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장 염염하일(炎炎夏日) (1)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어지럽게 흩날리는 돌가루와 흙먼지.
이제 막 시작된 여름이건만, 눈을 뜨기 어렵고 숨이 턱 막힌다.
더위가 갑자기 몸 안으로 훅 들어온 듯,
오소민이 인상을 쓰며 헐떡거렸다.
“헉, 헉. 젠장, 불염진(不染塵)의 보패에도, 이, 이건 해괴한 절독…….”
조화부인이 소나기에 숨어 펼쳤던 곤혹도의 끈적한 어둠도 밀어냈던 하화다.
어떤 삿된 기운도 범접하지 못하는 이 보패를 꺼냈는데도 중독되었으니.
힘을 잃어가면서도 해원기에게 상황을 알려주려는 마음이 어깨를 억지로 비틀게 한다.
“나, 나한테서 떨어져야.”
“괜찮네. 조금만 참게나.”
무슨 독인지 모르지만, 이소천과 전천도에 이어 당했다. 전염될 염려.
그러나 해원기는 덤덤하게 말을 받으며 오소민을 조심스럽게 돌무더기에 기대게 하고,
이소천과 전천도에게 시선을 돌린다.
오소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감기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두, 두 놈이야. 새로 나타난 놈에게 차례로.”
“봤어. 중이 하나 더 나왔구먼. 그보다 자넨 일월표객 두 분을…… 음?”
기어이 독을 쓴 자까지 일러주려는 오소민.
서둘러 요대자를 더듬고서 오소민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던 해원기가 움찔했다.
환혹미리진이라는 진세.
파진운보로는 그저 환혹만 벗겨내는 데 그쳤다. 그래서 예의 손뼉을 치며 겅중거리는 우스운 몸짓을 취했고,
미리진을 깨뜨리는 동시에 독기를 감지했다.
단 대부와 이 대부를 상대할 때부터 경계했던 부분이다.
운대봉 위에서 독기와 고독을 펼친 자는 조 대부였던가.
그러나.
환혹과 미리가 전부 사라진 다섯 개의 돌무더기, 그중 두 개의 돌무더기 위에 선 자. 하나는 조 대부지만 하나는 처음 보는 인물이다.
어깨까지 풀어 내린 긴 머리칼엔 붉은 기가 진하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매끈한 얼굴은 가느다란 눈으로 웃는 듯 마는 듯. 상당히 부드러운 인상이지만, 그 생김새보다 차림새가 더 눈길을 끈다.
금실로 수놓은 붉은 가사를 오른쪽 어깨의 커다란 옥환(玉環)으로 고정한 승복. 목에는 배꼽까지 드리운 염주를 걸었고, 가볍게 내민 오른손으로도 단주를 돌리고 있으니.
머리는 깎지 않았어도 분명히 중이다.
대부라고 칭하는 밀각의 셋. 이미 단 대부, 이 대부란 자와 손을 섞어봤지만, 이 처음 보는 장발 승려에게서 더 위험한 느낌이 든다.
‘대부란 자들의 윗자리인가.’
그리고 오소민의 중독과 그 와중에도 끝까지 전해준 단서.
독을 쓴 건 바로 이 장발 승려다.
팔선의 무공을 이어받은 오소민이 보패인 하화를 꺼냈는데도 중독되었다면.
생각보다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은 독에 당한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오소민을 바로 해독시켜 이소천과 전천도를 지키게 해야 눈앞의 적들을 상대할 수 있다. 더구나 단 대부와 이 대부도 바로 이를 터.
요대자에서 백초환이 든 병을 꺼내 오소민의 품에 슬쩍 넣어주면서,
은밀히 제탁지검을 써서 오소민 체내의 독기를 베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뭉클.
이 여름에 솜옷을 입었나? 그것도 가슴팍에만 뭉쳐 넣었을까?
손끝이 갓 쪄낸 만두를 누른 것처럼 이상한 느낌.
하지만, 더는 그 느낌을 따질 새가 없었다.
해원기가 재빨리 오소민에게 제탁의 검기를 심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얼마 전에 들은 이름이야, 해원기. 그런데 어찌 여기에 있지? 허어, 요즘 각(閣)의 행사가 이상하구먼.”
차분한 음성이 해원기의 이름을 들먹인다.
장발의 승려. 가느다란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흔들어 의아함을 보이는 모습.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휘이익.
