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가파인망(家破人亡) (3)
“현신장?”
해원기가 처음 듣는 용어를 되풀이하자, 제갈봉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다가,
“현신장은 밀각에서 강호로 내보낸 자. 제대로 무림에서 지위와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라고. 아미의 오온존자와 진여신승, 공동의 요술사……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낙양이 장안으로 바뀌었구나. 아!”
짧은 탄성과 함께 급히 쳐다보는 시선.
“해 소제, 어서 오 소저를. 요술사가 있다면 삼라잠종진이라고 마음을 놓을 순 없겠어.”
서두르진 않아도 눈에는 긴장의 빛이 담겼다.
얘기가 이제야 핵심에 접근하던 판인데, 갑작스럽게 대화를 중지한다.
그러나 해원기는 무엇 때문인지 눈치 챌 수 있었고, 그러지 않아도 계속 오소민이 신경 쓰이던 중이었다.
삼라잠종진이 비록 실전된 제갈세가의 비전이지만, 현신장이라는 자들은 모두 기고한 능력을 지녔다.
제갈봉이 특히 요술사를 거론한 걸 보면 갖가지 술법에 능통해서 파진(破陣)이 가능할지도.
“알겠습니다.”
해원기가 즉각 몸을 일으켜 오소민이 뛰어든 숲으로 향했다.
더는 진법 안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제갈봉은 해원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서 심각한 표정,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찾는 데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제갈봉이 그렇게 맡긴 이유는 해원기가 이미 삼라잠종진을 확실히 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가문의 비전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
본래 삼라잠종진은 침입하는 이를 해치는 흉험한 진법이 아니요, 그런 만큼 고수라도 일단 진법에 빠지면 헤쳐 나오기 쉽지 않다.
그러나.
밀각의 삼대부(三大夫)에 가세한 셋이 현신장이라면. 그중 하나가 요술사라면.
진법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고,
아울러 현신장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살펴야 한다.
제갈세가를 왜 둔갑이라 부르는지, 왜 세가의 이름 앞에 신산이란 말이 붙는지.
스스로 ‘제갈’이란 성을 밝힌 이상, 제대로 능력을 펼칠 각오다.
제갈봉이 품에서 조그만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두 손을 빠르게 놀려 만지작거렸다.
찰칵, 찰칵.
상자를 이루는 여섯 개의 사각 판이 뒤집혀 풀어지면서 한쪽이 긴 십자형이 된다. 안에는 가는 선이 복잡하게 얽혔고 노란 점이 곳곳에 박힌 기묘한 물건.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선을 더듬으면서 노란 점들이 조금씩 움직이니.
열고 닫고, 풀고 조이고, 밀고 당기고, 더하고 뺀다.
삼라잠종진을 더욱 치밀하게 정비하는 건 둔갑,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밀각의 의도를 헤아리는 건 신산.
그녀의 봉황처럼 아름다운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해원기가 잠심침령과 동시안을 모두 동원해 숲을 살폈다.
사부는 기관이나 진법을 따로 익힌 적이 없었으나, 그 무엇도 사부의 발을 묶을 수 없었다.
어차피 모두 하나의 도리에서 비롯된 것.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남에게 바로 전해줄 수 없는 것이라. 해원기는 다양한 방법으로 기초를 닦았다.
과거에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라고, 또 만박(萬博)이라고 불렸던 분들의 후대가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사부 또한 당신이 겪었던 다양한 경험을 풀어 알려주었다. 그중에는 노신선(老神仙)이라고 했던 정사의 갖가지 술법에 통달했던 분의 가르침도 포함되어서.
삼라잠종진의 대체(大體)도 알게 되었다.
이 진법의 의미는 잠종, 즉 흔적을 숨기는 데 있다. 외부에서는 진법인지도 인지하기 어렵고, 숨은 곳에 접근하려면 복잡한 미로에 빠진다. 반면에 내부에서는 외부로 나가기 쉬워, 언제든지 숨은 곳을 바꿀 수 있다.
오소민이 갑자기 성을 내고서 뛰쳐나갔어도 딱히 진세에 휘말릴 염려는 없는데,
해원기가 살짝 미간을 좁히고 두리번거렸다.
얼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삼 장 앞의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훌쩍 몸을 날리던 해원기,
발이 땅에 닿자마자 멈칫거렸다.
