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좌우봉원(左右逢原) (2)
세 명의 회의인.
하나는 체구가 크고, 하나는 키가 작고, 하나는 평범하다.
사람을 눈에도 두지 않는 말투를 통해서 해원기는 이들이 소위 밀각이라는 곳에 속한 자들이요, 그 능력이 조화부인에 뒤지지 않음을 직감했다.
오방신수의 명칭을 딴 수하를 거느렸던 여인. 해원기의 조화를 부린다는 풍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즉각 조화부인이란 이름을 댔지만,
그녀는 본디 화숙인으로 불리는 듯.
고관대작의 부인을 일컫는 외명부(外命婦)의 직함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부인(夫人)은 이품(二品) 이상. 숙인은 삼품(三品)에 해당한다고 들었다.
진짜일 리 없겠으나 그것만으로도 높은 품계.
그런데 그런 그녀를 ‘쌤통’이라고 조롱하는 회의인들이다. 그럴 위치라는 뜻.
체구가 큰 자는 영사태화를 대성했고, 키가 작은 자는 공극조감을 언급했으며, 평범한 자는 일월표객을 금방 알아보면서 환혹미리진이 풀렸다고 했다.
영사태화, 공극조감, 환혹미리진. 전부 희귀한 공부들인데.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기척도 알기 어려웠다.
모습을 감춘 채 문루 아래의 전천도에게 환혹미리진을 베풀어 농락했고, 그 진세에서 벗어나려고 전천도는 광풍수를 썼을 터.
조화부인과 비슷하거나 그 위의 능력을 지닌 자. 셋이나 된다.
망선교를 넘은 이소천이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주려고 해원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내가 해원기다. 너희는 밀각에서 나왔느냐?”
일부러 공력을 실은 음성.
회의인들의 드러난 눈매가 일시에 일그러지고,
키 작은 회의인이 지붕 위에서 몸을 일으킨다.
“너희? 이 젊은 놈이 무례하기 짝이 없네. 어디서 누구에게 배워먹었기에…….”
대뜸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데.
“내 사부님께선 얼굴 가린 자를 믿지 말라고 하셨거든. 더구나 똑같은 차림새라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는구나.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대는 게 어떻겠냐?”
거침없이 받아치는 해원기.
체구가 큰 회의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건방이 하늘을 찌르잖아. 과연 화숙인이 어물어물 넘어갈 만하구나. 그러지 않아도 그 내막이 궁금하던 판에.”
웃음을 그치며 고개를 돌리더니,
“이(李) 대부(大夫), 이건 저쪽에서 찾아온 거니까 손을 써도 괜찮겠지?”
왼쪽 담장 위에 선 회의인에게 묻는다.
평범한 체구에 딱딱한 말투를 쓰던 회의인이 머리만 까딱거리는 건 허가의 뜻일까.
키 작은 회의인이 급하게 양손을 흔들었다.
“아니, 우리가 받은 명령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고. 에, 그리고 왜 단(段) 대부에게만.”
뭔가 억울하다는 표현에 이 대부라고 불린 회의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曹) 대부는 일월표객이나 잡으시오.”
냉정하게 말을 끊어버린다.
어깨가 축 늘어지는 조 대부란 자. 허가를 받았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해원기를 향하는 단 대부란 자.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해원기는 물론이요, 문루의 안팎에 선 이소천과 전천도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으니.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다.
그런 수작을 보면서도 해원기는 덤덤한 표정 그대로.
단 대부라는 회의인이 앞으로 나서자 왼손을 들어 뺨을 긁으면서,
“이렇게 성이라도 대는 거로 봐줄까나. 한데 숙인 다음엔 대부라니 어떻게 된 노릇인지. 쯧.”
혀를 찼다.
이름을 대라고 했었다. 그랬더니 저희끼리 이런 같잖은 대화나 나누고.
화숙인이 부인을 칭했다고 비웃더니 저희는 ‘대부’란다.
성이야 어쨌든 품계가 높은 문관(文官)에게 붙는 칭호거늘.
어처구니가 없다는 뜻이 역력한 표현이다.
답답할 정도로 예의를 차려서 ‘고구마 대장’이란 별명까지 얻은 해원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정중한 만남이 되길 원해서일 뿐.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자들에겐 전혀 그 체면을 봐주지 않는다.
