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장 일행천리(日行千里) (2)
탁 소숙의 어릴 적 꿈은 사부와 함께 작은 표국을 만들어 사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표국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다 우연히 만난 표행에 끼어 임시 표사 생활도 즐겼다는데.
우연히 만난 표행, 그 안에서 맺어진 인연.
사부가 젊은 표사에게 전진(全眞)에서 흘러나온 청허심법(淸虛心法)을 전해준 건 한때의 흥취였을지도.
그러나 그 젊은 표사는 이 한때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고, 청허심법을 수습한 후에 다시 사부와 탁 소숙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여정 중에 만나게 된 노승, 오대산에서 계시를 따라 내려온 라마승 또한 같은 목적을 가졌으니.
인연은 그렇게 필연으로 이어져서,
종횡강호십팔마검의 두 사람을 사부로 모신 젊은 검객이 주화입마에 들어 사경을 헤맬 때, 이를 구원하는 도움의 손길이 되었더라.
사부에게 들었던 이야기.
주화입마에 들어 사경을 헤맨 젊은 검객이 바로 마린이요,
이를 구원한 젊은 표사가 바로 이소천이란 이름이었다.
해원기가 놀란 것은 이소천이 일행천리표라는 사실.
무림과 연관되지 않으려고 근 육 년 동안 쾌체 일을 했었다. 쾌체라는 게 본래 소식이나 가벼운 물건을 전달하는 업종.
표국은 훨씬 큰 표물을 담당하니까 딱히 접점이 없어야 하지만, 특이하게도 쾌체와 유사한 표국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작고 귀중한 물건이거나 사람만을 맡아준다는 표국.
그게 일월표국이고.
더구나 이름만 표국이지 실상은 단 두 사람. 일행천리표와 월영객(月影客)이란 외호를 쓰는 신기한 인물로 이루어졌다나.
그 일월표국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일행천리표가 바로 사부에게 청허심법을 전수받은 이소천일 줄이야.
당연히 해원기보다 더욱 놀라고 감격한 이는 바로 마린이다.
“이게 얼마 만이요? 십 년, 십 년이 다 돼가는구려. 어찌 그동안, 아니 이건 내 잘못이지. 이 표사, 아니, 이 국주. 일월표국이 바로. 허어!”
당장이라도 뛰어나와 얼싸안을 듯. 평소와 다르게 허둥대며 말까지 두서가 없자,
중년인, 이소천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장문인이 이러시면 난감합니다. 서로가 바빴잖습니까. 자, 회포는 나중에 풀고. 흠.”
덥수룩한 수염처럼 소탈한 성격.
마린에게 웃는 낯을 보인 후에 청령선고에게 머리를 숙인다.
“미리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종남파 장문인이 계시니 선장(仙長) 어르신을 찾아뵙지 못한 것부터 사죄를 드려야겠습니다.”
청령선고가 미소를 지으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사죄는 무슨.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나눌 틈도 없었지요. 사부님은 아직 정정하시니 언제든지 놀러 오세요. 이 국주 말대로 다들 바빴던 세월이니. 우선 이쪽으로.”
위욱경과는 이미 아는 사이일 터. 그걸 고려해서인지 청령선고가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이소천이 목례를 취하며 선뜻 자리로 향하다가,
시선이 얼핏 해원기를 스쳤다.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난 이 청년은 누굴까.
예전에는 신감 따위가 놓여 사당 역할을 했다던 옥녀동.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그저 평범한 동굴에 불과하다.
조그만 석탁 하나, 앉기 편하게 다듬은 돌이 의자처럼 사방에 놓였을 뿐.
그래도 한 공간에 앉을 때는 자연히 자리를 따지기 마련이라, 동굴 안쪽이 상석이 된다.
화산파 장문인인 마린과 종남파 장문인인 청령선고가 차례로 앉는 것이 합당한데,
마린의 바로 옆에 앉은 더벅머리 청년.
왼쪽으로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앉았고, 더벅머리 청년 옆이 오소민이다. 돌의자에 앉는 이소천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개방에 유룡개 말고는 젊은 장로급이 없을 터. 그냥 남녀로 나누어 앉았다 해도…….’
매끈하게 벽을 만든 공간이 아니라서 중심을 마린으로 잡는다 해도 청령선고와 더벅머리가, 위욱경과 오소민이 마주 보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배치.
그러나 오소민이 바로 입을 여는 바람에 의혹을 일단 속에 삼켜두어야 했다.
“이 국주가 오셨으니 방금 하던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위 방주의 부탁으로 이 국주는 장풍보의 남하를 미리 술귀신 사형에게 알리러 갔었지요. 과거에 마 장문인과 장풍보를 살핀 적도 있었으니 여차하면 풍진삼우 세 분이 필요할 수도. 흠, 그런데 개봉에서 이 국주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직접 하시는 게.”
슬쩍 말머리를 건네자 이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위 방주에게서 들은 장풍보가 남쪽으로 향하는 기미가 보인다는 전갈을 단 장로에게 전하러 가다가 제 아우를 만났습니다. 개봉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지요. 아, 제 아우는 저와 일월표국을 같이 꾸리는, 외호가 월영객인 녀석인데 그때 마침 보표 일을 마치고 저를 찾아오던 참이었고요. 에, 저희 일에는 외부에 밝힐 수 없는 내용이 많아서…….”