오소민.
나무에 바짝 붙어 잔뜩 몸을 웅크리고서, 무릎 사이에 파묻은 머리. 묶었던 걸 풀어서 긴 머리칼이 넓게 펼쳐졌고, 손에 든 하화만 천천히 돌고 있다.
저 하화의 꽃잎이 움직인 덕에 위치를 파악했으나,
처음 보는 모습이 낯설다.
해원기가 온 걸 알 텐데 머리를 들지도 않는다.
벗겨졌던 두툼한 웃옷, 더운 여름날과 어울리지 않는 그 웃옷을 제대로 꿰입었는데.
그래도 추워 보이는 건 왜일까.
어색함을 억지로 참고 해원기가 조그맣게 불렀다.
“오 형.”
그제야 알았나.
오소민의 어깨가 꿈틀하고,
“어.”
모호한 대답이 무릎 사이로 새어 나온다.
왜 불쑥 화를 냈을까. 그리고 여기서 또 왜 이러고 있을까.
막상 부르긴 했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몸이 불편한가? 혹시 해독의 후유증이, 음.”
‘고구마 대장’답게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게 해원기 자신도 답답해서 말을 맺지 못하고,
오소민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하화만 맥없이 돌아갈 뿐.
하화가 딱 멈추고, 오소민의 두 손이 빠르게 자신의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묶더니.
머리를 퍼뜩 들었다.
“무슨 일이 났구먼. 가세.”
하화를 갈무리하고, 벌떡 일어나 바지를 탁탁 털고. 부산하게 차림새를 고치면서 성큼 앞으로 나서는데.
어째 해원기는 본체만체. 그저 숲을 헤치고 정자 쪽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을 걸기도 어려워진 해원기가 어정쩡하게 그 뒤를 따르고,
그러면서 이어지는 오소민의 말.
“화청궁에 나타난 것들, 전립에 회의를 걸친 자들이 밀각이고, 나머지 셋은 본래 우리가 찾으려던 아미와 공동의 괴물들 같던데. 묘한 일이로군. 예상치 못한 변고가 일어날 때마다 저 여자, 제갈 소저가 끼어있어.”
음성과 말투가 본래대로 돌아온다.
해원기가 일단 마음을 놓으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제갈봉을 처음 만난 건 구란와자 다음. 반룡령의 위탁을 받아 자신의 내력을 캐러 왔다면서 되레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악송령을 찾으러 갈 때도, 수차제의 괴변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
확실히 묘하다.
그래도 오소민이 ‘제갈 소저’라고 바꿔 부르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믿을 만하다는 건데.
해원기 자신도 제갈봉에게 딱히 의심을 품지는 않았으나.
“제갈세가의 오명 때문에 함부로 정체를 밝히기 어려웠다는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지만, 좀 더 명확한 목적이 있지 않을까. 그걸 먼저 알아야 서로 속을 털어놓는 대화가 되겠지.”
“옳은 말일세.”
얼른 동의하는 해원기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역시 오소민이다. 어수룩한 해원기가 소홀하기 쉬운 점을 미리 짚어준다.
아직 금오혈석이나 육악, 소림에서 무당으로 간 인광과 수진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함부로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내용들.
해원기의 대답에도 오소민은 앞만 본 채,
“여하튼 제갈 소저는 큰 도움이 되네. 동창의 내부를 제대로 엿본 유일한 사람일 거야. 언제부터,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하군. 흠, 이 진법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
딱딱하게 말만 덧붙인다.
해원기가 옆으로 붙었다.
“요술사가 있다는 걸 알고 불안해진 듯해. 삼라잠종진이 제갈세가의 비전이긴 해도 술법에 밝은 자라면 풀어낼 수도 있으니까.”
“음.”
어깨를 나란히 해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저 간단하게 답만 하는 오소민에게서 찬바람이라도 일 듯.
평소 같으면 ‘바부탱이, 자네도 이 진법을 알잖아.’라고 한 마디 덧붙였을 텐데.
왜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진짜 바부탱인가.
숲을 빠져나오기 전에 제갈봉이 먼저 정자에서 나왔다.
“진법을 정비했지만,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여기를 미끼로 놔두고 여산을 넘자고.”
단출한 봇짐 하나를 둘러매며 가리키는 방향은 서쪽.
