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가파인망(家破人亡) (4)
역대 왕조가 도읍으로 정했던 곳. 그중에서 가장 저명한 곳 네 군데를 흔히 양도양경이라 부른다.
지금의 경사는 예전에 연경(燕京), 즉 북쪽의 서울이고, 남쪽의 서울인 남경(南京)은 금릉(金陵)을 고친 이름. 그리고 동도(東都)인 낙양과 서도(西都)인 장안이다.
그냥 사경(四京)이라고 해도 될 것을 남북과 동서를 구분하기 편하게 굳이 다른 글자를 썼을 뿐이나,
소위 중원을 좌지우지했던 옛 도읍으로의 무게는 마찬가지.
좌우봉원은 본래 신변의 가까운 곳에서도 이치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데, 이 양도양경을 대입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움직여 중원에서 만난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
동창의 본거지는 경사, 즉 북경. 중간에 기루 때문에 얽혔고 악송령이 큰 곤욕을 치르게 된 원인인 삼보별저는 낙양과 가까운 개봉에 있다.
남경은 아직 상황을 모르지만, 여기 장안에서 밀각의 셋과 육악의 힘을 지녔으리라 예상했던 자들과 조우했다.
“아미와 공동을 차지한 현신장 셋을 장안으로 불렀다는 건 서쪽을 공략할 바탕이 만들어졌다는 뜻이겠지. 동창이 황실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각지의 이권에 개입했을 때부터, 강호를 어떤 식으로 집어삼킬 계획인지 궁금했었어. 하북 팽가나 반룡령, 그 밖에 동창에 매수된 자들만으로는 그냥 한심한 몽상에 불과하니까.”
여산을 넘으면서까지 설명을 계속한 제갈봉.
덕분에 해원기도 두 여자가 나누었던 대화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제갈봉이 설명을 시작하자 입을 다물어버린 오소민이 계속 신경 쓰인다.
바짝 굳은 표정과 어두워진 눈빛.
심각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라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자인 게 드러난 후부터 평소와는 영 다른 모습.
‘아니, 제갈 소저와 얘기하다가 벌컥 화를 낸 후부터 더 그랬지.’
둔해 보일 뿐, 진짜 둔한 건 아니다.
남장여자가 뭔 대수냐는 듯이 어깨를 퍽, 퍽 때려대던 오소민이었잖나.
제갈봉과 동창의 구조에 관해 얘기를 나눈 게 그 시작이었다는 걸 민감하게 인지했다.
십이태감이니 이십사아문이니.
오소민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걸 모를 리 없을 친구가 제갈봉의 설명이 끝나자 비로소 고개를 돌린다.
“강호를 집어삼킨다라. 좌우봉원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계획, 누가 주도했는지 알아요?”
역시 바로 핵심으로 건너뛰는 질문.
밀각의 삼대부와 현신장 셋이 장안 화청궁에서 회합한 목적이 서쪽을 공략하는 것이라면,
경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과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동쪽, 그리고 남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의 국면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바로 계획의 입안자를 알려고 한다.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거대해진 동창. 규모와 세력이 클수록 행사에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눈이 미치기 어려운 외곽에서부터 시작해 동서남북에 거점을 만들고, 차츰 세력을 늘려서 마침내 중원 전체를 차지한다는 원대한 계획.
누가 세웠을까.
“글쎄. 동창이 비밀주의라는 거, 잘 알잖아. 아까 하다가 만 얘기, 동창에서 진짜 실권을 쥔 자가 누군지도 정확히 몰라. 대태감일지, 다른 십이태감 중의 하나일지, 아니면 전혀 뜻밖의 소감 나부랭이일지. 직접 그들 속에 파고들어도 알아내기 쉽지 않을걸. 다만.”
제갈봉이 고소를 지었다.
정자에서 오소민이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끊겼던 부분.
황궁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환관이 있을까. 게다가 권력이 동창에 쏠리면서 금의위나 병부뿐 아니라 적잖은 고관대작들조차 한패가 되었을 터. 이미 괴물처럼 거대해진 동창의 실정을 외부에서 추측하긴 불가능하다.
