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가파인망(家破人亡) (2)
제갈봉은 할 얘기를 다 했는지 머리를 돌려 정자 밖을 보고,
두툼한 웃옷을 걸친 오소민도 더는 가시 돋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꽤 긴 정적.
제갈봉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으나, 그건 오직 그녀의 말뿐.
하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두 구절은 그녀가 심상치 않은 배경을 지녔다는 걸 여실히 증명한다.
이 두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당세에 제대로 아는 이는 극소수일 터.
더구나 사부와 인연을 맺고 함께 했었던 이들은 끝까지 사부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은성매명(隱姓埋名).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모든 일을 다 묻으려는 사부의 뜻을.
알아도 모른 척, 와전된 소문도 못 들은 척, 잘못된 얘기에도 입을 굳게 닫고.
감히 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난세가 끝나고 채 이십 년이 지나지 않은 시간, 강호는 위대한 검협의 존재를 잊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스라이 사라진 과거의 전설을 찾아내다니.
그것도 잊힌 배경이 고의란 것까지 추측하면서.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해원기가 무거운 표정으로 제갈봉을 보았다.
“하소연이라고 했었지요? 그 두 구절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제갈세가의 기구한 사연을 털어놓을 대상이 형제 두 사람뿐이라고 어떻게 확신했나.
비록 제갈봉의 말에 진심이 느껴지긴 했어도 쉬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정자 밖을 바라보던 제갈봉이 얼굴을 돌리면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새삼스럽게 해원기를 훑어보는 시선.
“흠.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실수할 수가 있다더니. 해 소제가 그런 경우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
둔하고 답답하다는 건지.
첫인상이 묘한 의미를 품었지만, 해원기는 그런 것보다 이 대화가 더 중요했다.
질문과 대답을 교환하기로 한 약속.
“풍화니 응양이니 하는 과한 얘기는 과거에 숙부가 저를 놀리려고 지어주신 게, 맞습니다.”
검왕.
열여섯 살, 태산에서 열린 마지막 연검지회(練劍之會)에 사부의 심부름으로 참석했다가 그 즉석에서 생긴 엄청난 별명.
탁 소숙의 장난이 어느 정도 섞였으나, 꼭 놀리려고만 해서는 아니었다.
해원기가 인정하자, 제갈봉의 고운 눈매가 차분하게 내려왔다.
묻고 답하는 조건 따윈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도 해원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무엇보다 대화가 필요했다.
“숙부, 당세의 천하제일인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천극 탁 대협이. 그랬었군. 해 소제의 사부님과 천극 탁 대협을 일컫는 두 구절을 처음 알게 된 건 풍운책(風雲冊)에서야.”
제갈봉이 선선히 말을 받자 오소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개방 팔선의 제자라 굳이 팔자의 언약에 구애받지는 않아도, 함부로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려고 입을 닫고 있었지만.
뜻밖의 단어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풍운책이라면, 용호풍운?”
제갈봉이 오히려 신기한 듯,
“응? 어떻게 그걸. 무림에는 공개되지 않았을 텐데.”
오소민을 따라 저절로 시선을 해원기에게 보내느라,
조금 전까지 투덕대던 말투였던 것도 잊었다.
해원기가 미간을 모았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덕주에서 팽조린을 통해 처음 들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흥륭전장의 황륙이 추측했었던 두 가지 책자 중의 하나.
풍운책에 사부와 숙부가 실려 있다니.
해원기의 간단한 설명에 제갈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흥륭. 대내의 사정을 어느 틈에 거기까지 살폈는지. 흐흠, 동창의 가장 큰 구멍은 어쩌면 흥륭일지도 모르겠네.”
혼자서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해원기와 오소민을 의식하고 얼른 말을 잇는다.
“흥륭의 추정이 거의 정확해. 용호방은 당세 무림, 풍운책은 과거 역사의 기록이야. 물론 관부의 힘을 동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모를 알기 어렵다는 걸 알았을까. 은밀하게 강호 곳곳에 의뢰해서 정보를 모았어. 그 때문에 나도 접촉할 빌미를 얻었고.”
‘의뢰’니 ‘접촉’이니.
그런 단어에서 내막을 짐작하는 데는 아무래도 오소민이 낫다.
“그게 언제부터지요? 에, 그럼 반룡령이나 하북팽가도?”
