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9화 (180/410)

제45장 일행천리(日行千里) (3)

‘녀석’은 분명 아우인 월영객을 가리키는 말일 터.

이소천이 옥녀동이 울릴 정도의 웃음을 그치더니 표정을 바로 했다.

“그럼 골치 아픈 얘기부터 빨리하지요. 밀각은 동창 내부의 숨겨진 조직인 듯합니다. 소위 대내무림의 진짜 고수들이 모인 곳이랄까요. 그 존재 여부도 지금까지 정확히 알려진 적이 없습니다.”

분위기가 진정되고 좌중의 시선이 모여든다.

‘밀각’이란 말로 잠깐 멈추었던 얘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대내무림의 진짜 고수?”

청령선고가 의심스럽게 중얼거리자,

“뭐, 강호무림에 대해서 만든 명칭이겠지만, 확실히 대내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 모르는 판이라.”

이소천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대내(大內)란 황궁(皇宮)을 가리키는 말이니 대내무림이란 곧 황궁무림이다. 황제가 거처하는 구중심처(九重深處), 무림이라고 할 만한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별세계.

황제와 황족을 경호하는 뛰어난 무인들이 당연히 있겠으나. 누가 그 실상을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의문을 표했던 청령선고뿐 아니라, 마린도, 위욱경도 낯설기만 한 곳이고. 해원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데.

오소민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친군지휘사사(親軍指揮使司)가 금의위로 바뀌고, 또 동창이 설치되면서부터는 새로 지은 그 황궁이 진짜 금역(禁域)과 다름없어졌죠. 그런데 이 국주께선 어떻게 밀각을 알아내셨습니까?”

뭔가를 생각하느라 이마에 주름을 몇 개나 잡고, 혹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말투를 조심하며 묻는다.

따지는 게 아니다.

이소천의 설명 또한 제대로 아는 게 아닌 추측. 그렇다면 추측의 근거가 있을 터. 이소천도 황궁과는 관계가 없는 강호인이잖나.

이소천이 입맛을 다시며 덥수룩한 수염을 긁었다.

“쩝, 그건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지금 자세히 밝히긴 어렵군요. 간단히 말하면 제 아우가 그쪽 일을 많이 접한 덕분에 그나마 귀동냥이라도 했던 거지요. 하여간 근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황궁의 무인들은 강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성취를 이루었다고. 그 배경이 금의위와 동창인 건 틀림없습니다. 그나저나, 허, 과연 개방의 순행장로시구먼.”

오히려 오소민이 황궁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게 놀라운 듯.

가벼운 감탄에도 오소민의 심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거듭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만, 그 귀동냥을 더 들려주시겠습니까? 이번 화산의 변고에는 그 밀각이 배경이면서 동시에 직접 끼어든 듯한 냄새가 납니다.”

황궁의 사정.

월영객이 관부의 인물을 보호하는 일을 많이 맡았다는 건 거짓이 아니겠지만, 그것만으로 동창 내부의 숨겨진 조직까지 알기는 어렵다.

남의 기밀한 사정을 파고드는 실례를 사과하면서까지 상세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이소천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내젓는다.

“실례는 무슨. 어차피 밀각에 관해 말하려던 참이었잖소. 이거, 아우 녀석이 있었다면 더 나았을 것을. 나는 워낙 말이 서툴러서 말이요. 에, 그럼 금의위부터 시작해야 하나?”

걸걸한 음성에 거침없는 말투.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소천이 말을 잇는다.

“창위상의(廠衛相依)인가 뭔가 해서 금의위가 실질적으로 동창의 수족이 된 건 아실 터.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강호의 무림인사들을 은밀히 매수해 주구로 삼았지요. 엄한 사람들을 해치는 데 칼이 더 필요했는지, 아니면 대내에만 있어서 세상 물정에 밝은 앞잡이가 필요했는지는 몰라도.”

“흥, 두 가지 다일걸.”

냉소로 끼어드는 청령선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손에 든 칼이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다는 걸 알아버린 거죠. 황궁 안에서만 살았던 인간들로선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몰랐을 테니까. 서슬 퍼런 금의위, 잘난 척 해대는 강호의 떨거지들만 있으면 제멋대로 설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게 맘대로 될까. 하하하.”

이번에는 비웃는 웃음.

시정의 이야기꾼들처럼 화법이 독특하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쾌체 일을 해왔던 해원기에겐 되레 더 편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수족과 주구를 부려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자꾸 생기니까. 에, 그중에는 일월표국의 보표 일도 포함될 겁니다. 물론 피차 알아도 아는 척할 수는 없고.”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닌 듯. 비웃음이 씁쓸한 고소로 바뀐다.

