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88화 (188/410)

제47장 염염하일(炎炎夏日) (4)

연리(連理)는 두 나무의 가지가 마치 하나처럼 서로 이어 붙는 것.

울창한 숲에서 특별히 주의하지 않고서야 쉬 눈에 띌 리 없지만, 해원기는 반 각도 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신수영, 초상비, 육지비행술. 가진 재주를 전부 펼쳐 숲을 바람처럼 빠져나가면서도 어떻게든 기척은 남기지 않으려 했다.

신기한 칠색 연무탄 덕을 보았어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적이 넷.

봉대저가 왜 자신을 돕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저 그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오소민을 살필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게 무엇보다 급한 일이다.

연리목 근방에 이르자 다시 전음이 들렸다.

[오른쪽으로 일 장, 다시 왼쪽으로 일 척, 삼 척 물러났다가 동북(東北)으로 오 척…….]

해원기의 경공이 빨라서인가.

봉대저의 목소리도 몰아치듯 다급하게 길을 가리키는데, 참으로 복잡하기도 하다.

그러나 해원기는 뭔가를 눈치 챈 것처럼 의심은커녕,

눈을 맑게 빛낸 채 서슴없이 방향을 바꾸다가,

마침내 봉대저의 지시보다 더 빠르게 산등성이를 넘었다.

먼저 봉대저의 전음이 말했던 것처럼 주변은 울창한 숲과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 길도 없이 시야가 막히던 곳이 돌연 확 트이고,

다 무너져가는 자그만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봉대저를 앞에 두고.

“어? 이건, 백초환? 나한테 왜…….”

“복용하고 십 장, 아니, 삼십 장 정도는 떨어지세요. 독이 어디까지 퍼질지 모릅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봉대저가 ‘독’이란 소리에 냉큼 백초환을 입에 넣으며,

서둘러 요대자를 끄르는 해원기를 보다가 다시 눈을 치떴다.

“그럼 해 소제는, 정말, 백독불침(百毒不侵)? 그래도!”

뭔가 말을 덧붙이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빨리!”

매서운 해원기의 호통에 황망히 몸을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 한마디가 예리한 날로 베어버리는 듯해서,

해원기가 요대자를 뒤집어 마구 쏟아내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와르르.

요대자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졌다. 요리할 때 썼던 숟가락이 달린 젓가락이며, 약왕당에서 받은 약병, 꼼꼼히 감은 붕대에 어디에 쓰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물건들까지.

주위를 살필 새도, 봉대저에게 신경을 쓸 여유도 없다.

늘어진 오소민의 얼굴과 손이 창백하게 변하고, 숨소리가 더욱 미약하게 잦아들기 시작해서.

급하게 작은 목갑 하나를 찾아내는 해원기의 전신에,

신왕공의 청정력(淸正力)이 뚜렷하게 일어난다.

환혹미리진 안에서 오소민에게 제탁지검을 펼쳐 분명히 독기를 베어냈었다.

그 잔재가 신체에 남았다 해도 이렇게 될 수는 없다.

품에 껴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소민의 사지백해(四肢百骸)에 두루 퍼진 독. 그건 처음에 베어냈던 것과는 달랐고,

심지어 해원기에게 스며들려고까지 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개방 팔선을 계승한 오소민은 분명히 항룡진결을 터득했고, 손에는 삿된 기운을 막는 보패까지 들었거늘.

쩔그럭.

목갑 안에서 나온 건 납작한 공깃돌 다섯 개. 은은한 빛을 머금은 것 외에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

해원기가 빠르게 그 공깃돌을 바닥에 드러누운 오소민의 몸 위에 올렸다.

목 아래, 양쪽 어깨, 양쪽 허벅지.

곧장 오소민의 머리 위로 자리를 바꿔 무릎을 꿇고, 두 손이 정수리를 감싸면서.

지이잉.

청정력을 오소민에게 집중하자마자 다섯 개의 공깃돌이 작게 울며 보광(寶光)을 뿜는다.

무척 서두르면서도 신중한 움직임.

배우긴 했어도 실제로 써보긴 처음이기 때문이다.

사부는 인체의 경혈맥락(經穴脈絡)을 잘 알지 못했다.

