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80화 (181/410)

제45장 일행천리(日行千里) (4)

오소민이 바로 말을 이었다.

“명옥선공이든 영사태화든 어차피 음유에 속하니까. 체질이 맞지 않으면 본래의 능력을 보이기 어렵겠지. 대성하지 못한 채로 그리 거들먹거리는 건 우스운데.”

해원기가 미간을 좁혔다.

오소민의 말처럼 쉬운 상대라곤 하기 어렵다. 해원기가 본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산동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었을지.

“체질이라. 자네, 빈모자화를 잊었나?”

문득 떠오른 기억.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오소민이 탁자를 탁, 쳤다.

“맞아. 강제로 여자를 만든다는 그 해괴한 약을 썼었지. 환관놈들이라 성별을 제멋대로 정해서, 흥, 음양의 도리도 막 뒤집었다? 쳇, 선공이 아니라 사공(邪功)이 되었구먼.”

비천무영 황정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약.

위 소감과 첩형은 환관이며, 환관이란 본디 불남불녀(不男不女)다.

해원기가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오소민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영리한 친구.

몰라서 자꾸 물어본 게 아니었다.

말이 길어질 듯싶으니까 일부러 해원기와 대화를 주고받아 서투른 설명을 미리 줄여준 것.

개방의 뿌리인 팔선의 제자가 어찌 무학의 이치에 어둡겠나.

음양의 도리니, 선공이 사공이 되었다느니 하는 말은 오히려 좌중의 이해를 돕는 말이다.

언제나 해원기를 위해준다.

좌장 격인 마린이 화제를 이어받았다.

“대강 밀각의 윤곽이 그려집니다. 이 국주 형제분 덕에 귀중한 정보를 얻었군요. 그런데 이들이 무슨 이유로, 또 어떻게 화산을 범했는지. 간단히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해 대협, 운대봉에서 알아내신 걸 말해주시지요.”

중간에 이소천이 들어오면서 밀각이 화제가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 사태의 배경이다.

금장호위를 사로잡았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냈겠으나. 운대봉을 덮은 독은 금장호위의 입까지 봉해버렸다.

중독된 시체가 널린 운대봉. 해원기가 그 광경이 떠올라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참으로 악독한 자들. 흠, 우선 장풍보가 화산을 침범한 이유입니다. 그들은 진자현이 도둑질한 물건을 마 장문인이 취한 것으로 여긴 듯하더군요. 위 방주와 제가 있는 것이 그런 의심을 더욱 믿게 했고. 어떻게 장풍보를 사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장철기에 속했던 자인데.”

아홉 개의 오리 알.

금오혈석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고, 이는 또다시 산동에서 벌어졌던 겁표 사건과 이어진다.

그중의 하나를 품에 지닌 해원기로선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듣고만 있던 위욱경이 혀를 찼다.

“쯧, 엄한 사람까지 엮었지. 동창의 앞잡이들이 꽤 많았나 보네. 이 하찮은 내시들이 아예 나라를 말아먹을 셈일까.”

혼잣말처럼 불만을 표하는데.

그 안에 어느 정도 답이 담겼다.

해원기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다음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자들. 이 국주의 말씀대로 밀각의 인물로 보입니다만. 북봉으로 오던 중에 희 소협이 우연히 목격한 세 명. 그리고 운대봉 위에는 모두 세 가지의 암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위욱경이 입을 연 김에 바로 말을 받는다.

“하나는 독.”

마린이 무거운 얼굴로 뒤를 잇고,

“고독까지 있었습니다.”

청령선고는 낡은 사당이 폭발하기 전의 흑염을 기억해냈다.

“갑자기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지요.”

그렇게 세 가지.

그러나 해원기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독과 고독, 그리고 명도흑염을 불러낸 물건. 공극의 조감이라고 하던 거울입니다. 참으로 기괴한 술법이더군요.”

해원기는 독과 고독을 하나로 쳤던 것.

어떻든 어느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옥녀동 안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고, 오소민이 뺨을 문지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공극의 조감이라는 거울을 빼고 나머지에 관해서는 사전에 얘기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으니. 전부 해원기와 연관되는 얘기들.