제갈봉이 눈가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호, 눈치 챘구먼. 대강 십 년은 된 듯하고. 반룡령은 그러면서 아예 관부의 주구로 매수된 자들이 세운 조직. 하북팽가는 좀 달라서, 음, 쉽게 말하면 소림사의 속가제자 같은 곳이지. 하지만, 반룡령 내부의 구체적인 사항이나 하북팽가 이외에 또 어떤 곳이 있을지는 전부 비밀이야.”
“아따, 어지간히 비밀, 비밀.”
“본래 동창이 그런 집단인걸. 내가 직접 만나본 가장 높은 직위는 장형(掌刑)인데, 뭘 담당하는지 알려주지 않더라고. 아니, 대체 장형이니 이형(理刑)이니 하는 첩형 급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도 몰라, 그 위의 태감은 또 얼마나 되고. 뭐, 일단 우두머리가 누군지.”
“엥? 우두머리는 뻔히 제독태감, 아닌가?”
“그런 명칭도 아네. 정식으론 사례감의 장인태감, 혹은 대태감(大太監)이 맞아. 모든 내시 환관 중의 최고위라서. 하지만.”
“하지만?”
“흔히 십이태감이라고만 알지. 그 외에도 사사팔국(四司八局)까지 더해서 내관이십사아문(內官二十四衙門)에 사품(四品) 관위를 지닌 내시들이 수두룩하거든. 서로 감싸고돌아 누가 진짜 권력을 쥐었는지 드러내지 않는 게 내시의 본성이라.”
“칫, 기껏해야 장작으로 목욕물이나 데우고, 옷을 빨고 가죽을 깁는 주제에 사품? 웃기는군.”
“웃기지도 않아. 동창은 이미 또 하나의 황궁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거대한…….”
잠깐 말을 멈춘 제갈봉이 오소민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그나저나, 오 장로는 대내 사정을 잘 아네. 흐음.”
신기하다는 표정.
오소민이 뭐에 찔린 것처럼 전신을 떨어서, 옆의 해원기조차 놀랄 정도였다.
혹시 해독의 후유증이 있나.
해원기가 동시안을 운용할 필요도 없었다.
흔들리는 눈, 허옇게 질렸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으니.
오 형은 역시 여자였구나.
일단 제갈봉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가운데 앉은 해원기는 번갈아 쳐다보기도 바쁠 만큼 대화가 빠르게 오간다.
과연 여자들끼리는 다르구나. 수다스럽다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번쩍번쩍하는 것 같달까.
그저 사부와 탁 소숙의 이름이 실렸다는 풍운책이 발단이었는데, 단숨에 동창 조직의 규모까지 화제를 넓혔다.
하나하나 따져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화법은 비록 비약이 있긴 해도 빠르게 핵심을 찾는다.
더구나,
처음에 조마조마하게 서로를 긁어대던 둘이 이렇게 척척 주고받는 모습이란.
절로 마음이 놓여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오소민이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깜짝 놀랐다.
제탁지검을 두 번이나 펼치고, 보명오석까지 사용했던 게 신체에 부담을 주었을까.
그런 해괴한 독이니 무슨 후유증이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원기는 곧바로 인상을 써야만 했다.
탕.
“이 여자갓! 무슨 잘난 척이야? 저 혼자 주절주절. 까불지 말라고!”
의자를 세게 치며 버럭 내지르는 고함.
붉으락푸르락 화를 있는 대로 내며 당장 제갈봉에게 달려들 듯.
이 뜻밖의 발작(?)에 제갈봉도 어이가 없어 눈만 깜빡이고,
해원기가 서둘러 오소민의 소매를 잡았다.
“오 형, 왜…….”
“아, 놔! 지금 이 여자 말을 들어줘야 하나? 뭐 하나 믿을 게 없.”
말릴 새도 없이 와락 몸을 뒤트는 통에,
훌렁.
제갈봉에게 얻어 걸친 웃옷이 벗겨지면서 속살이 드러나 버렸다. 해원기에게서 얻은 붕대로 가슴만 단단히 감은 채로.
헉.
해원기도, 제갈봉도 순간 멍해졌고.
“어마앗!”
오소민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도 두툼한 웃옷을 해원기 손에서 빼앗아 들고서.
