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86화 (186/410)

제47장 염염하일(炎炎夏日) (2)

물과 불을 함께 써서 증기를 연무탄으로 쓴 건,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소천과 전천도는 독기에 침습되었고, 오소민조차 중독으로 혼절. 비록 제탁지검으로 오소민 체내의 독기를 베어내고 백초환을 나누어주었지만.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독을 풀어냈다고 해도 회복에는 시간이 걸리고, 그때까지는 제힘을 내지 못한다. 독기가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고.

상대는 대부라는 호칭을 쓰는 밀각의 셋과 오온존자. 게다가 화청궁 안에 요술사와 진여신승이란 자들까지 있을 수 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해야만 한다.

오소민은 과연 팔선의 후대답게 이소천과 전천도를 이끌고 퇴로를 찾았으나,

그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오온존자, 회의인들을 웃도는 능력을 갖추었다.

기껏 만들어냈던 증기를 전부 날리면서까지 검림소연을 펼칠 수밖에.

지면을 뚫고 무수한 검기가 치솟고,

이를 피해 오온존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는 틈에,

오소민이 재빨리 일월표객을 끌다시피 하며 뛰쳐나갔다.

망경문으로 이어지는 지형은 가파른 기슭, 진양문과는 달리 산등성이에 이르기까지 울창한 숲이 둘러쳐져 있다.

숲으로만 들어가면.

이소천과 전천도를 내던지듯 먼저 밀며 힐끗 고개를 돌리던 오소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원기의 뜻을 알았기에 제탁지검이 독기를 벤 후에도 혼절한 척, 증기가 퍼지자마자 움직였었다.

서로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어도 여기서 후퇴한다는 뜻을 금방 알아챘는데.

멈칫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광경.

바로 뒤에 있을 줄 알았던 해원기가,

여전히 돌무더기 한가운데에서 한쪽 무릎을 굽힌 채라니.

빠져나오지 않고 뭐 하는 건가.

빠져나가려 했다.

땅바닥을 내리쳐 검림소연을 발동한 후에 즉시 오소민을 뒤쫓으려 했다.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소천과 전천도를 오소민 혼자에게 맡겼으니.

그러나 상대는 전부 기이한 능력을 지닌 자들.

발밑에서 치솟는 검기를 거푸 때려낸 장력으로 버티는 자는 이 대부 혼자뿐, 꼬치처럼 꿰뚫리던 조 대부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단 대부는 예의 영사태화의 비법으로 거침없이 검기를 흘려버린다.

게다가 오온존자의 펄럭이는 붉은 가사에 검기가 맥없이 날리다니.

검림소연으로는 오소민 들이 몸을 피할 시간을 벌기에도 충분치 않다.

급히 수법을 바꾸려는데,

‘음?’

해원기의 시선이 빛을 뿜었다.

땅바닥에 붙은 채 굵은 힘줄을 드러낸 자신의 손등.

그 손이 어찌 된 노릇인지 처음 접하는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다.

무겁고 단단하면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품은 기운.

제남 대명호의 북극묘에서 펼쳤을 때는 단지 숲을 이룬 검기가 결계를 가득 채우기만 했거늘.

그리고,

넘치는 기운이 저절로 몸을 움직인다.

해원기가 너무나 놀라 꼼짝없이 그 기운에 휘둘렸다.

빨아들인 기운이 분명히 배꼽 주위로 몰렸으니까.

빠르게 덮쳐드는 대부 셋과 오온존자에게 눈길도 돌리지 못할 정도로.

이 대부의 제왕군림신공은 막강한 힘. 무지막지하게 강한 장력이 접하는 모든 걸 부순다.

다양한 인흔을 중첩하는 옥새사인이 깨지면서 그의 자존심도 크게 상처를 입었기에, 검기가 솟구치자 공력을 더욱 끌어올려 장인(掌印)만을 내뻗었다.

열다섯 개의 검기를 부수면서 십오장(十五掌)이 겹쳐 이룬 하얀 손바닥 하나.

강기가 선명하게 형상을 이루어서 스치는 것만으로도 돌무더기 하나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얍!”

이 대부가 기합을 지르며 하얀 손바닥의 형상을 밀어냈다.

우웅.

옥새사인의 두 배가 넘는 위력을 해원기의 머리부터 뒤집어씌울 셈.

단 대부는 검기를 고스란히 흘리면서 뱀처럼 미끄러져 해원기의 아랫도리를 휘감으려는 듯.

영사태화의 사력으로 버티고 차력으로 힘을 모아 해원기의 어정쩡한 자세를 목표로 삼았다.

한쪽 무릎을 굽힌 자세로는 영사편법을 응용해 마음대로 늘어나는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어려울 터.