단전을 중심으로 삼는 무학은 경맥과 혈도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하지만, 이런 상식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천하유일의 신왕공.

그 신왕공의 삼전태(三全泰)를 넘어 백벽(白璧)의 경지에까지 이른 사부에겐 경혈맥락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천마(天魔)를 제거하면서 입은 중상, 그리고 기어이 진혼위령(鎭魂慰靈)의 뜻을 세워 귀왕검(鬼王劍)을 당신의 신체에 거두어들이면서.

육신은 쇠하고, 생명은 잦아들었다.

그런 사부를 보살피려고 두 분 사모가 백방으로 애를 썼고, 갖은 방도를 다 강구하였기에.

해원기도 자연히 배우게 되었다.

인체의 경혈맥락과 그 운행을.

침, 뜸, 약 같은 의술을 제대로 배우진 않았으나. 체내의 기를 다루어 생명을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안다.

더구나 둘째 사모가 공들여 갈아낸 보명오석(保命五石)이 있음에야.

본래 오행명공권(五行明空圈)이라 했던 보천석(補天石) 다섯 덩어리. 그 파편을 오직 순수한 공력과 정성으로 공깃돌만 하게 만들어내곤,

보명결(保命訣)을 대신한다고 이름을 보명오석이라 붙였었다.

신왕공이 깃든 피는 생명을 지키는 힘이 있어서, 사부는 가까운 이들이 위험할 때마다 손목을 베어 자신의 피를 먹이는 보명결을 시행했었다고.

그게 둘째 사모는 끔찍이도 싫었단다.

비취를 박아 넣은 듯 선명한 해원기의 동시안.

지잉, 지징.

보명오석 다섯 개가 호응하면서 오소민의 체내가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를 구분하는 보명오석이다. 오 형의 사지백해에 퍼진 독기를 전부 분리해서 한곳에 모으고, 흠, 단전은 위험하니 가슴으로 모으자.’

본래 항룡진결과 사실보허의 기공을 지닌 오소민이라, 독기를 가려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으나.

자칫 단전으로 모았다간 근기(根基)를 해칠 우려가 있다.

제탁지검을 아까와 같은 부위에 쓰려는 것.

주입된 신왕공의 힘으로 보명오석이 거침없이 독기를 가슴으로 모았다.

해원기의 두 손이 감쌌던 오소민의 머리를 떠나 천천히 가슴으로 향했다.

아까의 전철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오른손에 제탁지검을, 왼손에는 삼매마려를 일으켰다.

판과를 즉시 검으로 만들었던 수법으로 아예 독기의 잔재까지 없앨 셈.

독기가 하나로 뭉치는 순간, 제탁지검이 빠르게 오소민의 가슴을 치고.

왼손이 벼락같이 오른손 위를 덮었다.

스슥.

겹친 두 손 사이로 으깨진 독기의 잔재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보기엔 그저 두 손으로 오소민의 가슴팍을 힘껏 누른 광경이었지만.

“으음.”

오소민이 비로소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리는데,

해원기는 여전히 두 손을 겹친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오소민이 눈을 떠 거꾸로 비치는 해원기의 얼굴을 살피고, 몸을 꿈틀거리면서 올려놓은 보명오석이 굴러 떨어지는데도.

독기가 완전히 사라졌거늘 해원기는 마치 얼어붙은 것 같다.

사람을 거꾸로 올려다보면 누군지 헷갈리기 마련.

오소민의 눈이 초점을 맞추고 나서야 해원기인지 알아본 모양.

“아, 해, 해 형…… 흐에엑!”

그러나 아는 체를 하자마자 오소민이 누운 채로 펄쩍 뛰며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바람에 해원기는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이게 뭔 일인가.

비명 소리에 봉대저가 득달같이 달려오다가 우뚝 멈추었다.

해원기가 일러준 대로 삼십 장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어떻게 된 일인지 살피던 중이었다.

오소민이 중독되었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 그걸 해원기가 어떻게 해독할 것인지 궁금했고, 또 진짜 백독불침이란 걸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

해원기가 과연 자신이 기대했던 ‘그’일까.

칠색천막에 삼라잠종진(森羅潛踪陣)까지 동원하는 위험을 무릅썼다. 그것도 술법에 능한 요술사 앞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판에, 갑자기 터진 비명.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삼라잠종진이 모든 기척을 지운다 해도 마구 소리를 질러도 된다는 뜻은 아닌데.

