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좌우봉원(左右逢原) (4)
운대봉 위에 출현했던 세 가지 수법, 화청궁 문루에 등장한 세 명의 회의인.
해원기는 처음부터 누가 어떤 수법을 구사하는지 주의했었다.
공극조감은 일종의 술법, 독기와 고독은 독술의 하나. 명도흑염은 지부의 오대마도.
영사태화와 제왕군림신공이 다 희귀하고 고심한 무학이지만, 그게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단 대부에게 적멸검의 결계를, 이 대부에게 재단경위의 오의로만 대응한 건 만일을 대비해서였다.
제탁의 검과 어검대법이 언제든지 나올 수 있도록.
그러나 오소민의 외침을 듣자마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소천과 전천도가 향한 곳. 조 대부가 쉽사리 따라잡기는 어려웠을 텐데.
화산에서 조금 늦게 출발한 오소민이 그쪽에 끼어들었을까.
무엇보다 오소민은 이렇게 아픈 소리를 내는 친구가 아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부신수형이 실린 해원기의 신형이 정말 유령처럼 수십 장을 가로질렀다.
진양문이 정문이라 성벽이 그나마 있었던 건지. 동쪽에서 북쪽으로 꺾이는 곳부터는 형편없이 무너져서 이곳저곳에 돌무더기만 쌓였다.
멀리 문루 하나가 보이니, 이소천이 일러줬던 망경문일 터.
오르막에 널린 돌무더기 하나를 차며 방향을 바꾸려는데.
해원기가 돌연 공중제비를 돌면서 두 손을 연달아 휘저었다.
휘이이잉.
맨손에서 쏟아진 검풍이 전면을 휩쓸고,
그 반동으로 해원기가 도로 돌무더기 위에 내려섰다.
급한 김에 휘둘렀다고 해도 양손의 검왕수로 펼쳤거늘, 검풍은 소리만 내고 어디로 사라졌나.
돌무더기만이 묵묵히 늘어섰을 뿐.
망경문까지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오소민은 어디서 외쳤을까. 이소천은, 전천도는.
해원기의 동시안이 신광을 더해 망경문까지 훑으면서, 미간에 주름이 몇 개나 잡혔다.
무너진 성벽의 돌무더기. 커다랗게 다듬은 석재를 쓰기에 보수든 개축이든 대략 대여섯 개의 양이면 될 터.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무려 스무 개.
그것도 똑같은 모양으로 줄을 세운 것처럼 늘어섰다.
여산을 등지고 지은 화청궁이라 남쪽의 진양문보다 동쪽의 망경문이 더 높고, 당연히 뒤쪽의 돌무더기가 위에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조금씩 낮아지는 모양.
방향을 꺾을 때 느꼈던 위화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겠다.
눈을 어지럽혀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멋모르고 들어섰다간 단번에 길을 잃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라는 건가.’
진양문에서 전천도를 농락했던 환혹미리진.
진세가 펼쳐진 걸 깨닫자 해원기의 두 발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환혹미리진의 실체를 모르지만, 여기서 멍하니 변화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오소민의 외침이 맘에 걸려서 일단 파진운보로 걸어 들어갈 셈이다.
과연 돌무더기에서 몇 걸음 내딛자마자 주위의 경색이 흐늘거리기 시작하고,
뭔가가 전신을 잡아당기는 기분.
해원기가 잠깐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갑자기 몸을 뺐으니 이 대부와 단 대부가 뒤를 쫓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어느새 뒤에도 늘어선 돌무더기와 멀리 보이는 진양문.
이미 성벽이 무너지고 문루가 내려앉은 진양문이 멀쩡하게 보이고, 아무런 기척조차 전하지 않으니.
해원기가 심호흡하며 자세를 고쳤다.
전사(前斜), 후직(後直), 삼보돈(三步頓), 입중궁(入中宮).
파진운보를 쓰자 과연 흐늘거리던 경색이 도로 진정한다.
주작모가 수차제에서 펼쳤던 어둠을 걷어냈을 때처럼 이 진세의 환혹도 깨뜨리는 듯. 비로소 좌우로 듬성듬성 떨어진 다섯 개의 돌무더기가 보이지만.
해원기는 미간의 주름을 풀지 않았다.
파진운보는 본디 반선진 류에 대응하는 보법. 눈을 가리는 장안이나 엉뚱한 광경을 보이는 환혹은 부가된 효과일 뿐이다.
