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염염하일(炎炎夏日) (3)
절세검왕.
“음?”
낙혼금종이라고 했던 작은 종을 든 초로의 도사가 눈을 부릅뜨고,
회색 승복의 중년 승려의 시선도 홱 돌아왔다.
“술사! 신승!”
그리고 곧장 자신들을 부르며 날아드는 오온존자. 그 양팔이 대붕의 날개처럼 활짝 펴진 걸 보자마자,
딸랑, 딸랑.
낙혼금종이 연달아 울리고,
중년 승려의 두 손이 괴이하게 휘돌았다.
화르륵.
놀랍게도 그 두 손을 따라 치솟는 불길, 그리고 돌연히 닥쳐오는 바람 소리.
휘리리링.
해원기가 굳은 얼굴로 왼손을 바짝 세웠다.
오른손은 하화를 쥔 오소민의 손을 잡은 채, 어찌 된 노릇인지 오소민은 해원기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대로 허우적거리기만 한다.
속을 흔드는 종소리,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길, 귓전을 스치는 거센 바람.
공동의 요술사와 아미 복호사의 진여신승으로 보이는 자들이 오온존자에 호응해서 함께 손을 쓰니.
상황은 읽었으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예 오소민을 바짝 잡아끌면서 신형이 팽이처럼 돌고, 동시에 왼손이 흐릿한 그림자로 화했다.
너무나 빨라서 그림자조차 흐릿한 왼손. 탄금지를 필두로 봉황수, 응조공, 반혼장에 벽력권까지 한꺼번에 펼쳤다는 걸 누가 알아볼까.
앞과 옆에서 들이닥치는 불과 바람을 무서운 속도로 후려갈겼다.
퍼펑!
돌가루와 흙먼지가 분수처럼 치솟고,
그러나, 시야가 가려지자마자 곧장 또 하나의 폭음이 터졌다.
펑!
그 여파로 삽시간에 회복되는 시야.
칠팔 장 떨어진 곳, 숲 근처에서 미간을 찡그린 해원기의 모습이 보였다. 맥없이 늘어진 오소민의 어깨를 꽉 부여안은 채.
바로 앞에는 제왕군림신공으로 해원기의 퇴로를 막은 이 대부가 흉한 웃음을 흘린다.
“크흐흐, 네놈, 네놈이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갈기갈기 찢긴 회의와 잔뜩 일그러진 인상. 무표정과 책 읽는 듯하던 말투는 다 어디로 갔는지. 민머리에 매달린 기다란 핏줄기가 더해져 흉신악살과 다름없어서.
“허, 이 대부, 괜찮소?”
그다지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는 오온존자가 챙겨 물을 정도였고, 뒤이어 소매로 먼지를 날리던 요술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절세검왕이라고? 영 어울리지 않는데.”
진여신승도 훌쩍 위치를 잡으면서 의심스러운 듯 쳐다본다.
“존자, 이 대부의 말이 맞나?”
동서남북. 하나씩 방위를 차지한 넷에 의해서 다시 포위되었다.
단 대부와 조 대부를 제압했지만,
상대는 오히려 늘었다.
해원기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어깨를 감싸 부축한 오소민의 몸이 갈수록 무거워진다.
신뢰격(迅雷擊)으로 공격을 막고, 질풍결(疾風訣)로 물러나면서 몇 번이나 기운을 전해주었는데도 정신을 잃어가는 오소민.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다시 중독된 듯한. 설마 빈모자화 같은?’
이미 제탁지검으로 체내의 독기를 베어냈었다. 일월표객을 먼저 피신시킨 듯한데 왜 다시 정신을 잃는 걸까. 마치 비천무영 황정리가 당했던 것처럼.
당혹과 걱정이 앞서서 입이 마를 지경.
누구 하나 만만하게 여길 수 없는 상대가 넷이나 된다. 처음 대부라는 호칭의 회의인들이 조화부인을 가볍게 말하더니, 과연 이들은 하나하나가 그녀의 수준을 넘고.
또한, 제각각 신기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회의인 중에 혼자 남은 이 대부의 제왕군림신공은 여전히 막대한 압력을 자랑하고, 오온존자는 굳이 독공을 따지지 않고도 붕익천강이라는 강력한 바람을 일으킨다.
요술사의 낙혼금종은 듣는 이의 힘을 절반으로 깎아내는 듯. 진여신승은 열폭노도라는 차고 매운 기운을 내쏟다가 돌연 불길을 뿜었었다.
의문의 서신을 받고 월영객을 구하러 왔고, 밀각에 속한 회의인 셋까지는 예상했지만.