왈칵 달려들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하얀 속살이었다.

오소민이 황급하게 양팔로 감싸 안는 가슴팍 가운데, 녹아버린 것처럼 큰 구멍이 난 옷 사이로 언뜻 비치는 둥그런 선.

얼마나 급한지 데굴데굴 구르다 정자 기둥을 들이박는다.

“억.”

혀를 깨물면서도 옷깃을 잡아당기느라 소매가 다 찢길 지경.

그 와중에도 해원기는 뒤로 나자빠진 채, 정자 계단에 머리를 찧었는지 두 눈을 꼭 감고 드러누웠지만.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않았고, 정신을 잃었을 리도 없다.

두 손을 뻣뻣하게 내민 채 혼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겹쳤던 두 손이 진짜 얼어붙은 것 같다.

봉대저가 바쁘게 시선을 두 사람에게 보내다가 갑자기 허리를 푹 꺾었다.

“헉, 호호, 호호호호.”

웃음을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삼라잠종진을 설치한 것도 다 잊을 만큼.

뭔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알아챈 사람은 봉대저뿐이었다.

“호호, 개방의 신비란 게 설마 오 장로의 성별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줄은. 호호호.”

봉대저의 웃음이 영 멎지 않지만.

해원기와 오소민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

봉대저가 꺼내준 두툼한 마괘자(馬褂子)를 위에 걸친 오소민이 오만상을 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우습소? 지금이 그걸 따질 때가 아니고, 본 방을 들먹일 일도 아닌데. 고약한 양반일세.”

불쾌한 감정을 전하는 음성과 말투는 평소대로.

정자 안에 자리를 나누어 앉을 때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안색도 되돌아왔다.

“어머, 고약하다니? 그래도 내 나름으론 기분 나쁘지 말라고 성별이란 단어를 골라 썼는데. 오 장로, 아니, 오 소저. 흠, 오 낭자가 더 어울릴까.”

그러나 봉대저가 어디 입심으로 뒤질 성격인가. 웃음 대신에 호칭을 가지고 놀리기 시작하자, 오소민의 눈썹이 벌떡 일어섰다.

“그까짓 호칭 따위. 어떻든 나는 개방의 순행장로지만. 그러는 당신, 봉대저라는 희한한 이름을 댔을 뿐,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 해 형의 내력을 캐라는 반룡령의 위탁을 받았다면서,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구먼.”

기민한 오소민이라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강 짐작하는 터.

도움을 받은 처지에 세게 나갈 수는 없지만, 그게 더 짜증을 북돋아서.

가라앉았던 안색이 다시 붉어진다.

“호, 해 형이라. 해 소제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면, 참, 호형호제가 아니라 형매지간(兄妹之間)이라고 해야겠네. 그럼 내가 큰누나가 되는데 이리 열을 내서야 쓰나. 그러지 않아도 두툼한 마괘자 차림에. 흐흥.”

오소민의 반응에 봉대저는 더 즐거운 듯 콧소리까지 섞으니.

당장 한바탕 할 분위기.

정자 안이 땡볕에 나선 것처럼 덥다.

“후우, 우선 왜 우리를 도와주었는지, 부터 알려주겠습니까? 궁금한 게 적잖군요. 그리고, 오…… 형은 좀 더 조섭을 해야.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르, 네.”

해원기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긴 한숨으로 시작해서 중간 중간 끊기는 호흡. 더위에 숨이 막힌 것처럼.

붉어진 오소민의 얼굴과 대조적으로 해원기의 얼굴은 지친 듯 창백하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줄도 모른다.

더구나 그 시선은 아까부터 땅바닥만 향해서,

“어이, 해 소제, 무슨 죄라도 지었어?”

“해 형, 괜찮아? 혹시 또 과하게 힘을 쓴 게?”

봉대저와 오소민이 거의 동시에 말을 걸었으나.

여전히 눈을 똑바로 들지 못한다.

의미심장한 표정의 봉대저, 두툼한 마괘자를 걸친 오소민과 달리,

덥디더운 여름(炎炎夏日)을 홀로 실감하는 해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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