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83화 (183/410)

제46장 좌우봉원(左右逢原) (3)

해원기가 오른손을 내민 채 인상을 굳혔다.

시야에 들어온 단 대부의 해괴한 행동.

마치 참았던 소변을 시원하게 볼 때처럼 전신을 떨어댄다.

그러나 저 불쾌한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공중에서 검왕법신으로 맞아본 상대의 발차기. 다리가 구렁이처럼 길어지는 것보다 그 안에 검경(劍勁)이 담겼다는 게 중요하다.

모를 수가 없다.

바로 직전에 해원기 자신이 내리친 복룡과 붕악의 성질이었으니까.

그때도 저렇게 흉측한 진저리를 쳤었다.

“영사태화란 이름이 그런 뜻이었군.”

전해진 힘을 밖으로 흘려내는 사력만이 아니라, 그중 일부를 자신의 공력에 더해 발출하는 차력(借力)까지.

영험한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이름대로. 대성의 경지에 이른 단 대부는 완연사력과 태화차력을 능란하게 구사한다.

박대정심을 목표로 비전의 무공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노력했던 해원기이기에,

이렇게 싸움 중에서도 그 특징을 짚어낼 수 있었다.

진저리를 마친 단 대부의 귀에도 그 혼잣말이 들린 듯,

“영사태화를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과연 아무것도 없는 양손을 검으로 쓰는구나. 네놈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

면사 위의 눈이 살짝 웃는다.

진양문을 무너뜨리고 문루를 주저앉히는 대단한 검이라도 흘려버리면 그만. 게다가 그 검력을 빌려 반격하는 데도 쓸 수 있으니.

자신감이 더해진 오만한 성격이 해원기를 아예 눈 아래 두는데.

해원기가 숨을 들이마시며 내밀었던 오른손을 가슴으로 당겼다.

입은 단정하게 물리고 두 눈은 반쯤 감기고.

삼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단 대부를 무시하는 건 오히려 해원기려나.

그러나 해원기가 입을 다물자 차분한 기운이 퍼지고,

두 눈을 반개하자 성벽 위가 정적에 잠겨 드는 듯하다.

그런 기미를 느끼는지, 단 대부가 또 물뱀처럼 꿈틀거리며 손을 휘둘렀다.

촤르르르.

검은 채찍이 미친 듯이 떨어대며 날아든다.

방울뱀이 우는 소리를 토하는 채찍이 단번에 무수한 그림자로 바뀌었다.

과연 해원기가 펼쳤던 섬전의 힘을 품은 채.

이소천이 청허심법에서 현일신행의 경공을 발현하듯이.

심오한 비전일수록 구결 속에 다양한 묘용을 품는 법.

영사태화의 비전을 그저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신법으로만 쓰는 건 가장 단순한 수단이다.

단 대부라는 자는 완연사력과 태화차력을 구사하면서 또 뱀과 같은 채찍까지 운용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소위 영사편법(靈蛇鞭法)이라는 채찍의 움직임만으로도 고수라 불릴 수준.

거기에 섬전의 검력까지 더해졌으니 가공할 속도로 진동하는 채찍이 공간을 뒤덮어 해원기의 전신을 발기발기 찢으려 한다.

기껏해야 삼 장의 거리.

채찍 그림자가 검은 구름처럼 덮어가는 순간,

해원기가 가슴에 붙였던 손을 가만히 밀어냈다.

곧게 붙은 다섯 손가락. 소림사 승려들이 취한다는 반장례(半掌禮)와 닮았는데.

그런 차분한 동작을 시작하자마자,

“단 대부!”

뾰족한 고함과 함께 무지막지한 힘줄기가 밀려들었다.

쾅!

낡은 성벽이 폭발하며 돌가루가 뽀얗게 일고,

시커먼 가루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가운데,

“이, 이게…… 윽.”

단 대부의 큰 체구가 비칠거리며 무너진 지붕 위로 밀려나는 모습.

그 앞에는 어느새 끼어들었는지 이 대부가 두 손을 내민 채 머리를 흔든다.

전립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니 전립과 함께 머리털마저 사라졌는지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몸에 걸친 회의 장포는 폭풍을 맞은 것처럼 펄럭인다.

“경솔하게 상대의 계역(界域)에 들면 안 되오.”

예의 책을 읽는 듯 무감정한 말투지만, 이번에는 단 대부를 질책하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단 대부는 그 말을 들을 정신조차 없어서 손을 떨다가 급하게 가슴을 더듬는다.

“영사편(靈蛇鞭)이, 컥, 왜, 왜 내가…….”

채찍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숨이 턱 막히는 내상을 입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대부가 미리 나서지 않았다면 내상이 아니라 심맥이 완전히 끊겼을 거다.

뭐에 당했는지, 아니, 왜 자신의 영사태화가 반응하지 않았을까.