설마 인광과 수진을 만나게 된 배경이었던 아미와 공동의 괴인들 셋이 더 있을 줄이야.
찾아가려 했던 자들이 찾아온 셈.
그러나 예상치 못한 조우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 손밖에 쓰지 못하니 오의를 깨우친 검왕오형도 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고.
여기서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
서둘러 안전한 곳을 찾아 오소민의 상태부터 살펴야만 한다.
대첨산 화전민 마을의 흉수를 찾을 단서라 해도 친구보다 중요하진 않다.
그나마 이렇게 포위한 후에 입을 놀리는 상대 덕에 잠깐이나마 생각할 짬이 생겼다.
“이 대부의 말이잖나. 맨손이지만 확실히 검기를 쓰더군. 내 붕익천강을 베어낼 수준의.”
“응? 붕익천강을 맨손으로? 말도 되지 않는.”
“맨손으로 검기라면. 그래 영세검주, 소위 백년제일검사라는 자가 새로 개척한 경지라고. 읽은 기억이 나는구먼. 거기에 최근 덧붙여진 기록이 아마…….”
요술사가 머리를 긁으며 끄는 말을 이 대부가 바로 받는다.
“풍화절세, 응양구천. 틀림없소, 저 죽일 놈이 그 절세검왕이요.”
욕설을 섞어 씹어뱉는 말투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럴 만도 한 게, 함께 온 회의인 중에 조 대부는 목숨이 간당간당, 단 대부는 폐인이 되었고. 자신도 한심스러운 모습이니까.
해원기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오온존자가 그런 이 대부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조금 전에 묘한 소리를 지껄이더이다. 대첨산 화전민? 이 대부는 뭔지 알겠소?”
“그게 지금 중요하오? 당장 저놈을 잡으라는 말 못 들었소?”
아무래도 둘 사이는 본래 좋은 감정이 아닌 듯. 이 대부가 대뜸 목소리를 높이자, 요술사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딸랑, 딸랑.
“왜들 이러실까. 자, 우선 제압한 후에…….”
둘을 말리면서 미리 손을 쓰려는지 예의 종소리가 울리지만, 요술사는 말을 맺을 수 없었다.
지이이잉.
해원기가 왼손을 쭉 뻗자 울리는 청정한 검명(劍鳴).
순백의 검신이 선명하게 그 손에 이어지고, 검극이 천천히 돌면서 공간이 이상하게 일렁거린다.
포위한 넷 모두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들.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해원기에게 눈길을 떼지 않았건만,
대체 어떻게 이 순백의 검이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고.
그보다 먼저 전신에 전해지는 이상한 느낌에 즉각 자세를 바꾸어야만 해서.
청정한 검명 속에 해원기가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지 듣지 못했다.
“태초의 혼돈은 뭐라 변별할 수가 없고.”
왼손으로 신왕검(神王劍)을 구현하기는 처음. 또 왼손으로만 천손검법을 펼친 적도 없으나.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상대를 한데 몰아 떨쳐내야만 한다.
땅을 밟는 듯, 문지르는 듯. 두 발이 나아갈 듯 말 듯.
구음입무(口吟立舞)까지 더한 홍몽무변.
고오오오오.
신음을 토하는 공간이 마구 휘돌아 조여들기 시작하자,
이 대부가 두 손을 번갈아 내쳐 장인을 강기로 바꾸고, 오온존자의 양쪽 소매가 풍선처럼 부풀며, 두 손으로 낙혼금종을 감싸는 요술사와 두 팔을 기이하게 엮는 진여신승.
속박하려는 공간을 깨려고 전부 공력을 끌어올렸다.
일촉즉발.
바로 그 순간,
피잉!
희한한 파공성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드는 십여 개의 둥근 물체.
퍼퍼퍼퍼퍼펑.
모양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전에 일제히 터지면서 연기가 쏟아져 내린다.
홍적황록(紅赤黃綠), 청남주(靑藍朱).
일곱 가지 색깔이 뒤섞여 폭포처럼 내리는 연기. 그야말로 대낮에 별을 본 것처럼 어지러워 뭐가 뭔지.
파팍, 쉬잉, 데엥, 촤아아.
포위했던 넷이 모았던 공력을 풀어내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으나, 연기는 흩어지기는커녕 더욱 부풀어 오르기만.
기어이 기척까지 모호해지자 모두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함부로 손을 썼다간 자기들끼리 부딪치게 된다.
“뭐, 뭐냐? 이게.”
“이놈은, 어디?”
“어디서 날아든 거야?”