배우지 못해 무지한이라면 몰라도, 그저 자신의 강함만 믿고 약자를 능멸하려 든다면,
사람이 변한 것처럼 사나워진다.
뺨을 긁던 손으로 회의인 셋을 차례로 가리켰다.
“살찐 구렁이하고 거울 갖고 노는 원숭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독 오른 벌레. 잘 되었다. 금장호위 대신에 너희에게 답을 구해야겠구나.”
단 대부는 살찐 구렁이, 조 대부는 원숭이, 이 대부는 독 오른 벌레.
아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고.
가리켰던 왼손이 그 셋을 한꺼번에 휘어잡듯 원을 그리며 오른손을 허리 뒤까지 잡아당긴다.
휘이이이.
문루 위에 돌연 기이한 바람이 일었다.
싸움에 능하다.
사부를 상대했던 수많은 자가 그렇게 느꼈단다.
그러기 위해선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까지 전부 인지해서 주도권을 쥐어야만 한다.
[이 국주, 아우님은 이 안쪽에. 환혹진이란 게 포설된 듯, 바로 물러나시오.]
회의인들이 같잖은 대화를 나눌 때, 짬을 내서 이미 그렇게 전음을 보냈다.
처음 보는 전천도에게 해원기는 낯선 사람. 이소천을 통해야 뜻이 전해진다.
환혹미리진이 어떤 진세인지는 모르지만, 전천도가 광풍수를 써서 풀고 나서도 상당히 지친 모습을 보였으니.
아예 이 문루 주변을 부수는 게 좋다.
이소천도 기민하게 해원기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곳은 화청궁의 정문인 진양문(津陽門). 북쪽과 서쪽은 산세가 험해집니다. 동쪽 망경문(望京門)으로 향하겠습니다.]
가야 할 방향을 바로 일러준다.
퇴락한 문루와 무너진 성장(城牆), 그래도 한때 황제가 향락에 취했던 행궁. 지리가 상당히 복잡해서 길을 잃기 쉽고, 어느 곳에 또 적도가 숨어있을지 모른다.
지리에 어두운 해원기를 위해 짧은 전음 속에서 지명을 일일이 들춘 이유.
해원기도 자신들과 함께 물러나는 줄 알고 있지만, 그 대답으로 족하다.
해원기가 오른손을 곧장 찔러 넣었다.
위잉.
장대한 검기가 단 대부와 문루의 지붕까지 한꺼번에 꿰뚫으려 쏟아졌다.
그러나 단 대부는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오른손 하나만을 내밀고,
번들거리는 장갑부터 전신이 꿈틀거린다.
이미 한 차례 해원기의 매서운 검기를 막아낸 자신감, 영사태화의 수법으로 능히 뿌리칠 수 있다.
과연 장대한 발검제형이 맥없이 빗겨 나가려 하는데.
그보다 먼저 해원기가 찔러 넣었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드륵.
“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검형. 장갑 낀 손이 헛손질이 되어버린 단 대부보다,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조 대부가 의아한 소리를 흘렸다.
그가 딛고 선 지붕의 기왓장이 갑자기 흔들리고, 흙먼지가 마구 날리니까.
무엇 때문인지 깨닫기 전에,
해원기는 끌어당겼던 손을 더욱 빠르게 무찔렀다.
검상은 처음부터 유리. 투명해서 눈에 보이지 않을 유리검이,
키이이잉.
귀를 찌르는 소음과 함께,
마치 외곽만 가늘게 그린 듯 형태를 보이는 건,
공간이 검으로 빨려들기 때문이다.
숨겨진 오의가 발현된 발검제형의 수발자재.
“으음.”
단 대부가 목을 울리며 급히 양손을 다 들었다.
분명히 찔러오던 검세를 풀어냈건만, 그 검세가 불현듯 다시 덮쳐오고,
두 배는 강해졌다.
장갑 낀 양손이 기괴하게 꼬여 은은한 검극을 움켜잡고서.
팔과 어깨, 목덜미에서 어깨를 거쳐 허리까지 꿈틀거리는 몸은 사람 같지 않은데.
쿵.
단 대부가 디딘 바닥이 풀썩 가라앉고,
퍼퍽.