경풍이 일며 좌우의 돌무더기 위에 이 대부와 단 대부가 내려섰다.
“말이 지나치군, 존자(尊者).”
이 대부의 단조로운 말투가 뜻밖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뭐야, 벌써 와 있었나? 혼자? 나머지 둘은…….”
단 대부가 성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장발의 승려가 비로소 실눈을 뜨며 웃음을 짓는다.
“허허허, 세상에 이름난 욕탕에 왔는데 그냥 있겠소. 그러고 보니 우리 이 대부는 벌써 벗기 시작했구려. 얼굴부터 씻을 셈인지.”
단 대부나 조 대부와 달리 이 대부만이 전립과 면사가 날아갔고, 양손의 장갑도 사라졌다.
놀려대는 웃음에 이 대부의 얼굴과 민머리에 와락 붉은 빛이 돌았으나.
화난 시선이 장발의 승려를 노려보다가 바로 방향을 튼다.
“얘기는, 나중에, 하지. 우선 이놈들부터.”
도로 책 읽는 말투로 돌아가지만,
이를 가는 것처럼 말이 뚝뚝 끊긴다.
나름 심중의 노기를 억누르며 상황을 앞세우는 태도에 장발 승려의 웃음도 그쳤다.
이 대부가 성질을 참는 게 수양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실눈이 이 대부의 시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막 조 대부에게 설명을 듣던 참이었소만. 그간 몇 차례 거론되었던 골칫거리들이요?”
“맞소. 창위를 여러 번 애먹였던 일월표객, 당최 실체를 찾을 수 없었던 개방의 유룡개, 그리고…….”
돌무더기를 짚으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기를 쓰는 전천도,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서 꿈틀대는 이소천, 돌무더기에 기대 혼절한 오소민.
이 대부가 말을 끌자 장발 승려가 뒤를 잇는다.
“제남에 갔던 장(張) 태감의 실종을 저놈에게 혐의를 두었댔지. 흐음, 조 대부의 환혹미리진을 희한하게 뚫고 들어오긴 했지만, 경옥신공을 완성한 장 태감인데.”
해원기의 이름을 그렇게 들었던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 새삼스럽게 훑어보려는데,
“조화부인과 마찬가지로 경옥신공이라고 하는구나. 명옥선공이 맞겠지? 쯧.”
해원기가 그 말을 끊고 불쑥 물었다.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다섯 개의 돌무더기에서 회의인 셋과 장발 승려에 의해 부채꼴로 둘러싸인 상황.
아래에 선 해원기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혀를 차서,
저희끼리 떠드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
본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자들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 성격을 알 리 없는 장발 승려의 실눈이 웃는 것처럼 휘었다.
“아, 우리끼리 얘기하느라 실례를 저질렀구먼. 이름이 해원기라니, 해 시주. 해 시주는 좀 특이한 인물이라서 말일세. 과연 명옥선공이란 것도 아는구려. 뭐, 전진의 명옥선공이 바탕이 되었기에 경옥신공이라고 한 거지. 완전한 명옥선공의 구결은 영 구할 수가 없었거든. 이게 대답이 되려나…….”
또륵, 또륵.
손에 든 단주를 찬찬히 돌리면서 자세하게 답해준다.
기이한 인물.
밀각의 셋과 한패임은 분명하고, 이 대부의 모습이나 그 태도를 통해 해원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눈치 챘을 텐데. 운수(雲水)하는 행각승이 우연히 들른 것처럼 입만 놀리고 있다.
“마침 잘 되었소. 그러지 않아도 해 시주의 내력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은데, 좀 알려주겠소?”
질문과 대답을 하나씩 주고받자는 수작. 전혀 손 쓸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해원기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대화를 하자? 흠, 난 이름도 대지 않는 자와는 그다지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아, 이거 또 실례. 소개가 늦었구려. 나는 오온(五蘊)이란 법명을 쓰는데 불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존자라 부른다오. 아미타불.”
대화가 끊길세라 냉큼 자신을 밝히는데, 황당하게도 자신을 자랑하는 소리.
그러나 해원기의 눈썹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오온존자.
사대검계에 속했던 천불각을 무너뜨린 두 명의 요승 중 하나. 그러지 않아도 그 내막을 알아보려 아미산으로 가려던 참이었거늘.