“근래에 어려운 표행이 몇 차례 있었지요. 그러다가 듣게 된 이름이 바로 밀각입니다. 금의위도 아니요, 강호에서 돈과 관직에 팔려나간 떨거지들도 아닌. 당최 근본도 알 수 없는 것들인데, 생긴 건 기생오라비처럼 번드르르한 주제에 뱃속에서부터 익혔는지 말도 안 되게 심후한 내공,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병기에다 기이한 술수들. 고생을 꽤 했습니다.”

아무리 호탕한 성격이라도 속없이 털어놓기엔 난처한 내용.

어려운 표행과 고생이란 표현은 거의 실패했다는 의미여서.

집중해서 듣던 위욱경이 눈을 치켜떴다.

“이 국주가? 아니, 형제가 함께?”

좌중에서 일월표객의 실력을 제대로 아는 이는 위욱경 혼자. 이제껏 표행이 실패한 적이 없던 이들이.

이소천이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 올렸다.

“혼자였던 때도, 아우랑 함께했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 희한한 것들의 동정에 더 주의했었지요. 쯧, 확실한 정체를 모르기에 섣불리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밀각이란 이름을 밝힌 것도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풍진삼우 세 분도 전혀 모르는 것 같더군요.”

풍진삼우만이겠나.

화산의 장문인, 종남의 장문인, 비마방의 방주도 마찬가지.

그러나 오소민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해원기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소천이 한 밀각의 설명에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과연 해원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역시 ‘고구마 대장’답게 예의를 차리지만, 이소천은 오히려 반가운지 크게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요. 무엇이든 물으십시오.”

“제가 일월표국이란 이름을 들은 건 얼마 전. 우연히 귀에 들어왔고, 그것도 일행천리하는 표사에 관한 것뿐이었습니다. 워낙 과문해서 아는 게 없지요. 그래도 이 국주를 뵙고 나니 사부님 말씀도 기억나고. 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그게, 밀각의 인물이 쓰는 무공이 이 국주에게는 좀 친숙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까?”

“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이소천.

질문이 뜻밖이라 좌중 또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월표객을 못 알아봐서 미안한 것처럼 말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무공이 친숙하냐고 묻다니.

그런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심후한 내공이긴 해도 순간순간 풀어낼 틈이 보였고. 에, 희한한 술수에는 아우가 또 보탬이 되었지요. 친숙하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확실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군요.”

이소천이 놀란 건 해원기가 기막히게 짚어낸 부분 때문이었다.

남의 무공을 풀어내는 건 그 무공에 대해 알아야 가능한 일.

일행천리표 이소천이 결코 약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싸우는 걸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은 대단히 특이하다.

해원기의 눈썹이 꿈틀꿈틀.

잠깐 생각을 굴리더니 또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제가 영 무지한 터라. 이 국주의 아우님 성이 혹시 전(展)입니까?”

이소천이 눈을 몇 번 껌뻑였다.

‘과문’해서 일월표국이란 이름도 얼마 전에 들었다고, 그것도 자신을 앞에 두고 일행천리하는 표사니 하는 표현을 쓴 게 그냥 의례적인 겸손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던 이 더벅머리 청년이 정말로 무림에 문외한이란 걸 새삼 깨달았고,

“맞습니다. 전천도(展千濤)라는 이름이죠.”

순순히 답해주자 해원기가 탄성을 터뜨린다.

“허! 그래서 월영, 그래서 일월의 표객이었군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의미.

좌중이 전부 묘한 표정. 비록 실제 이름을 아는 이는 적어도, 일행천리표와 월영객을 일월표객이라 부르는 건 꽤 널리 알려졌거늘.

정말 몰라서 묻는다 해도 한참 밀각 얘기를 하던 중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잖나.

해원기의 사정을 잘 아는 오소민도 눈을 껌벅거렸다.

아무리 ‘바부탱이’라도 이 상황에 화제를 엉뚱하게 비틀지는 않을 텐데.

옥녀동 안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으나.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개개고수. 또한 과거의 난세를 직접 겪었던 이들이다.

마린이 돌 탁자를 가만히 짚었다.

“해 대협, 혹시 이 국주 형제분의 무공에 관한 얘기입니까?”

역시 화산파를 중흥한 당대의 장문인.

밀각에 속한 이들에게 일월표객이 고생했다는 내용이 발단이었음을 바로 알아차린다.

심후한 내공은 이소천에게 ‘친숙하다’라고, 희한한 술수에는 월영객의 이름을 물었었다.

해원기가 비로소 좌중의 분위기를 깨닫고 머리를 긁었다.

“아. 네. 그게……. ”

원하던 답은 구했으나 막상 밝히기 어려운 내용.