그리고 모습을 감춰버린 조 대부는 아예 기척조차 숨기면서 은밀하게 해원기의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단 대부와 이 대부가 손해를 보았음을 눈치챈 데다가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투광주를 회수조차 하지 못했었다.

아끼던 귀한 투광주를 세 개나 띄워 검기 사이사이로 밀어 넣고, 해원기가 정신을 팔 때 등짝에다 박아넣을 심산.

미리 약속이라고 한 것 같은 치밀하고 독한 합격.

끼어들면 방해가 된다고 느껴서일까.

오온존자는 붉은 가사를 날개처럼 펼치면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검림소연의 검기 태반이 휘말려 날아가고,

오온존자의 가느다란 실눈은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살피는 여유까지 보인다. 아니, 대부 셋의 합격을 느긋이 구경하는 여유랄까.

한쪽 무릎을 꿇고서 멍청히 땅바닥을 짚은 놈이 막을 수 있겠나.

굽혔던 무릎이 쭉 펴지고, 땅을 쳤던 손이 튕기듯 올라간다.

용틀임하듯 일어서며, 바닥을 다졌던 검왕수가 하늘을 받치듯 뒤집히는 순간,

두웅.

어디선가 울리는 형용할 수 없는 소리.

그리고 해원기 주변의 공간이 돌연 기이하게 변했다.

치솟은 검기, 그걸 부수는 군림제왕신공의 장인, 뱀처럼 미끄러지며 받아낸 사력과 차력, 날개처럼 펄럭거리는 붉은 가사.

이 모든 것 때문에 미친 듯이 회오리치는 돌조각과 흙먼지.

전부 붓으로 그린 것처럼 멈추어 똑똑히 눈에 들어온다.

그건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공간 자체가 굳어버렸기 때문.

오소민이 믿을 수 없는 이 광경에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이미 하늘에서 검기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콰콰콰콰.

한 차례 솟구쳤던 검기들을 처리하면서 해원기를 공격하던 자들이 기겁할 일.

이 대부의 하얀 손바닥이 해원기를 노리기보다 자신의 머리 위를 지키러 올라가고, 단 대부의 뱀처럼 미끄러지던 신형은 훌떡 뒤집혔으며, 기척까지 숨겼던 조 대부의 형태도 어스름히 드러났다.

뜻밖의 변화에 놀라기는 했으나 고수다운 반응.

그러나 남들보다 훨씬 위의 공중으로 날아오른 오온존자가 급한 소리를 외쳤다.

“조심!”

좌르륵.

목에 걸었던 백팔염주가 저절로 끊겨서 뿌려지는 아래,

땅바닥에서 또다시 무수한 검기가 치솟는다.

그 또한 몸을 낮추면서 두 손을 크게 떨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기와 땅에서 치솟는 검기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더구나 위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아래에서는 무겁고 단단한 기운이,

중간에서 맞부딪치려 하니.

아까와는 다르다.

오온존자에게서 강대한 폭풍이 일어나면서,

콰앙!

귀청을 찢는 굉음. 십여 장 넓이가 통째로 터져버렸다.

검왕오형의 세 번째 검림소연의 오의.

그건 이른바 수주개와(竪柱蓋瓦),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는다는 의미로 공간을 완벽한 검역(劍域)으로 바꾼다.

내가 축조한 검의 가옥 안에 상대를 들이면, 나는 집주인이요 상대는 손님. 손님은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한다.

조화부인이 떠들었던 독자성진이니 일인성진은 필경 신체를 진세로 대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 수주개와의 검역은 말 그대로 공간을 강제하는 진법.

해원기가 지닌 경이로운 공체(功體)로도 쉽사리 이룰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으나.

이 땅에서 강적을 마주하며 깨어났다.

화청궁은 온천으로 만든 옛 황제의 행궁. 여산의 지하를 흐르는 수맥과 화맥이 고스란히 해원기에게 기운을 전해 순간적으로 대지체(大地體)의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해원기가 눈에 힘을 주어 전면을 노려보았다.

“끄으으.”

전신에서 피를 쏟으며 널브러진 조 대부. 베이고 뚫린 상처가 수십 군데, 피 칠갑을 한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신음만 흘리고.

“허억, 헉. 쿨럭.”

오른팔이 어깨부터 뭉텅 잘려나간 단 대부는 갈기갈기 찢긴 두 다리를 벌벌 떨면서 피를 토하느라 면사가 날아간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도 그나마 오온존자가 백팔염주를 아래로 던지고 엄청난 폭풍을 일으킨 덕분.