머릿속에 조금 전 단 대부가 지껄였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둘이 더 있다더니. 그 둘은 공동의 요술사와 복호사의 진여란 자냐?”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문제.
설마 이들이 장안에 와있을 줄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대답 대신 묘한 소리가 나왔다.
“확실히 희한한 일이로군. 이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멀쩡하게 버틴다라. 설사 피독(避毒)의 진보(珍寶)를 지녔어도 티가 나기 마련인데 말이지.”
실눈을 깜빡거리는 오온존자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하다.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떠올랐다.
환혹미리진을 깨뜨리자마자 눈에 들어왔던 광경. 오소민이 일월표객보다 뒤늦게 쓰러진 건 견고한 내공과 보패인 하화를 지녔기 때문이지만, 세 사람 다 몸에 상처가 없다. 운대봉 위에서 장풍보의 인물이 갑자기 중독되었을 때처럼.
오소민이 끝까지 전하려던 말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방비할 수 없는 독이 차례로 전해졌고, 오온존자는 해원기의 중독을 기다리느라 일부러 고분고분 입을 놀렸던 것.
해원기가 돌연 몸을 크게 돌리면서 거칠게 손을 떨쳤다.
위이이이이잉.
굉음과 함께 줄기줄기 뻗는 무서운 광채.
등목구룡의 군림검이 네 개의 거대한 기둥처럼 뻗자,
콰콰콰쾅.
돌무더기가 한꺼번에 박살이 나버렸다.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린다.
이미 시간을 끌 여유는 없다.
회의인 셋과 오온존자가 재빠르게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괴상한 새끼!”
단 대부의 욕설이 신호인 것처럼 이 대부의 군림제왕신공이 태산이 무너지듯 덮치고,
왼쪽으로는 미세한 파공성이, 오른쪽으론 단 대부가 어지럽게 날리는 돌조각을 뱀처럼 피해서 다가든다.
모두 해원기가 중독된 티를 내지 않는 걸 확인했기에 반응이 대단히 신속하다.
해원기가 동시안으로 공간을 두루 살피면서 두 손을 빠르게 교차했다.
사방으로 뻗은 등목구룡이 순식간에 폭령진화로 바뀌고,
그 위로 또 한 자루의 군림검이 수원광한으로 휘돈다.
두 자루의 군림검. 수원광한은 삼십삼천신마봉헌, 폭령진화는 대천세계신마난무.
재단경위의 변식인 신마공무가 팔방을 뒤덮으면서 물과 불이 만났으니.
퍼펑, 차차창.
어지러운 소음에 뒤이어,
파아아아.
뿌연 연기가 폭발하듯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칫, 투광주(透光珠)를 어떻게 알고서.”
보이지 않는 구슬을 쏘았다가 회수도 하지 못한 조 대부의 불평이 끝나기 전에,
단 하나 남은 돌무더기에서 또 폭음이 터졌다.
펑.
“아미타불, 어딜 가시려고? 엇, 네가 어떻게…….”
어느새 돌무더기 뒤로 돌아온 오온존자의 느긋한 음성이 놀라움에 확 뒤집혔다.
연무탄(煙霧彈)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졸지에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어졌기에,
회의인들과 달리 신속하게 한쪽의 빠져나갈 길목을 먼저 점했지만,
그의 단주를 막아낸 건 연꽃 한 송이.
중독되어 혼절했던 오소민이 멀쩡하게 하화로 받아넘겼고, 바로 뒤에는 서로 어깨를 껴안은 이소천과 전천도도 보인다.
오온존자의 실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셋 다 중독 시킨 걸 자신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거늘.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더욱 놀랄 일은 바로 그다음.
고오오오.
묵직한 울림이 뭔지 깨닫기 전에 오온존자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흡력(吸力)에 비틀거렸다.
오온존자만이 아니라 막 위치를 잡으려던 회의인 셋도.
심지어 시야를 가리며 퍼졌던 연기까지 빨려들고 있었다.
두 손을 기이하게 엮는 해원기에게로.
“오 형, 어서!”
재촉하는 고함에 오소민이 이를 악물며 일월표객을 끌고 몸을 날리자,
해원기가 그대로 지면을 내리쳤다.
콰앙!
화산이 터져 나오듯, 폭포가 거꾸로 솟구치듯.
검왕수의 세 번째 검림소연이 무수한 검기로 계역(界域) 안으로 빨려든 넷을 꿰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