일 장이나 밀려난 해원기가 반개했던 눈을 치뜨고 이 대부의 쌍장을 응시했다.

단 대부와 마찬가지로 검은 장갑을 끼었던 두 손.

해원기가 적멸검을 구현해 휘두른 무량대적(無量大寂)을 막아내면서 장갑이 터져나가 영사편처럼 가루가 되어버렸다.

무량대적은 지극한 결계검. 영사태화가 아무리 사력과 차력을 구사해도 내부를 일거에 파괴하는 무량대적에는 소용이 없다.

그런 결계를 힘으로 밀어내 단 대부를 구해낸 건 바로 이 대부의 하얀 두 손.

막대한 장력이 결계조차 뒤집어버렸다.

한 오라기의 머리털도 없는 동그란 민머리, 면사가 날아간 얼굴은 이목구비가 수려한 청년이고.

무지막지한 힘을 토해낸 두 손바닥에선 하얀 광채가 사그라진다.

비슷한 나이일까.

이 대부가 손을 천천히 오므리며 턱짓을 했다.

“수미전단검이겠지. 중악의 검이 결계를 이루는 경지인지는 몰랐으나. 흠, 오악검법과 절세오검을 다 구사한다? 확실히 화 숙인에게 자세히 들어볼 걸 그랬구나.”

적멸검에서 불가의 기운을 느꼈다는 뜻.

해원기를 훑는 시선에도 빛이 번쩍인다.

반장례를 취했던 손을 푸는 해원기 역시 이 대부를 똑바로 보면서,

“결계를 무시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장력이라면, 제왕군림신공(帝王君臨神功) 밖에 없겠지. 불완전하지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속가제일(俗家第一)의 위력이라는 제왕군림신공. 구결은 완성되었지만, 완벽에 가깝게 연성한 이는 오직 하나. 그도 이십여 년 전에 죽었고, 구결은 다시 흩어졌다고 들었다.

눈앞의 이 민머리 청년은 어디서 익혔는가.

더구나 영사태화의 비전에 제왕군림신공이라니. 그렇다면 일월표객을 뒤쫓는 조 대부란 자도 엄청난 실력을 지녔을 터. 이소천과 전천도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에 끊긴 해원기의 말이 거슬렸을까.

이 대부의 눈에서 강한 빛이 뿜었다.

“불완전? 네놈이 어찌…….”

불쑥 나오려던 반문을 억지로 삼키는 기색.

해원기가 좁혔던 미간을 풀었다. 과연 이 대부라는 자는 완전하지 않은 제왕군림신공을 익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결계를 파괴하는 무지막지한 장력을 펼치지만.

이 대부가 자신의 실언을 의식하고서 얼른 말을 바꾼다.

“조금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구나. 내가 짐작한 게 맞는다면 네놈은 그저 검만 알아야 하는데. 무경박사에 버금갈 정도의 안목이라. 흐음.”

용모가 드러나도 말투는 그대로.

무표정하게 상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데.

이번엔 해원기가 흥미를 느꼈다.

숙인이니 대부니 하는 칭호보다 이자들이 대체 무얼 알고, 무얼 하려는 건지.

“짐작한 게 뭔지 궁금하군.”

일부러 턱을 내밀며 말을 받아주자, 이 대부의 입매가 슬쩍 뒤틀렸다.

자존심이 상한 듯 내뱉는 말이 빨라지고,

“백년고독(百年孤獨)의 영세검주(永世劍主)는 애들 장난이겠지만, 그래도 주인 주(主)에서 점 하나 떼고 왕(王)이라 떠드는 건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고 믿었거든.”

무슨 소리인가 따질 겨를이 없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 대부의 주먹이 맹렬히 뻗었다.

무량대적을 무지막지한 장력으로 막아낸 탓에 낡은 성벽이 크게 함몰되었다.

진양문은 절반이 무너져 문루 지붕만 걸친 상태.

이 대부와 해원기 중간의 성벽은 아예 끊겼고, 서로 간의 거리도 십 장 가까이 벌어졌으나.

이 대부의 주먹이 그 거리를 그냥 뛰어넘어 해원기를 때린다.

어느 무공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권장(拳掌)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중심을 든든히 받쳐야만 한다.

이 대부가 선 곳은 문루 지방이 아슬아슬하게 얹힌 성벽 조각 위. 두 발을 넉넉히 벌리기도 어려운 좁은 면적인데도.

권력(拳力)이 해원기 바로 앞에서 내친 것처럼 찍어 든다. 도장 치듯이.

해원기가 풀었던 미간을 다시 조이며 두 발을 겅중거렸다.

휘링.

신형이 유령처럼 흔들려 이 대부의 주먹을 피하면서 공간에 은은한 오색 빛이 비단처럼 펼쳐진다.