‘광풍수를 쓴 월영객이 상당히 시달린 모습이었지.’
돌연히 나타난 이 진세. 환혹미리진이란 게 반선진 계통임은 분명한데.
어째서 사람은 보이지 않을까.
손을 활짝 펴 맞부딪쳤다.
수차제에서 조화부인의 무리를 겪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암귀명진 다음에 구구염양진이랬던가.
겹겹이 깔렸던 괴이한 진세들을 연거푸 해제했던 경험.
짝, 짝.
혼자서 손뼉을 치며 그 장단에 겅중거리며 뛰는 우스운 몸짓.
그러나 그 겅중거리는 발놀림에 바람이 일고, 혼자 치는 손뼉은 우레처럼 울린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깨뜨렸고,
조화부인은 이 우스운 몸짓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었다.
오소민의 시야에 화청궁이 들어온 건 해원기가 단 대부와 싸움을 시작한 직후.
영민한 만큼 망선교를 넘기 전에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여산으로 월영객 전천도를 구원하러 갔는데, 해원기는 문루에서 싸우고, 이소천은 동쪽으로 몸을 날리는 광경.
회의인 셋은 의심했던 밀각의 무리일 것이고, 이소천이 싸움에 끼지 않고 성벽을 따라 빠지는 이유도 있을 터.
문루 지붕에 있던 회의인 하나가 이소천을 목표로 몸을 날렸다는 걸 직감했고,
즉각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운대봉 위에서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해괴한 술수를 부렸던 자들이다.
해원기보다는 이소천, 그리고 월영객 전천도를 지원해야 한다는 판단.
해원기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상황이 복잡해지면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기 어렵다.
오소민이 공력을 더해 속도를 높여 이소천을 따르고,
키 작은 회의인은 성벽 안쪽을 따라 쫓아오고.
남쪽 성벽이 끝나는 지점까지 바깥으로는 이소천과 오소민, 안에는 전천도와 조 대부가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다가.
“아우야!”
“형님!”
“이 국주!”
세 사람이 서로 부르는 소리가 마구 뒤섞이는 가운데,
공중에서 맹렬한 선풍이 쏟아져 내렸다.
오소민, 이소천, 전천도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데.
채 장력을 펼치기도 전에 그 맹렬한 선풍이 사방으로 퍼진다.
파파파팟.
애꿎은 돌무더기에 맞아 무수히 튀는 불꽃.
“호오, 개방의 순행장로도 왔구나. 웅황탄은 아직 남았느냐?”
비웃는 소리와 함께 돌연 엄청난 섬광이 터졌다.
파앗.
“음.”
햇빛이 찬란한 대낮, 그 해를 바로 눈앞에 갖다 댄 것처럼 아찔한 섬광.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으나 다들 당금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다.
재빨리 돌무더기 뒤로 물러났으나.
그리고 다시 상대를 찾으려던 눈이,
확 커졌다.
시야를, 아니, 하늘을 온통 뒤덮은 시커먼 구름.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먹구름이 당장 소나기를 쏟아내고, 그 소나기가 전부 뱀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니.
수백 수천 마리의 뱀이 덮쳐드는 광경에 소름이 끼치고,
오소민과 이소천이 황급히 손을 뻗으려고 했다. 온 힘을 다해 막으려는 본능인데.
“형님! 멈춰!”
짜작, 짜작.
목이 터지라 외치는 고함과 기묘한 손뼉 소리에 멈칫하는 순간.
두 줄기 힘이 먹구름과 소나기를 붓으로 긋듯이 훑고,
붓은 백묵(白墨)을 찍었는지 먹구름과 뱀 떼 중간이 통째로 지워졌다. 말도 되지 않을 괴이한 변화.
하지만 고함과 손뼉에 이소천은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수법, 전천도의 광풍수다. 그렇다면,
“오 장로, 이건 환혹의 술법…… 큭.”
오소민에게 서둘러 이유를 밝히려던 이소천이 허리를 꺾으며 신음을 토했고,
광풍수를 쳐내면서 곁으로 움직이던 전천도 역시 갑자기 다리가 풀려 고꾸라진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변화.
오소민이 눈을 부릅뜨며 양손을 앞뒤로 나누어 쳐냈다.
왼손은 옥으로 만든 듯 부드럽게,
따앙.
맑은소리와 함께 광풍수가 그어놓은 먹구름과 뱀 떼가 안개처럼 스러지고,
오른손은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찌릉.