“다만?”
그러나 제갈봉이 말을 끊은 이유가 있을 터. 오소민이 재촉하듯 되풀이하자,
제갈봉이 미간을 조이면서 짧게 혀를 찼다.
“쯧, 불확실한 몇 가지 정보가 있어서. 혹시 동창의 주축이 대내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이제는 대화를 쫓아가게 된 해원기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외부라고요?”
“음, 동창이 황제를 등에 업고 설치기 시작했지만, 본래 환관들이야. 어렸을 때 내시가 되어 입궐한 자들, 고작해야 황실의 뒤치다꺼리나 하던 주제에 세상이 어떻고, 강호니 무림이니, 뭔지나 알았겠어? 그런 자들이 어쭙잖은 권세나 재물에 탐닉하는 정도야 이해할 수 있다 해도. 무림을 제패하고 강호를 장악한다는 야심을 어떻게 품었을까. 게다가…….”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제갈봉이 아예 걸음을 멈추었다.
“황궁무고(皇宮武庫)와 환관들만의 비전이 아무리 뛰어나도 단기간에 이런 힘을 갖춘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 금의위를 수족으로 삼고, 반룡령으로 주구를 끌어들였던 자들이. 실제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 보이잖아.”
“밀각과 현신장. 흠, 그렇군요.”
따라서 멈춰선 해원기가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런 해원기를 흘낏 본 오소민이 다시 화제를 되돌렸다.
“외부라면 너무 막연하네요.”
차라리 동창의 공식적인 우두머리인 제독태감이 꾸민 계책인 게 낫다. 제갈봉의 말이 이치에 맞을수록, 진짜 배후와 핵심을 찾기 어려워진다. 황궁 바깥은 곧 중원 천지 전부가 해당되지 않나.
“그래도 어느 정도 조건이 맞아야지.”
“황궁과 긴밀한 관계, 아니, 황실, 특히 황제와 가까워야겠죠.”
“맞아. 그렇다고 황친국척(皇親國戚)은 아닐 테고.”
“그만한 위치, 그만한 존경을 받으면서 드러나지 않는 자리.”
“호오, 역시 오 소저는…….”
“잠깐, 잠깐!”
제갈봉와 오소민이 대화하면 또 이렇게 빨라진다.
해원기가 목소리를 높이고 손까지 내저으며 제갈봉의 말을 끊었다.
계면쩍은 얼굴을 굳이 두 여자에게 번갈아 내보이면서,
“머리가 둔해서 거듭 죄송합니다만. 오형, 황친국척에서부터 잘 모르겠다고. 쩝.”
무안하게 입맛까지 다시자.
오소민의 굳은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였으면 딱 ‘바부탱이’ 소리가 나올 차례. 그러나 오소민이 해원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바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나도 조건만 따져본 거야. 제갈 소저에게 들어보세.”
딱딱한 말투. 그래도 해원기의 말을 받아준 게 어딘가.
해원기가 머리를 긁으며 다시 제갈봉을 볼 수밖에.
여산을 넘어 넓은 관도에 가까워졌고,
멀리 장안성의 높다란 성벽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뒤를 맡아 조금 쳐져서 따라오던 해원기와 어색하게 거리를 두었던 오소민이라 앞장선 제갈봉과 삼각형 모양이었는데,
해원기가 중간에 끼어드는 바람에 이제 두 여자의 중간에 있게 되었다.
외면하던 오소민의 눈에 순간적으로 짙은 감정이 출렁이는 것을,
제갈봉은 볼 수 없었다.
잘 모르겠다는 데에야.
제갈봉이 ‘큰누나’답게 상냥하게 풀어주기 시작했다.
“황궁과 관계가 없고서야 동창과 연이 닿을 수 없지. 그러나 황친국척은 도리어 그 조건에서 가장 먼저 제외될 거야. 왜냐하면, 황제의 친척이 바로 동창 설립의 기초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영락제가 어떻게 제위에 올랐는지 알잖아. 환관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가 역심(逆心)을 감시하는 거라고.”