방향도 가리지 않고 정자 주위에 펼쳐진 숲으로 뛰어든다.
“아! 오 형.”
정신을 차린 해원기가 급히 뒤를 쫓으려 하자, 제갈봉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 놔둬, 해 소제.”
“아니, 저렇게, 이 주변엔 진이 펼쳐…….”
“아휴, 오 장로, 아니, 오 소저의 마음도 알아줘야지. 지금 따라가면 더 부끄러울걸. 또 삼라잠종진이 있는 걸 아니까 그리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기다리자고.”
제갈봉의 차분한 설명에 해원기가 엉거주춤해졌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지금 따라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 둘만 있게 되면 더 난감할 것 같다.
삼라잠종진도 흔적을 감추는 데 특화되어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진법이나.
“해독의 후유증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제대로 쉬면서 내부를 점검하지도 않고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데.
오소민이 날아간 곳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해원기에게 제갈봉이 어쩐지 맥 빠진 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고쳤다.
“해 소제는 참.”
뭔가 하려던 말도 얼른 바꾸어서,
“오 소저의 독이 어떤 건지 알겠어?”
침착하게 묻는다. 이젠 아예 소저라고 부를 셈인가.
그게 별로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 해원기의 시선이 비로소 돌아왔다.
독. 상당히 중요한 화제요, 그러지 않아도 싸움 중에 혐의를 둔 자가 있었다.
“아니요. 독에 대해선 배운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근래에 희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지요. 봉대저, 아니, 제갈 소저는 저들의 내력을 압니까?”
오소민과 바쁘게 주고받았던 대화로 어느 정도 제갈봉의 신세를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싸웠던 자들의 정보를 물어볼 만하다는 생각.
제갈봉이 고운 눈매를 찡그렸다가 폈다.
독을 모르면서 해독은 해낸 해원기. 백초환은 자신에게 주고 맨손으로 오소민을 해독했다. 주머니에서 공깃돌 다섯 개를 꺼내서는.
공깃돌이 인세에 드문 해독의 보물일 수 있지만, 그래도 무슨 독이든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모습.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능력. 물론 ‘그’의 제자라면 백독불침도 어렵지 않겠지.
“밀각의 존재를 눈치 챈 것도 얼마 되지 않았어. 그들이 실제 등장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정확한 목적은 몰랐지. 겨우겨우 뒤를 밟아 장안까지 오게 된 거야. 그러면서 화산의 일도 알았고. 저 월영객이란 친구가 영 불안해서 어떻게든 해 소제에게 연락할 짬을 냈지.”
“아, 그러고 보니 일월표객 두 분은 어떻게.”
“괜찮아. 오 소저가 먼저 피신시켰으니. 그 두 사람이 부리나케 화산으로 달려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 다시 돌아왔거든.”
해원기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일월표객이 안전히 피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들은 다행히 거듭 독에 당하지 않았군요. 그렇다면 오형이 일월표객을 위해 뒤를 끊다가 다시 중독되었다는 건데. 독을 바꾸어 펼쳤었나?”
두 번 중독된 건 오소민. 환혹미리진을 깨면서 건넸던 백초환만으로도 일월표객은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상황을 되새기며 혼잣말이 되자,
제갈봉이 바로 말을 받았다.
“몇 가지 더 얘기할게. 오늘 벌어진 일의 단서는 사실 월영객 덕분에 얻었다고 할 수 있지. 일월표객은 동창에서 눈엣가시처럼 여겨서 집포령(緝捕令)을 내린 대상, 반룡령을 통해서도 그들의 정보를 구하려고 애썼어. 사실 일월표객 중의 월영객은 나와 같은 업종이랄 수 있는데, 살금살금 찾다가 개봉에서 발견했고. 흠, 오늘 일의 정보는 전부 개봉 삼보별저에서 나온 거라. 밀각은 여간해선 여러 명을 보내지 않는다던데. 오늘 나온 자들 가운데 독공의 고수를 알고자 하는 거야?”
“네. 아마도 아미에서 온 오온존자일 겁니다만, 다른 자도 독공을 익혔을 수 있습니다.”
“어, 오온존자? 그럼 아까 그 넷 중의 셋이, 현신장(現身將)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제갈봉이 크게 놀란 듯, 목소리가 확 커진다.
대화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