조금 전 자신에게 벌컥 성내던 걸 잊은 것처럼 오소민을 평범하게 대한다.
오소민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럼 장안으로 들어가자는 건가요? 그자들이 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행선지를 정한 이유부터 묻는다.
그다지 서두르는 것 같진 않아도 봇짐을 멘 제갈봉의 말이 빨라진다.
“화산을 공격하진 않을 거야. 밀각의 대부 셋도 구경만 하다가 떠난 셈. 화청궁에서 아미와 공동으로 내보낸 현신장 셋과 회합한 이유는 아무래도. 흠, 가면서 얘기할게. 하여간 지금 장안은 오히려 여기보다 안전할 테니까. 내가 아는 곳도 있고.”
밀각의 셋은 운대봉 위에서 술법으로 관전하다 독을 풀고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었다.
대부 셋과 현신장 셋이 화청궁에 모인 목적이 화산에 있지 않다는 하나의 증거.
먼저 등을 돌려 앞장서는 제갈봉이 계속 입을 놀렸다.
“요술사가 있으니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이자들의 행동은 우리 상식과는 많이 달라. 물론 현신장은 조금 깨었을지도.”
걸음이 빨라지고, 뒤를 따르는 오소민의 말도 바로 따라붙는다.
“상식? 조금 깨었다?”
“강호를 말하는 거지. 더 정확히 말하면 무림이랄까. 오 소저는 의심스러운 자와 한바탕 싸우다가 그자가 도주하면 어떻게 해?”
“그야. 어떻게든 잡아서 속을 털어놓게 해야. 아니면 살살 뒤를 밟던가.”
“맞아. 그저 우연한 다툼이라고 해도 결말을 내지 않고서 그냥 놔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그게 무림인의 상식. 하지만,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살아온 자들이라서 그런가, 동창에서 고강한 무공을 이룬 자들은 쓸데없이 교만하기 일쑤야. 딴에는 잘난 머리를 굴려 제멋대로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그게 큰 허점이라고 여겼는데.”
“오온존자, 진여신승, 요술사. 이 셋은 그래도 강호 물을 먹었다?”
“그렇지 않겠어?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변하니까.”
“밀각이 바로 우리를 추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술사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나요?”
“음. 그 밖에 그들이 화청궁에 모인 이유. 쉽사리 그 장소를 떠나지 않을 거야.”
오소민이 머리를 조금 내밀었다.
또 다른 근거.
“그 이유를 알아요?”
바짝 다가온 오소민에게 제갈봉이 고소를 지어 보인다.
“알면 좋게. 단지 이전에 밀각에서 밖으로 출차(出差)한 경우를 몇 번 보았는데, 전부 낙양과 남경이었거든. 낙양에서는 바로 옆 개봉의 삼보별저, 남경에서는 양주(揚州)의 승경원(勝景園). 이번에는 장안의 화청궁이라.”
“전부 번화했던 옛 도읍과 근처의 명승지. 공통점이 있군요. 어?”
말을 받던 오소민이 불현듯 뭐가 떠오르는지 눈을 깜빡이자,
제갈봉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전부 근래에 일어난 일이여서.”
두 사람의 표정이 똑같이 심각해지지만.
뒤에서 주위를 살피며 따르던 해원기는 같이 들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얘기라.
기어이 끼어들어야 했다.
“양도양경(兩都兩京)이 나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제갈봉과 오소민이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굳은 표정 그대로 해원기를 돌아보는 두 여인.
정자 안에서 투덕대다가 벌컥 성을 내고 뛰쳐나갔던 건 다 없었던 일인가.
숲속을 나란히 달려가며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는 게 그 내용보다 더 신기한데.
워낙 빠르게 오가는 화제. 알아듣기에도 벅차서 물었던 게 잘못인 것처럼.
해원기를 향하는 두 쌍의 시선이 노려보는 것 같다.
그러면서 해원기의 질문에 답해주기는커녕,
“오온존자란 놈이 좌우봉원(左右逢原)이라고 떠들더군요.”
“역시 중원을 아우를 준비를 거의 마친 모양이네. 계획대로.”
빤히 해원기를 보면서 둘이 번갈아 하는 소리에.
더 헷갈린다.
어쩐지 소외당하는 느낌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