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가파인망(家破人亡) (1)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지는 걸 처음 느껴본 해원기다.
봉대저의 서신을 받고 화산에서 내려온 건 위기에 처한 월영객 전천도를 구하기 위함.
화청궁까지 단숨에 내달아 밀각 소속으로 보이는 셋과 마주쳤다. 운대봉 위에서 기묘한 행사를 벌였던 자들답게 상당한 실력을 지녔기에, 우선 이소천과 전천도를 피신시키려 했고.
그들 중에서 독기와 고독을 사용한 자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적은 ‘대부’를 자칭하는 셋 외에 더 있어서.
조금 늦게 도착한 오소민이 아니었다면 전천도를 구하기는커녕 일월표객 두 사람이 다 변고를 당했을 터.
새로 나타난 적은 놀랍게도 아미산에 있으리라 여겼던 오온존자였으며, 순식간에 고수를 중독 시켰다.
상황이 꼬인 셈이지만, 그래도 해원기가 처음부터 찾으려고 애썼던 대첨산 독살 사건의 단서. 마침내 그 실마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 화청궁은 본래 그들의 회합지점이었던가. 오온존자뿐 아니라 진여신승과 공동의 요술사까지 등장하였고,
일단 제탁지검으로 중독을 풀어주었던 오소민이 또 독에 당해버렸다.
인사불성이 된 오소민을 안고서 대적(大敵)을 상대해야 할 판.
생각지도 못했던 곤경에 빠졌으며, 때맞춰 봉대저가 기이한 연막을 베풀어 돕지 않았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아미와 공동에 있을 줄 알았던 셋이 왜 화청궁에 이르렀나.
밀각의 셋은 화산에 무슨 목적을 지녔으며, 다른 셋과는 어떤 모임이었을까.
운대봉 위의 독술과 오온존자는 무슨 관계인지.
이런 대단한 힘을 어디서 얻었으며,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아홉 개의 금오혈석, 육악의 셋으로부터 얻은 듯 보이는 괴이한 능력.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의혹 때문에 머리가 띵할 지경이다.
봉대저는 대체 왜 돕는 걸까.
아니,
오 형이 실은 여자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괜스레 화끈거리는 얼굴, 초점을 찾지 못해 흔들리는 눈동자, 잔뜩 힘이 들어가 치솟은 어깨.
당장 머리를 싸안고 뒹굴 것 같다.
“풋.”
해원기의 가련한(?) 모습을 확인한 오소민이,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한 손으로 해원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이 친구야. 뭘 그리 고민하나? 내가 다 어색하게끔. 그래, 난 본래 여자라구. 그게 뭐 대순가? 괜찮아, 괜찮아.”
퍽, 퍽.
어지간히 힘을 주었나. 먼지가 풀썩 일고, 소리가 정자에 울릴 정도로 패(?)는데도.
해원기는 그새 돌덩이가 되었는지 고스란히 어깨를 맞아주고, 표정은 더욱 우그러졌다.
여자.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뭐가 괜찮다는 건지. 당최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다.
그러든 말든. 오소민은 그걸로 해원기와 할 얘기는 다 한 것처럼.
“봉대저라, 흐음. 이름을 큰누나라고 지었으니 일단 그렇게 부르도록 합시다. 일단 우리가 도움을 받은 셈이니 고맙다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방금 해 형이 물었던 것처럼,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하군요. 해 형에게 듣기로는 반룡령의 위탁으로 뒷조사를 했다던데.”
대뜸 봉대저에게 얼굴을 돌려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진다.
여자라고 인정했던 건 싹 잊은 듯, 표정이며 말투가 평소와 다름없다.
봉대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도움을 받은 셈’, ‘해 형’. 편을 딱 갈라 화제의 주도권을 쥐려는 소리.
“고맙긴, 뭘. 그저 혼절한 친구한테 발목 잡힌 해 소제가 안타까워서 조금 힘을 보탠 거지. 반룡령의 위탁은 말 그대로 위탁일 뿐, 내가 맘에 들지 않을 때, 퇴짜 놓으면 그만이고. 그나저나 이렇게 말싸움부터 하려고 드니, 참 드센 아가씨일세. 오, 장, 로는. 호호.”
일부러 ‘장로’를 하나씩 끊어 강조하면서,
전혀 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드센 아가씨’의 눈썹이 당장 곤두서는데,
해원기가 먼저 장탄식을 흘렸다.
“허어어, 두 사람 다 좀. 저, 그냥 말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여자 둘 사이에 끼어 진땀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아예 애원조가 되어 쳐다보는 시선에 봉대저가 입맛을 다시다가,
오소민을 보며 어깨를 으쓱 올린다.
“정 그렇다면. 그래, 전에 해 소제와 나, 우리가 약속했던 게 있지? 그 규칙에 따르자고.”
