던 오온존자.
낙혼금종이 울리면 맥이 빠지면서 펼치는 수법의 위력이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들고,
열폭노도는 차고 매운데 그다음엔 대뜸 불길이 일었으며,
제탁지검에도 거듭 침습한 독기와 어떤 힘도 날려버릴 위력의 붕익천강.
전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이들의 능력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맞아떨어진 게 더 문제다.
‘역시 육악지력(六惡之力)인가. 그렇다면 이 금오혈석 아홉 개는…….’
소림사에서 사일신화를 떠올리며 추측했던 육악.
요술사는 약수(弱水)의 괴물인 알유, 진여신승은 수화지재(水火之災)를 일으키는 구영(九嬰), 오온존자는 바람과 독으로 모든 걸 괴멸하는 우강(禺强)의 힘이다.
그러나 육악은 여섯, 금오혈석은 모두 아홉.
이 숫자의 차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
‘육악지력의 셋이 서쪽이면, 나머지 셋도 다른 곳에 나타났을까? 금오혈석 아홉 개 중에서 여섯 개가 풀렸다 해도, 나머지 세 개는 또 무엇인지. 게다가 미증유의 힘이라.’
생각을 따라 손끝이 자연스럽게 요대자를 스친다.
자신이 지닌 금오혈석 하나. 아까 오소민을 해독하려고 보명오석을 꺼내느라 온통 뒤집는 통에 금오혈석을 담은 상자도 다른 주머니에 넣었었다.
‘급한 나머지 전부 다 쏟아내 버렸지. 요대자도 다시 정리해야, 음?’
그렇게 요대자에 닿은 손가락 끝이,
파삭.
불꽃이 튄 듯, 어둠 속에서도 얼핏 흰 연기가 흩날린다.
해원기의 감았던 눈이 뜨여 동시안의 비췻빛이 가만히 자신의 손을 향했다.
잠심침령이 자연히 풀렸지만, 그보다 놀라움이 동시안의 시선에 가득 담겼고,
“독.”
믿기 어렵다는 심정이 혼잣말로 나온다.
잠심침령에도 걸리지 않았고, 신왕공으로 아무런 독기를 느끼지 못했거늘.
손가락 끝에 한 점의 독기가 달라붙어 있었다니.
그리고 닿자마자 그 독기를 꾸짖듯 멸해버린 건,
바로 금오혈석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신왕공을 속이고 잠심침령을 피할 독기가 있다니. 아니, 해원기에게는 전혀 해를 입히지 않고서 가만히 붙어있는 독기라니.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보명오석을 써서 오소민을 해독했다. 제탁지검에다 삼매마려까지 더해서.
그러고 보면 오소민은 두 번이나 중독되었지. 처음 제탁지검으로 풀어냈다고 여겼는데, 일월표객을 도피시킨 후, 낙혼금종이 울릴 때 또 독에 당했었다.
그 독이 더욱 괴상해서 기어이 보명오석까지 동원해야 했고.
지금 해원기의 오른손 끝에서 스러진 한 점의 독기는 당연히 오소민에게서 옮은 것일 터.
이 무슨 독인가.
‘오 형에게 두 번이나 제탁지검을 썼다. 그런데도 남는, 아니, 거듭했기에 남았다? 오 형에겐 속진(俗塵)을 떨어내는 하화의 보패가 있음에도.’
처음의 독과 두 번째의 독.
독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는 해원기지만, 독이 함부로 섞어 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강한 독일수록 서로 다른 성분이 되레 서로를 공격하는 이치. 이독공독(以毒攻毒)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의 독기가 같은 게 아니고, 또 서로 섞여 더한 독기를 만들어냈으며, 심지어 해원기의 손가락 끝에 한 점이라도 남아있을 수 있다.
참으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독.
대첨산 화전민 마을의 독살이 오온존자와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는 심증이 더욱 굳어지는데.
동시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의문.
오른손이 요대자를 천천히 문질렀다.
꾸짖음.
그런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자.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금오혈석은 이미 평범한 오리 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안다.
역시 단순한 돌멩이가 아니다.
“흠, 막막하군. 그나저나…….”
한 점의 독기도, 금오혈석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각이 자연스레 오소민에게 미치면서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오소민이 더 하다.
왜 남장을 했을까. 왜 여자인 걸 숨겼을까.
귀하게 얻은 인연, 믿고 의지하는 벗이라 여겼거늘.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무슨 곡절이 있기에.
갑작스레 냉정하게 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후우.”
이렇게 혼자만 남아서일까. 곁에 오소민이 없다는 걸 더 실감하면서 한숨이 제멋대로 새어 나온다.
덥다.
좁고 어두운 방 안의 더위를 비로소 깨달았다.
삐꺽.
“해 소제, 많이 갑갑하지?”
제갈봉이 작은 쟁반을 들고 문을 여는 소리에 해원기가 침상에서 내려왔다.
기름에 튀긴 총병(蔥餠)과 묽은 죽. 하찮은 길거리 주전부리지만,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약향이 줄었군요.”
후원에서 달이던 탕기를 아궁이에서 전부 치운 걸 움직임으로 미리 알고 있었다.
제갈봉이 쟁반을 건네고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밖에는 티를 내지 않도록 했지만, 소란스러우면 해 소제의 휴식에 방해되니까. 아, 그리고.”
소매에서 꺼내는 작은 봉서.
해원기를 보는 표정이 조금 묘하다.
“개방 분타에서 조금 전에 가져왔어. 오 소저가 보낸 거라고.”
해원기가 얼른 쟁반을 침상에 놓고 봉서를 받았다. 개방 분타를 들렀다가 온다던 오소민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사람 대신 온 소식이 궁금해서 바로 꺼내보는데.
앉으려던 해원기가 도로 일어섰다.
종이 위에 쓰인 건 단 네 글자.
[후회유기(後會有期).]
나중에 만날 기약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