지나온 일들을 간략히 정리하는 역할을 해원기에게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오소민이 간명하게 지나온 사정을 풀어놓자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명도흑염은 명부도. 이전에 조화부인이란 자는 곤혹도를 썼었다고. 오대마도가 다시 출현한 것은 지극히 엄중한 사태이며.

해원기가 이전에 겪은 독과 마린이 이번에 곤욕을 치렀던 고독 역시 곤혹스러운 문제.

저절로 ‘지부’와 ‘벽세’라는 단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백 년이 넘도록 세상을 어지럽혔던 사마가 사라진 게 채 이십 년도 되지 않거늘.

사마의 힘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 난세를 겪었던 이들로선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게 당연한 일.

침묵을 깬 것은 해원기의 음성이었다.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요.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자책도 저에게는 과분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과거의 망령이 다시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그가 누구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설사 황궁이라도.”

차분한 말투지만.

옥녀동의 무거운 분위기가 걷히는 듯.

이소천이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생각지도 않은 걱정거리가 생겼나 싶더니, 뜻밖에 가슴이 후련해지는구먼. 세속의 권세가 뭐 그리 대단할까? 우리에겐 검왕이 있잖소이까. 으하하.”

덥수룩한 수염을 떨어가며 호기를 부리는 모습에,

굳었던 표정들이 풀려나간다.

오소민이 팔꿈치로 슬쩍 해원기를 찔렀다.

“대담한 발언이시구먼. 그러다 황제가 배후면 어쩌려고?”

동창을 염두에 두고 황궁을 거론한 것을, 슬쩍 황제를 끄집어내 놀려대는데.

해원기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든.”

단호한 결심이었나.

그래도 얼굴은 평소의 어리숙한 표정 그대로여서.

이소천은 더욱 흥이 나는지 탁자까지 가볍게 치며 웃어젖힌다.

이 더벅머리 청년이 은공의 후대란 게 비로소 실감 난다.

이소천의 웃음이 시끄러웠나.

청령선고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거 서둘러 사부님께 알려드려야 할 얘기고. 노신도 골치 좀 썩혀야겠는걸. 도문에 출가한 몸이요, 속가의 성이 나 씨라고 해봤자 핑계 밖에 안 되니. 독에 관해서는 내가 당가와 연락을 취해볼게요.”

문제를 정리했으면 해결할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법.

독이라면 역시 사천당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청령선고가 먼저 나서자 위욱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심인고도 무시할 수는 없죠. 소림과 무당 쪽은 제가 알리면 되는데. 노진인께서 혹시 맹주에게도 알리실까?”

노진인은 영락검선을 가리키는 호칭.

오대마도와 독이 함께 출현한 사안이니 당연히 웃어른의 결정이 필요할 것이라는 위욱경의 말에.

마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일단 악장(岳丈) 어르신께 아뢰고 두 분이 상의하셔야 하지 않겠소?”

조심스러운 제안.

지금까지 위욱경이 계속 외면하는 바람에 한 번도 말을 나누지 않았었다. 그래도 중요한 일에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을 언급한 건데.

“흥! 내가 알아서 하니까 상관하지 말아요.”

위욱경이 코웃음을 치며 야멸치게 얼굴을 돌려버린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난감한 장면.

더구나 공손무원이 죽은 걸 아는 이들로선 어색하기 이를 데 없고.

마린은 어정쩡하게 수염만 쓰다듬으니.

그런데.

“탁 소숙께 알리는 일은 잠시 미루어주십시오. 일단 제가 금오혈석에 관해 확실한 의미를 파악한 후에 직접 찾아뵈려고 합니다. 그리고.”

해원기가 모른 척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따로 장풍보에 가봐야겠습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설 듯.

공손무원의 죽음을 감추는 것도 고역이고, 부부간의 미묘한 감정에 끼어들 수도 없다.

이미 웬만한 얘기는 다 끝난 셈이라 차라리 해야 할 일을 서두르는 게 낫다는 마음.