뭔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오소민에게 ‘우리’를 강조하고 나서야,
“이 정자 주변에 무슨 진법이 펼쳐진 줄 알아?”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해원기 쪽으로 돌아앉았다.
오소민이 해독되어 정신을 차리고, 해원기와 더불어 정자 안에 앉고서 한참 후에야 겨우 정상적인 얘기가 시작되려나.
방성에서 등봉까지 동행했을 때 서로 질문을 교환하기로 했던 약속.
그걸 들먹여 진법을 묻는 말에 해원기가 어색해진 표정을 고쳤다.
오소민을 안고 연리목에 이르자 봉대저가 연속으로 일러주었던 기묘한 걸음과 방향.
“그게, 아마 삼라잠종진인 걸로 압니다만.”
봉대저의 눈썹이 살짝 떨리고,
“흠. 과연 아는군. 나중에는 내 전음보다 먼저 움직이기에 좀 놀랐거든. 당세에는 누구도 이 진법을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
“잠깐. 그럼 그 일곱 색깔 연막탄이 혹시 칠색천막입니까?”
일단 화제가 집중되어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나. 해원기가 규칙에 상관없이 되레 말을 끊고 묻는 소리에.
봉대저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여, 역시 해 소제는 바로.”
눈을 따라 입술까지 떨리는지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데,
해원기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봉대저는 제갈세가, 아니, 신산와룡가(神算臥龍家)와 무슨 관계인지.”
부르르.
더운 날씨에 오한이 든 것처럼. 봉대저가 몸을 크게 떨더니 맥이 빠진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자신의 말이 끊긴 것도 잊고서, 해원기를 멍하니 보는 두 눈.
“그 이름까지 알다니. 백여 년 전에 본가를 일컫던 그 이름까지.”
속삭이듯 작아진 음성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득하다.
가운데에서 둘 사이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던 오소민이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이 혼절했을 때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아직 자세한 경과를 모르기에, 무슨 얘긴가 듣기만 했지만.
마지막 해원기의 말에는 그녀도 더 참을 수 없었다.
“신산와룡? 제갈세가의 뿌리 말이야?”
제갈세가의 뿌리. 이 또한 알기 어려운 사실.
그러나 봉대저는 오소민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고,
그건 의도적으로 오 소저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오소민이 당장 봉대저를 노려보다가 그만 입을 닫고 말았으니.
성질을 긁어대던 이 고약한 여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으니까.
제갈세가.
기관토목과 기문진법으로 일가를 이룬 전통의 명문. 오랜 무림의 역사에서 언제나 기특하고 영명한 인재를 배출해 당당히 구주정문의 하나로 꼽혔고, 그 지혜와 재주로 정도를 이끄는 위치였었다.
그러나 백여 년 전, 마도의 종주인 지부의 출현을 막고자 천외에서 온 삼가(三家). 그중에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와 기고한 술법을 모두 지닌 적성문(摘星門)이 있음에 제대로 활약할 입지를 갖지 못했다. 이어진 정마대전(正魔大戰)에서는 멸문의 피해를 보았고, 그 후로는 아예 후대를 잇지 못하였으며.
가문의 정수인 갖가지 비전이 도리어 사도에서 출현하였으니.
제갈세가는 그저 과거의 역사에 기록된 이름일 뿐.
이제는 다 잊혀버렸다.
집안은 깨지고 사람은 다 죽었도다(家破人亡).
누가 있어 기억하고 무엇으로 되살리겠나.
그 뿌리조차 다 사라졌으리.
봉대저가 소매를 들어 눈가를 살포시 찍었다.
그리고 다시 드러낸 얼굴에는 화사하게 빛나는 미소.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며 방긋 웃는다.
“인사를 다시 해야겠네. 이렇게 본가를 기억해주는 분들에게 예의를 잊을 수는 없지. 오 장로도 개방의 뿌리 출신이라더니 견식이 남다르구먼. 자.”
두 손을 둥글게 돌려 모으고, 살짝 옆으로 튼 허리춤에 산뜻하게 붙이면서,
긴 목을 휘어 곱게 숙이는 머리.
마치 흰 물새가 가녀린 몸짓을 보이듯 우아하고도 교태가 담긴 인사.
“불운한 가세 탓에 참으로 길고 긴 인욕의 세월을 보냈더랍니다. 신산와룡가의 후대, 제갈봉(諸葛鳳)이 삼가 인사 올립니다. 개방 팔선(八仙)이 함께 키우신 유룡개 오 장로와.”
까딱.
살짝 숙이는 고개와 눈짓.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돌변한 모습에 오소민은 어안이 벙벙한데.
자신의 이름을 제갈봉이라 밝힌 봉대저가 이어서 해원기에게는 더욱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
“풍화절세, 응양구천. 검왕을 뵈옵니다.”
허리춤에 붙였던 손을 크게 올리며 아예 대례(大禮)라도 올릴 듯.