문루 지붕의 기둥이 절반이나 부러진다.
“어잇.”
지붕이 홱 기우는 바람에 조 대부가 훌쩍 이 대부의 뒤로 몸을 날렸다.
드드드.
이 장 높이의 문루. 오랜 세월을 능히 버틴 행궁의 정문이 갑자기 삭아버린 것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단 대부가 슬쩍 몸을 떨더니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휘리리리.
큰 체구가 요사스럽게 꿈틀꿈틀, 두 팔이 채찍으로 변한 것처럼 해원기를 감으려 한다.
문루가 허물어질 정도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 엄청나게 기민한 반응이다.
하지만,
해원기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단 대부가 이르기 전에 이미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고,
두 손을 번갈아 아래로 내리쳤다.
오른손의 유리검은 단 대부를 흉내 내듯 꿈틀거리지만, 그건 뱀이 아니라 용. 허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복룡검식 사이로,
왼손이 서슬 퍼런 추상검을 불러내 망치로 내려치는 것처럼 붕악을 떨쳐낸다.
채찍이 된 단 대부의 두 팔과 해원기의 두 가지 검상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펑, 펑.
진저리치는 단 대부를 따라 울리는 폭음.
장갑 낀 두 손을 때렸건만, 단 대부 뒤쪽의 문루가 거듭 비명을 지르며 부서져 내린다.
그래도 단 대부의 신형은 공중에서 빙글 돌아가며 다리가 해원기를 향하더니,
마치 누가 잡아당긴 것처럼 몇 자나 늘어났다.
발검제형이든 복룡검식과 붕악의 연격이든.
문루만이 파괴될 뿐, 단 대부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서 다가드니.
참으로 기괴한 광경.
누구든 이 상식 밖의 반격에는 기함하고 손이 어지러워질 터.
다리가 늘어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해원기는 처음부터 단 대부의 공격을 한 번은 맞아줄 생각이었다.
영사태화를 대성해 완연사력을 쓰는 자.
뱀처럼 꿈틀거리는 전신은 어떤 힘이라도 체외로 흘려버린다.
수발자재의 발검제형을 바닥과 기둥으로, 복룡과 붕악을 등 뒤의 성문에다 흘리고선 거침없이 다가드는 능력.
채찍 같던 두 팔 대신에 한쪽 다리가 구렁이처럼 늘어나 가슴팍을 때려온다.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의 두 손을 가슴 앞에 교차하면서 검왕수의 기운을 전신에 유포했다.
쩡!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
해원기가 크게 공중제비를 넘어 성벽 위에 내려섰고,
단 대부 역시 몸을 흔들며 무너진 지붕 한쪽에 발을 걸쳤다.
진양문의 오른쪽은 완전히 주저앉아서 문루의 지붕이 간신히 담장에 얹힌 상태. 성문 위에 세우는 누각이 사라진 판이라 건너편의 이 대부가 훤히 보이는데.
조 대부는 어디로 갔나.
해원기가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잠깐 옮기자,
“흐흥,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있을까?”
단 대부가 대뜸 조소를 던지며 달려든다.
해원기의 공격은 전부 흘렸고, 비록 자신의 발차기가 쇳덩이를 찬 것 같지만, 능히 밀어붙일 자신이 생겼다.
둘이 격돌하는 순간을 틈타 성벽을 끼고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이소천과 전천도. 그들을 잡으려고 움직인 조 대부가 해원기를 한눈팔게 한 건,
좋은 기회.
큰 체구가 바닥을 미끄러지면서 소매에서 검은 선이 벼락같이 뻗었다.
채찍 같던 팔에서 튀어나온 진짜 채찍.
모양이 어떤지 알아보기도 전에 이미 해원기의 눈앞에 혀를 날름거린다.
이 급습에는 해원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체를 급격하게 눕히며 손이 빠르게 치솟았다.
달려드는 뱀을 본능적으로 쳐내려는 동작이지만, 그 손은 절세오검 중에서 가장 빠른 섬전.
파파파파파.
눈 깜빡할 새에 해원기의 얼굴 바로 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촤아아.
검은 채찍이 멀쩡하게 소매 속으로 빨려들고, 단 대부는 또 기묘한 진저리를 치고.
검왕수의 섬전으로 쳐냈건만,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끊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