말문이 얼른 열리지 않자 오소민이 인상을 쓰며 얼굴을 들이민다.

“어이구, 이 답답이. 냉큼 털어놓으라고. 가릴 자리가 아니잖아.”

이 친구가 왜 이러나. 다른 때는 몰라도 무공 얘기라면 입이 잘 움직이던 친구가.

오소민의 재촉에도 해원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소천의 소탈한 표정을 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동창의 환관들과 손을 섞은 적이 있었고, 그들이 지금 이 국주가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죠.”

“아. 그거 산동에서의 일이로군. 처음엔 소감이란 놈, 그다음은 첩 형이라고 했었지.”

오소민이 비로소 감을 잡았다.

해원기가 처음으로 진정한 신분을 밝혔던 때.

밀각이 동창의 비밀 조직이라면 동창의 환관이 그 구성원으로 가장 유력할 터.

“그런 직위를 대더군요. 위 소감이란 자는 송곳 같은 추침과 비스듬히 꺾인 각간을 합쳐 원규(圓規)로 화하는 병기, 상대의 공격을 뱀이 허물 벗듯 피하는 영사태화의 신법을 썼습니다. 그리고 첩 형이란 자와 마찬가지로 옥빛이 환하게 일어나는 기이한 공력. 대단히 부드러우면서 질기고, 특히 몸을 지키는 능력이 뛰어났었지요. 확실히 알아보진 못했으나, 그건 도가(道家)의 비전입니다.”

좌중의 심각한 눈빛이 교차했다.

이소천이 설명한 대로.

원규를 병기로 쓰는 건 듣도 보도 못했고, 영사태화는 신법 이전에 일종의 괴이한 술수. 그리고 뭔지도 모를 도가의 비전이라.

그런데 해원기는 언제 동창의 환관과 부딪쳤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이는데, 이소천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그렇군요. 그럼 정말 명옥선공(明玉仙功)이 맞다는. 으음.”

그의 무공은 해원기의 사부에게서 전해진 것.

남들 앞에서 그 무공 내력이 밝혀지는 걸 꺼려서 해원기가 머뭇거렸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소천은 서슴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이 소리엔 이번엔 청령선고가 눈을 부릅떴다.

“명옥선공? 그게 어째서.”

저절로 좌중의 시선이 옮겨가자,

해원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소천과 청령선고 덕분에 얘기가 쉽게 풀려나간다.

“명옥선공은 옛날 전진파(全眞派)에서 금기로 여겼던 무공이라고. 전진의 무공이 대개 양에 속하지만, 오직 명옥선공 하나만은 그 계통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라서. 심지어 전진의 무공 전부를 극제(克制)할 수도 있다나. 장춘진인(長春眞人) 때에 원에 유출될까 저어하여 아예 말소했다고, 에, 그렇게 들었소이다.”

청령선고가 얼른 자신을 추스르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장춘진인은 전진파의 시조인 왕중양(王重陽)의 뒤를 이어 전진파의 장문인이 된 인물. 성길사한(成吉思汗)을 직접 만나 교세를 확립한 일로 비판을 받긴 했어도, 무림의 일대종사(一代宗師)였었다.

그런 인물이 금기로 여기고 아예 말소했다는 무공이 명옥선공.

종남파는 본디 전진의 유풍이 많이 남은 곳이고, 청령선고가 들었다고 했으니 이는 그녀의 사부인 영락검선의 말일 것이다.

설명이 끝나자 해원기가 고개를 조금 흔들었다.

“확실히 음에 속한 공부지만. 그래도 그 바탕은 청허심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전진의 무공은 전부 청허에서 비롯되니까요. 그러나 명옥선공에 다른 기예가 더해지면. 그래서 영사태화를 익혔던 모양입니다.”

이소천이 익힌 것이 바로 청허심법.

해원기가 이소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했던 배경인데.

오소민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영사태화는 그냥 신법 아닌가?”

“위 소감이란 자가 신법으로 썼을 뿐이지. 그래도 명옥선공 때문에 그 종적을 예측하기 어려웠네. 본래 영사보다는 태화라는 단어에 그 기예의 뜻이 있어서 허실착종(虛實錯綜)에 재생진력(再生眞力)이 특징이고.”

“아하, 뱀이 허물 벗는다는 말 그대로군. 하지만, 재생진력을 둘째 치고 허실착종도 제대로 보인 적이 없잖아. 이름만 그럴듯한 거 아냐?”

소모된 진력을 다시 생성하는 재생진력. 어느 게 진짜인지 모르게 뒤섞는 허실착종이야 종적을 예측하기 어렵게 하는 신법이라지만.

위 소감과 첩 형, 모두 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보이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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