쇳소리를 울리며 오른쪽에 떨어진 돌무더기를 무찔렀다.
하지만, 박살이 나야 할 돌무더기는 멀쩡한 채.
“이게 개방의 신비라는 유룡개? 확실히 재주는 있어 보인다만. 웅황탄만으로는 고독을 막을 수 없는데. 이게 무슨 얘기일꼬?”
낯선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침착하고 중후한 목소리.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
“허어, 벌써 와 있었소? 이거, 재미난 장난감이나 챙겨주려고 했더니. 다른 두 분은 어디에… 어흠.”
일월표객을 뒤쫓아 환혹의 술법을 펼친 조 대부의 목소리도 사방에서 웅웅거리고,
어정쩡한 헛기침이 끝나기 전에 낯선 음성이 먼저 웃음을 흘린다.
“허허허, 장난감이라. 재미는 있겠구려. 아미타불.”
마지막에 붙는 불호.
중이란 말인가.
오소민이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잔뜩 웅크린 이소천, 앞으로 고꾸라진 전천도. 돌무더기를 앞에 두고 왼손의 옥판장(玉板掌)으로 정화환경(靜和環境)을 펼쳤기에 사람을 놀라게 했던 먹구름과 뱀 떼의 환혹을 전부 소멸시켰으나.
뒤에서 날아든 암습에 속절없이 당했다. 오른손의 철적수(鐵笛手)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고.
주위는 첩첩이 쌓인 돌무더기들뿐. 수십 개의 돌무더기에 갇힌 꼴이요, 상대의 위치도 모르는 판.
뭔지 모를 술법은 아직 풀리지 않았으며, 뒤를 쫓던 회의인 말고 또 다른 적이 나타난 상황이다.
철적수를 내쳤던 오른손을 빠르게 품으로 넣었다.
“불호? 내시들이 만든 밀각에 중도 있느냐?”
일단 목청을 높여 말을 건 것은 틈을 찾으려는 의도. 과연 반응이 바로 나온다.
“오호라, 밀각을 아는구나. 개방이 가장 눈엣가시라는 걸 이제야 이해하겠네. 허허, 조 대부의 말대로 재밌는 장난감이 되겠소이다. 그래서 만날 곳을 화청궁으로 바꾼 거요?”
수양 깊은 스님처럼 차분한 목소리가 여유 있게 질문을 넘기자,
“바꾸기는? 좌우(左右)가 서로 만나는 건 언제나 옛 도읍. 굳이 동도(東都)를 고집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자연스레 중원(中原)을 아우르고자.”
조 대부는 조금 당황한 듯.
누가 윗자리인지는 대강 눈치 채겠는데, 대화의 내용은 영 수상하다.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동도면 낙양? 여기 장안은 서도(西都)나 서경(西京)이었으니까, 이게 뭔 소리…… 윽.”
잔뜩 궁금한 시늉을 하며 품 안에서 보패인 하화(荷花)를 꺼낼 셈이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별안간 몸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한기가 치밀어 오르니.
중독?
오소민이 신음을 토하면서 인상을 썼다.
말도 되지 않는다. 옥판장과 철적수를 쓰면서 이미 사실보허의 비법을 운용했고, 그 바탕은 자신만의 항룡진결(降龍眞訣). 아무런 기미도 없이 독기가 침습할 수 없거늘.
“옳지, 옳지. 음침지독(陰沈至毒)이 이제야 전해졌구나.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나. 그러고 보니 조 대부가 가져간 고독은, 흠, 웅황탄이라고 했지요?”
차분한 음성이 다시 조 대부를 달래듯 캐묻는다. 틈을 보기 위해 말을 건 건 오소민이 아니라 이 중이었던가.
오소민이 억지로 하화를 꺼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비겁한 놈잇!”
고통 때문에 외칠 힘도 풀려나간다.
그런데 하화를 쥔 오소민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짝, 짝.
손뼉 치는 소리.
박자도 제대로 맞지 않건만, 귀에는 천둥처럼 울리고.
이소천과 전천도도 그 소리에 깨어난 것처럼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주위를 꽉 에워쌌던 무수한 돌무더기가 물거품처럼 꺼지는 걸 깨닫기 전에,
“오 형!”
천둥보다 더 큰 해원기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도리어 맥이 풀리는 건 왜일까. 쓴웃음을 지으며 비틀거리는 오소민의 어깨를 해원기의 든든한 손이 힘주어 받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