해원기가 펄쩍 뛰어 손을 내저었다.
“아, 됐소, 됐소. 제갈 소저. 이런…….”
낯선 것보다 요사스럽기까지 한 인사에 질색하는데.
역시 오소민이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신산와룡가, 제갈세가는 뿌리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세가의 후예 중에는 나쁜 짓에 가담한 이도 있었다고 들었소. 당신은 우리 내력을 어디까지 아는 거죠?”
총명한 그녀라 대강 칠색천막과 삼라잠종진으로 이런 상황이 되었음을 파악했으나,
그렇다고 대뜸 제갈세가의 후대라고 인정할 수 있나. 봉대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선 조금 더 증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무얼 했을까. 왜, 이제야 여기서 신분을 드러내는 걸까.
굉장한(?) 인사를 하던 봉대저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화려한 외모와 교태스러운 자태가 차츰 사라지고,
미소를 지운 두 눈이 깊이 가라앉는다.
“오 장로의 말대로. 오랜 세월 씻기 어려운 죄를 지은 본가는 감히 세상을 대할 면목도 없지. 그래서 그 안의 곡절을 밝힐 수도 없었다네. 부끄럽지만, 그래도 가문을 이은 처지로 평생 하소연이라도 들어줄 곳을 찾았기에. 후, 두 사람이라면.”
처음 듣는 무거운 음성.
확실히 눈앞에서 순식간에 표변하는 특이한 여인이지만,
해원기와 오소민이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기관토목과 기문진식.
이 방면으로 가문을 이룬 곳은 제갈세가 외에도 대조주가와 천공사가가 있지만, 소위 둔갑삼가로 일컬어지는 세 가문 중에서 제갈세가가 언제가 으뜸이 되었던 것은.
바로 가문 비전의 신산때문이었다.
능히 고금미래(古今未來)의 변화를 통찰할 수 있는 신산.
대조주가에서 괴이한 체질의 여아가 태어나자, 제일 처음 찾았던 곳이 제갈세가.
당시의 가주가 그 여아를 위해 신산을 베풀고 가장 먼저 내린 결정은 바로 뿌리를 감추는 것이었다.
제갈세가가 멸문되고, 가문이 오랫동안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예측했으며,
자칫 가파인망을 넘어서 절손폐문(絶孫廢門)이 될 것까지.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담아 뿌리인 신산와룡을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감추어버렸다.
그리고 백여 년. 단지 전해지는 것은 아스라한 전설과 수수께끼 같은 몇 마디.
사마의 난세가 끝났을 때는 어린 딸 하나만 남아서 진짜 손이 끊길 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뜻 있는 이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 법.
그 어린 딸이 마침내 신산와룡의 뿌리를 되찾아 가문을 다시 일으킬 힘을 얻었으나.
“……난세는 끝난 게 아니었지. 흩어지고 오용된 가문의 절학을 다시 수습하고자 은밀히 돌아본 세상, 이미 곳곳에 뻗어간 삿된 세력에 의해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까. 근 이십 년의 평화는 그저 눈속임이었을 수도. 강호의 안녕을 가져온 힘은 사라지고, 이를 대신할 힘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그 내막을 살펴야만 했다네.”
차분한 설명이 끝났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진심이 담긴 표정과 얘기.
해원기의 얼굴이 숙연해지는데, 오소민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동창을 가리키는 거죠? 그럼 진즉 그들의 속내를 강호에 알리면 될 텐데.”
곳곳에서 구주정문이 재건과 중흥을 이루던 시간이다. 제갈봉도 마찬가지로 제갈가문을 다시 세워 정식으로 강호 동도와 연락을 취했다면.
제갈봉이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쉬웠으면 좋았겠지. 그냥 동창이라고만 해도 황궁의 조직. 막 생기를 회복하는 무림에겐 버거운 상대요, 그럴 역량을 갖춘 세력도 인물도 부족했어. 오 장로가 더 잘 알잖아. 천하제일대방도 내실을 기하느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개방도 조직과 인원을 대폭 줄였으니까.
“게다가 이름도 없는 계집 하나가 불쑥 제갈세가를 칭한다고 누가 믿어줄까. 그러지 않아도 가문의 재주를 잘못 쓴 자들이 적지 않은데.”
타당한 이유다. 그래도 오소민은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성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서?”
하필 해원기와 오소민을 택해 정체를 드러내는가.
제갈봉이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믿고 털어놓을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나를 이해해주고, 다시 시작될 난세를 능히 평정할 능력을 지닌 형제 두 사람.”
형제?
제갈봉의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누군가 고의로 그랬는지. 싹 지워버린 것처럼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 두 구절. 난 그 두 구절을 기억해. 고검지주불가범(孤劍之主不可犯), 양천극주불가량(量天戟主不可量)이라는.”
오소민의 입이 딱 붙었고.
해원기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