병기를 익히는 자가 강기를 목표로 삼듯, 권장을 익힌 자가 응기성강에 이르면 나타나는 인흔(印痕).

이 대부의 주먹은 이미 권인(拳印)의 경지라 십 장의 거리는 지척과 다름없다.

해원기가 대응을 바꾸었다.

검왕수를 쳐내도 영사태화로 받아냈던 단 대부보다 한층 강한 자다.

보병청강의 수정지력을 끌어올려 검왕법신을 강화하면서 부신수형(附身隨形)의 신법까지 펼쳤다.

권인이 찍으러 들 때마다 몸이 슬쩍슬쩍 피해 나간다.

이 대부가 해원기의 기고한 신법에 눈썹을 곧추세우며 곧장 두 손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주먹이었다가 손바닥이었다가, 때렸다가 누르고, 당기면서 할퀸다.

두두두두.

권장지조가 전부 인흔을 이루며 강기가 야생의 말 떼처럼 덮쳐들자,

해원기의 두 손도 상하좌우를 거침없이 베기 시작했다.

재단경위.

한 자루 검을 뽑아 찌르는 발검제형에서 검이 두 자루가 되면 수직과 수평을 가르며 교차한다. 당연히 변식이 있어서 두 자루가 전부 수직이 되면 만검천인, 전부 수평이 되면 신마공무.

그러나 운대봉에서 결계로 교직해 명도흑염과 마주치면서 숨겨진 오의가 드러났었다.

무섭게 덮쳐드는 인흔의 강기를 의식하지 않고, 만검천인과 신마공무의 변식도 따지지 않으면서.

유리와 추상의 검상이 은현(隱現)의 검망을 촘촘히 짠다.

펑, 펑, 펑, 펑.

상하좌우에서 동시에 터지는 폭음. 이 대부의 손은 더욱 빠르고 더욱 강해져서 방금 전의 무지막지한 장력을 이미 넘었고,

부신수형의 신법에도 해원기가 좁은 성벽을 타고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았다는 느낌에 이 대부가 두 손을 휘감아 한꺼번에 떨쳐내자,

고오오오.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막대한 강기가 쏟아진다.

부서진 성벽의 바윗돌까지 날리는 어마어마한 위력에 대낮의 햇볕조차 무색한 백광(白光).

검망이든 뭐든 성벽 째로 짓이길 셈.

시야를 가리는 백광 속에서 해원기가 흉내 내듯 두 손을 밀어내는 게 언뜻 보인다.

쾅!

절반만 남았던 진양문이 기어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성벽의 돌덩이가 공기 놀리듯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와중에 멀쩡한 왼쪽 성벽으로 날아 내린 둘.

내상을 추스르던 단 대부와 그를 끌고 몸을 날린 이 대부다.

“옥새사인(玉璽死印)이 깨졌다?”

당혹이 지나쳐서인지 무표정한 얼굴도, 책을 읽는 것 같던 말투도 다 변했다.

단 대부가 내상을 입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

승기를 잡았다고 여겨 제왕군림신공을 겹겹이 쌓은 옥새사인을 펼쳤건만, 무참하게 깨진 건 둘째 치고 해원기가 자신과 비슷한 동작을 취했다는 걸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다지 대단치 않던 검망.

제왕군림신공의 인흔 강기를 견디지 못하고 밀리지 않았었나.

그런 검망이 어떻게 옥새사인을 깨는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더구나 마지막에 해원기가 두 손을 밀어내는 순간, 옥새사인의 어마어마한 위력이 제어를 벗어나 확산되는 느낌이 들다니.

토대가 무너지면 층층이 쌓을 수 없다. 자신의 신공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졌던 이 대부로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

해원기가 그 꼬락서니를 보면서 풍뢰의 힘까지 신왕공에 덧붙였다.

단 대부에게 내상을 입혔고, 이 대부의 옥새사인을 깼지만, 이제는 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한다.

재단경위의 오의는 이른바 저사직금(杼梭織錦). 상대의 힘은 베틀로 퍼지고, 내 힘은 북을 따라 모인다. 옥새사인이 아무리 막강한 강기라도 베틀에 머무는 이상, 한 폭 비단을 짜내는 날실과 씨실보다 못한 법.

발검제형이 점(點)이라면, 재단경위는 선(線)이랄까.

그러나 검왕오형의 오의를 깊이 생각하는 건 나중 일이다. 눈앞에 있는 밀각의 인물을 제압해야 품었던 의문의 답을 얻을 터.

검상을 군림검으로 바꾸어 둘을 동시에 칠 생각인데.

퍼펑!

화약을 터뜨린 듯한 소음보다.

“크윽, 이 비겁한 놈잇!”

고통스럽게 외치는 목소리에 해원기가 도리어 뒤로 몸을 날렸다.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꽤 먼 거리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히 오소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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