마린이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갑자기 그러시면. 전혀 쉬지도 못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얘기에 열중하느라 때가 지났는지 몰랐군요. 속히 식사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이면서 지주로서의 도리조차 하지 못했으니.

급히 옥녀동 밖의 제자를 부르려는데.

“장문인!”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드는 인물.

황망하게 마린을 찾는 이는 화산파의 기율을 챙기는 수진원의 풍엽도장이었다.

꼼짝없이 포위되었던 화산파 제자들.

개방의 도움으로 다시 장문인과 회합했으나, 운대봉은 독기로 뒤덮였고 화산오봉은 기진맥진. 장풍보의 잔당들이 아직 화산 내부에 흩어졌을 수도 있기에.

좌우 장로 중에 단심원주 전욱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보살피고, 풍엽도장은 수진원의 정예 몇을 데리고 산을 순시하였는데.

맨 먼저 간 곳은 화산파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금쇄관.

그런데 풍엽도장이 이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현듯 표창이 날아들었고. 그리고 그 끝에 달린 쪽지 한 장.

누가 보냈는지, 무슨 의미인지 모호하기만 한 전갈이 날아든 셈이지만, 워낙 위급했던 상황을 빠져나온 참이라 보고를 미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쪽지를 해원기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소제(小弟), 부인(夫人)은 고명(誥命)에서 따온 칭호라던데. 웃기는 수작이지만, 그 부인과 동렬(同列)이라는 셋이 훤한 대낮에 달을 잡는다고 설친다네. 여산(驪山)에서 노닐 생각인지. 서두르면 좋은 구경할 걸세.]

고명부인은 외명부(外命婦)의 직위를 이르는 말.

얼토당토않은 내용이 적혀있지만.

굳이 부인을 먼저 들먹인 건 ‘조화부인’을 빗댄 것이고, 같은 계급 셋은 바로 운대봉의 괴변을 일으켰던 밀각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대뜸 동생이라고 부르며 쪽지 아래에는 조그만 봉황 한 마리가 그려졌으니.

봉대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녀가 이렇게 전갈을 보내는 저의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내용에 밀각의 셋이 대낮에 달을 잡는다라면. 더구나 그 위치가 장안 부근의 여산이라면.

해원기가 자신의 생각을 다 말하기도 전에,

“어, 아우는 장안 쪽을 훑어보고 온다고. 벌써 왔을 시각이 지났는데.”

이소천이 당혹스럽게 중얼거리자,

오소민이 기민하게 판단을 내렸다.

“이 전갈의 진위가 의심스럽지만,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문인 두 분과 위 방주께선 화산의 경계를 강화하시고, 중간의 연락은 제가 맡죠.”

마린은 큰 싸움 끝에 고독에 당할 뻔했고,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도와야 만일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다.

더구나 운대봉의 괴변을 주도한 셋이라면 해원기가 나서지 않고서야 상대하기 어려울 터.

해원기와 이소천, 그리고 오소민 셋이 움직여야 한다.

마린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어쩔 수 없는 일.

화산파 전체가 농락당한 느낌이 들고, 또 이소천의 아우를 모른 체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나갈 수도 없다. 장문인이란 그런 자리니까.

“해 대협.”

억지로 나오는 목소리에 해원기가 일부러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두십시오.”

주먹을 맞잡아 예를 차리는 모습이 든든하다.

이소천도 급하게 포권을 취하는데, 오소민은 그저 목례만 보내고서 먼저 몸을 날렸다.

“거지들한테 한마디 하고 뒤를 따름세.”

개방의 장안 분타주와 궁가십걸이 아직 화산에 있으니 여산까지의 연락망을 지시할 셈.

믿음직한 친구의 뒤를 따라,

해원기가 이소천과 함께 옥녀동을 나섰다.

“전력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지리에 어두운 처지. 길 안내를 부탁하는 말에 이소천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로 몸을 날린다.

밀각의 셋이 상대라면 월영객이라도 무사하기 어렵다.

옥녀동 안에서 이제까지 나눈 대화 때문에라도 아우에 대한 걱정이 컸을 터.

그 심정을 이해하는 해원기가 공력을 끌어올렸다.

일행천리표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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