“으흠.”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조카를 해치고 황제가 된 인물. 당연히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할까 두려웠을 터. 황친국척은 환관의 감시 대상일 뿐, 결코 동창의 권력에 끼어들 수 없다.
“실상이야 어떻든 명목상으로 동창의 권력은 황제에게서 비롯해. 황제를 아주 가까이서 보필하고, 황제의 칙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환관. 대신과 장군을 막론하고 그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잖아. 이런 자들을 뜻대로 움직이려면 황제라도 예를 갖추는 인물이어야 하지만, 반면에 묘당(廟堂)의 현관(顯官)이어선 곤란하지. 이해하겠어? 해 소제.”
아예 차근차근 일러주기로 했나.
제갈봉의 확인하는 물음에 해원기가 또 머리를 긁었다.
“아, 예.”
묘당은 조정을 가리키는 단어, 현관은 문무 양반의 높은 벼슬아치. 흔히 쓰지 않는 말이지만, 그것도 못 알아먹을 정도로 무지하진 않다.
검왕이든 뭐든 어차피 무림인. 한낱 무부(武夫)에 불과하다고 여기는지.
제갈봉의 자세한 설명이 무안할 지경.
해원기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오소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건에 해당하는 인물이 있나요?”
어쩐지 다그치는 느낌이지만,
“뭐라고 할 수가 없어. 지금으로선. 나도 꽤 오래, 나름 애를 썼지만, 딱 짚어낼 단서를 얻지 못했으니까.”
제갈봉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받자,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렇게 쉬울 리 없지요.”
듣도 보도 못한 자들이 괴이한 능력을 지니고 줄줄이 나오는 판이다. 황궁의 내막은 둘째 치고, 반룡령조차 잘 알지 못하는 상황.
이 모든 세력을 아우르고서 거창한 계획을 세운 주모자를 알아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걸로 충분했는지 오소민이 입을 다물고.
한참 끌었던 얘기가 끝났다.
해원기가 손을 들어 장안성을 가리켰다.
“어디로 갑니까? 좀 쉬었으면 합니다.”
화산에서 제대로 쉰 적이 없다.
거듭된 싸움과 이동. 아무리 고강한 내공을 닦았어도 지칠 때가 되었다.
끼니조차 때우지 못했으니.
제갈봉이 황연히 깨달은 듯,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아, 성문만 통과하면 금방이야. 딱히 우리를 찾는 기미도 없으니까 곧장 관도로 오르자고.”
삼라잠종진의 범위가 얼만지 몰라도 오는 내내 혹시 모를 추격을 조심했었다.
다행히 밀각이든 현신장이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서.
제갈봉이 당장 땅을 박차고 관도로 몸을 날렸다.
장안행은 제갈봉의 결정, 아는 곳이 있다고 했으니 그녀의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뒤따라 몸을 날리려던 오소민이 잠깐 해원기를 돌아보았다.
기이하게 일렁이는 시선. 뭔가 말을 건네려는 것 같더니.
다시 제갈봉을 쫓아 경공을 시전하는 오소민을 보면서.
해원기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오소민의 눈이 말보다 더 많은 뜻을 전했다는 것을 알기에.
황친국척을 거론하다가 제갈봉이 또 오소민에게 감탄하려는 걸 일부러 가로막았다.
둔하고 무지한 일개 무부로 보이더라도.
개방의 순행장로면서 조정과 황실의 사정에 의외로 밝은 오소민. 처음 덕주로 동행할 때부터 특이하게 여겼던 부분이다.
그게 밝혀지는 게 불편한 모양. 정자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제갈봉이 그런 점을 들먹이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아울러 제갈봉의 설명을 듣는 내내, 어리숙한 모습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지 않으면 혹시 속마음을 감춘 게 겉으로 드러날까 봐.
강호에선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으나, 타고난 성품이나 지금까지의 경험이 아직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정자에서 뛰쳐나간 오소민을 찾아갔을 때, 그런 해원기를 알기에 일부러 깨우쳐주었을 것이다. 완곡하게나마.