이 대부가 걸레쪽 같은 옷을 걸치고서 민머리에 기다란 핏물 하나만 남긴 것 또한 그 덕을 봐서이다.

사방으로 퍼져 해원기를 노렸던 자들이 어느새 북쪽 망경문 근처에 몰려있다.

멀쩡한 건 오온존자 하나. 금실로 수놓은 붉은 가사 절반이 날아가서 깡총해졌을 뿐.

단주를 쥔 오른손을 얼굴 위로 높이 들었다.

“엄청나군. 번뇌투주(煩惱套珠)를 박살내고, 붕익천강(鵬翼天罡)까지 베어낸 데다가. 지금도 주위를 휘도는 희미한 검기. 이건 무슨 무공…… 네놈은 대체 누구냐?”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던 말투는 벌써 사라졌다.

음산하게 울리는 목소리.

누구냐고 물으면 으레 이름을 대던 해원기도 이번에는 다른 답을 한다.

“독을 쓰는 자가 바람까지 부리면 방비하기 어렵지. 이렇게 말을 거는 건 또 기회를 엿보려는 속셈일 수도. 아니, 그보다 대첨산의 화전민 마을을 아느냐?”

반문에 담긴 냉기 또한 오온존자의 음산한 목소리보다 더 차가운 듯.

독의 대가는 언제 어떻게 독을 살포할지 모른다. 더구나 바람을 능숙하게 이용한다면 원하는 시점, 원하는 곳에 베풀 수 있을 터.

아미파 무공으로 보이는 번뇌투주보다 강대한 바람을 일으킨 오온존자에게서 오랫동안 찾았던 단서를 발견했다.

스물네 명의 무고한 죽음. 그 흉수를 찾아내려고 무림에 발을 들인 해원기다.

마침내 찾아낸 단서. 오온존자를 향한 눈에서 무서운 빛이 번뜩이는데.

딸랑, 딸랑.

“으윽.”

묘한 종소리와 바로 이어진 신음. 그게 오소민이란 걸 알자마자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해원기였고.

그 틈을 오온존자가 벼락같이 치고 들어왔다.

높이 쳐들었던 손을 흔들며 잡아당기자 맹렬한 회오리가 일고, 그 사이로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왼손이 기묘하게 할퀴어 온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검기를 상대해서인지 왠지 뜨듯한 기운을 담은 왼손.

해원기가 급히 손을 모아 내저었다. 잔류한 검기로 검역을 다시 지을 기회를 잃었다.

생각을 바꾸어 열 손가락을 활짝 편 장력.

퍼펑.

손바닥이 저릿한 걸 무시하고 반탄력을 빌어 단숨에 수십 장을 물러났다.

숲이 시작되는 거목 바로 앞, 어디선가 나타난 두 개의 인영에게 밀려 비틀거리는 오소민을 보았기 때문이다.

파팟, 파팟.

삽시간에 오소민 근처까지 이르렀으나, 그 잠깐 사이, 오소민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의 쓰러질 지경.

귀를 스치는 이상한 소리에 움찔거리며 손에 쥔 하화까지 떨어뜨릴 듯.

“아무리 하선고의 보패라도 너 정도로는 낙혼금종(落魂金鐘)을 견디지 못한다.”

높고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딸랑.

솨아아아아.

종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기운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숨 쉴 틈도 없다.

해원기가 바로 오소민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대우신장을 그대로 펼치는데.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쾅!

“음.”

해원기가 입을 꽉 다물어 신음을 삼키며 발에 힘을 주었다.

밭고랑처럼 파이는 지면. 버티지 않았다간 가파른 경사에 나자빠질 수 있다.

더벅머리 끝부분이 우수수 부서져 나가고, 소매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으며, 가슴 한복판이 뻐근하다.

아무리 황망히 쳐냈어도 공간을 밀어내는 대우신장이거늘.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는 위력 때문에 해일처럼 밀어닥친 차가운 기운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검왕법신이 아니었으면 이 차가운 기운이 곧장 심맥을 침범했을 터.

마구잡이로 쥔 오소민의 손에서도 똑같은 기운, 차가우면서도 매운 기운이 느껴진다.

십여 장 밖에 회색 승복을 단출하게 차려입은 중년 승려,

“열폭노도(冽瀑怒濤)를 견딘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살피고, 그 옆에 음양도복을 걸친 초로의 인물이 조그만 종을 들고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머리도 다 감지 못했거늘. 이게 웬 변고인지. 쯧쯧.”

그러나 혀를 차는 높고 맑은 목소리는 목이 찢어지라 외치는 이 대부의 고함에 바로 뒤섞여버렸다.

“그놈을 잡아야 해! 그놈이 바로, 절세검왕(絶世劍王)이야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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