“날려버릴 수 없는 연기라니.”
제각기 한 마디씩 내뱉는 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들이 포위했던 대략 십 장 넓이의 공간, 그 공간을 이 일곱 가지 색깔의 연기가 집어삼킨 것처럼 꿈틀거리고.
신속히 주위를 살피는 사이에 제멋대로 뒤섞이더니 갑자기 씻긴 듯 사라진다.
그 자리에 이미 해원기와 오소민은 보이지 않고.
이 기막힌 광경에 네 명 모두 얼떨떨해져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자기들의 포위를 이런 식으로 감쪽같이 빠져나갈 수 있다니.
이 대부가 이를 부득 갈면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 무슨…….”
분을 참지 못하는 그와 달리 바닥과 공중을 번갈아 보던 요술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본 적이 있네. 칠색천막(七色天幕), 천하에서 가장 오묘한 연무탄이라고. 그렇지만. 흠.”
말이 끊긴 이 대부의 시선이 확 돌아간다.
“연무탄? 연무탄 따위가 날아가지도 않고 기척까지 지워? 여기서 웬 헛소리를.”
“어흠, 이 대부. 좀 진정하시고. 아, 두 분 불형(佛兄)은 다친 대부들을 좀 살펴주면 좋겠소이다.”
요술사가 얼른 표정을 고치면서 이 대부 곁으로 움직이자.
오온존자와 진여신승이 슬쩍 인상을 쓰다가 몸을 돌렸다.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요술사가 그래도 상황을 정리할 줄 아는 편.
살기로 충혈된 이 대부의 눈을 들여다보듯 머리를 내밀며 음성을 낮춘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 듯하오. 이 대부가 적시한 절세검왕, 그 존재도 그렇지만, 이 칠색천막은 사라진 지 백 년도 넘었다고 하셨거든. 제조법이 완전히 사라져 복원할 수가 없다고 아쉬워하시면서.”
“으음?”
속삭이듯 건네는 말에 이 대부의 인상이 비로소 바뀌었다.
자신이 비록 밀각의 상위이고, 외부에서 지휘할 권한을 지녔으나. 외부에서 현신(現身)한 이들 중 요술사는 상당히 인정받는 인물. 그가 이렇게 신중히 경어체를 사용하는 인물은 극소수다.
“황사(皇師)께서?”
요술사를 기른 이를 언급하자.
요술사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둔갑삼가(遁甲三家)가 함께 연제한 정화라고. 아, 자세한 얘기는 따로 합시다. 이 건은 이 대부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올려야 할 겁니다.”
“어, 아. 알겠소.”
이 대부의 목소리도 어수선한 심정과 달리 가라앉았다.
아무리 노기가 치솟았어도 ‘황사’를 떠올린 바에야 본분을 되찾아야만 하고,
요술사가 말한 ‘둔갑삼가’가 무엇인지 기억하느라.
계통이 달라도 다들 기본적인 지식은 똑같이 배웠었다. 어린 시절 읽어야만 했던 무림의 옛 역사, 거기에 나오는 설명이 떠올랐다.
기관토목(機關土木)에는 대조주가(大造周家)가 으뜸이고, 기문진식(奇門陣式)에는 천공사가(天工謝家)를 따를 자가 없다지만, 이를 둔갑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능히 구주정문에 꼽혔던 가문은 제갈세가(諸葛世家)뿐. 둔갑삼가는 실제로 제갈세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기억을 떠올린 이 대부가 머리의 상처에 손을 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황사를 들먹여도 여기서 제갈세가가 왜 나오나? 한 옛날에 이미 쫄딱 망해서 거덜이 난 집안을.
불쑥 해원기의 귀에 들린 전음.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특별한 연무탄을 쓸 거니까 그 틈에 동북쪽으로 냅다 뛰어, 산록(山麓)이 겹겹이 막히면서 연리목(連理木)이 있는 곳으로.]
봉대저의 목소리라는 걸 확인할 시간도, 믿을 수 있는지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일곱 색깔의 연무탄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틈을 어찌 놓치겠나.
부신수영으로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일러준 대로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른 오르막에 울창한 숲. 초상비와 육지비행술까지 섞어 속도를 높이면서,
해원기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기척을 감추느라 오소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바짝 껴안았는데,
축 늘어진 오소민의 약해진 맥.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이 친구의 몸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손을 대는 곳마다 뭉클하니 이상한 촉감이다.
울창한 숲이라 따가운 햇볕도 잘 들지 않거늘, 공력의 소모가 심하다고 해도 아직 버틸 여력이 있거늘.
왜 이리 땀이 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