아직 속을 터놓기엔 이르다.
제갈봉이 제기한 문제. 주모자로 의심되는 자를 해원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다.
흥륭전장의 황륙에게서.
제갈봉이 사부와 탁 소숙의 이름을 풍운책에서 처음 알았다고 했을 때부터 황륙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으니.
경수사의 주지 묘능이라는 신비한 인물.
제갈봉은 흥륭에서 파악한 정보를 아직 얻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그때도 황륙과 오소민은 대내의 사정을 화제로 대화했었는데.
오소민은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먼저 들를 곳이 있어서. 음, 제갈 소저, 어딘지 위치를 알려주겠습니까?”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오소민이 조금 떨어지며 불쑥 건네는 말.
갑작스러운 얘기에 해원기가 의아한 듯 쳐다보는 걸 모른 척,
제갈봉이 멈칫했다가 얼른 한쪽을 가리켰다.
“동문가(東門街) 북삼방(北三坊) 황가약포(黃家藥舖)의 후원이에요. 금방 올 거죠?”
번성했던 옛 도읍이라 구역명도 상세하다.
“네. 해 형, 그럼.”
“어, 알겠네.”
대뜸 작별을 고하는 통에 해원기도 그냥 손만 들 수밖에.
사전에 아무런 귀띔도 주지 않고, 이렇게 돌연히 헤어질 줄이야.
황당하기보다 섭섭함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갈봉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해 소제가 이해해야지. 그녀는 개방의 순행장로, 장안에 도착했으니 일단 분타를 찾아 행적을 알려야 하지 않겠어. 더구나 저런 차림으로는…….”
휘적휘적 걸어가는 오소민은 여전히 제갈봉에게 얻은 두툼한 웃옷을 입은 채.
“그런데 왜 남장을 했을까? 평소에 남루한 복장을 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밝히지 않고서야 누가 오 소저를 개방도로 알아보겠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쯧쯧.”
언제나 방탕한 귀공자처럼 차리고 다니는 오소민이다. 개방의 거지로 보이는 곳이 전혀 없는데도 굳이 남자인 척 한 이유를 모르겠다.
기구한 신세를 지닌 제갈봉이라서일까. ‘사연’이란 단어를 쓰면서 혀를 차고.
해원기가 무거워진 눈매를 천천히 돌렸다.
오소민이 여자란 사실이 여전히 어색하다.
절령제십이(節令第十二) 대서(大暑)
대서(大暑)는 여름의 마지막 절기이다. 대(大)는 가장 크고, 서(暑)는 더위이니, 염열지극(炎熱之極)을 의미한다. 바로 삼복(三伏) 중의 중복(中伏) 전후에 위치하여 1년 중 가장 더울 때이다.
이때가 되면 소서(小暑)보다 햇볕이 더욱 강렬해져 온도가 크게 오르고, 번개와 우레가 수시로 내려치며, 태풍까지 밀어닥친다.
따뜻해진 바다에서 계절풍이 불어오니, 대지는 고온에 다습, 게다가 많은 비까지 내리게 되어.
열은 오르고 축축한 날씨라. 무더위로 견디기 어렵지만, 농작물에는 이보다 좋은 환경이 없어서 성장이 가장 빠르다.
습열교증(濕熱交蒸), 습기와 열기가 함께하면 천지가 찜통에 든 것과 무에 다르랴.
사람은 쉬 지쳐 간(肝)의 열이 위로 치솟으니, 답답하고 울적해져 뜬금없이 화를 내기 일쑤.
멍한 정신에 실수도 많은 데다, 식욕을 잃어 허기도 자주 느낀다.
복중 더위에 마시는 복차(伏茶)로 열을 내리고 속을 편히 하며,
생강을 씹고, 닭과 양을 끓여 양기를 보충해야,
비로소 그늘에 자리 깔고 누워, 귀뚜라미 싸움 붙이며 느긋하게 보낼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