표행에는 비밀이 많고, 보표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숨겨야 할 부분을 빼고 이소천이 지난 일을 간추렸다.
“형님, 금의위나 동창이 나설 줄은 예상했지만, 이번엔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궁금해지더라고요.”
“느슨하다? 무슨 소리야?”
“이번에 보호한 이는 정칠품(正七品)의 순찰어사. 아무리 자진해서 물러났다고 해도 그냥 놓아줄 위치가 아닌데. 당두는 한 놈도 보이지 않고 번역만 셋이 붙었거든요. 지나치게 수월하게 일이 끝나는 바람에 거꾸로 더듬어봤죠.”
“으이구,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니까.”
“좀 들어보세요. 그 때문에 여기 개봉까지 오게 된 거니까. 형님도 삼보별저 알잖수? 거기까지 들어갔다가 희한한 소릴 들었고. 그게 아무래도 형님 일과 얽힌 것 같아서. 그 덕분에 내 쪽으론 힘이 실리지 않았달까.”
“이건 또 뭐냐? 내 일 때문에 네 일이 쉬워졌다?”
“뭐,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거지요. 섬서에서부터 감숙, 사천까지. 서쪽으로 신경을 쓰느라 딴 데 정신 팔 틈이 없는 것 같더라고. 아, 남직례도 나왔지만, 그건 또 다른 얘기인 듯…….”
“제대로 말해봐라.”
“대적(大敵)이 출현했답니다. 동창 놈들이 여기저기 벌린 일들이 죄다 뒤집힐 판이라나. 동창 안에서 꽤 이름난 것들 몇이 혼이 났는데도 정체조차 모른다니. 그래서 밀각(密閣)이 움직인다고 하더이다. 그게 정말 있더라고요.”
“진짜로 밀각이란 소릴 들었느냐?”
“그럼요. 이참에 강호에서 이름깨나 날린 것들을 다 족치자고. 우선 화산부터 흔들어보자는 얘기에 서둘러 형님을 찾은 겁니다.”
“허.”
의형제가 서로 마주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단 장로를 찾자마자 도로 장안으로 돌아와 개방 분타에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궁가십걸을 여기 오 장로에게 안내하면서 지금 얘기한 부분을 간단하게 전했지요. 장풍보 외의 수상한 자들이 개입할 우려가 있어서.”
이소천이 아우와 나누었던 얘기를 간추려 설명을 마쳤지만,
내용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밀각?”
의아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는 이는 오소민뿐이 아니었다.
마린, 청령선고, 위욱경 모두 생소하다는 표정. 해원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청령선고가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내밀었다.
“그거 심상치 않게 들리는군요. 이 국주,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을까요?”
표국의 영업에는 상관된 비밀이 많다는 걸 알지만, 다시 물어야만 했다.
그녀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이 예민하게 반응하기에.
이소천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쩝. 뭐,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야 딱히 감출 내용도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얼른 입을 열지 않고.
시선이 힐끗 해원기 쪽을 살핀다.
화산파와 종남파의 장문인, 비마방의 방주와 개방의 장로라면 믿을 수 있으나. 생판 모르는 더벅머리 청년 앞에서 떠들기는 어렵다는 뜻.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범상치는 않으나 신분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이소천의 생각이 어떤지 오소민이 금방 알아챘다.
“이거 참. 얘기가 끝난 후에 좋은 분위기로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 국주도 회포는 나중에 풀자고 하시길래. 하핫.”
묘한 웃음.
의미를 알기 어려워 이소천이 어리둥절했다.
회포를 나중에 풀자고 한 건 마린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이 이 더벅머리 청년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쯤 되면 눈치 없는 해원기도 알아차릴 수밖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손을 모은다.
“인사가 늦었군요. 사부님께 이 국주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해원기입니다.”
이소천은 더욱 얼떨떨.
해원기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판에 사부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 그런데 사부라는 사람이 자기 얘기를 했다고?
짓궂게 그 표정을 감상(?)하는 오소민보다,
이소천의 심정을 이해하는 세 사람이 차례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이런. 이 국주도 알잖소. 십여 년 전에 맹주가 퍼뜨린 소문 한 가지.”
마린이 달래듯 말을 꺼내자마자,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곧바로 한 구절씩을 읊어준다.
“풍화절세.”
“응양구천.”
마린의 입에서 나온 ‘맹주’라는 단어가 워낙 의외라 퍼뜩 눈을 치켜뜨던 이소천이,
이어진 두 구절을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으, 은공(恩公)의!”
덥수룩한 수염이 광풍을 만난 것처럼 흩날리고,
떨리는 시선이 정중하게 예를 취하는 더벅머리 청년의 얼굴을 더듬는다.
단정하지만 평범한 용모.
세상에 견줄 데 없는 풍모와 재주?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매의 기세? 눈 씻고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이소천은 해원기의 깊이 가라앉은 두 눈에서 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아, 은공의 아드님일 줄은. 검왕일 줄은.”
감정이 너무 격하면 힘이 쭉 빠지는가.
이소천이 답례도 잊고 넋이 빠진 것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해원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해원기는 사부의 제자(弟子)다.
제자란 무엇인가.
본래는 제(弟)의 자(子), 즉 남동생의 아들인 조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다시 제(弟)와 자(子), 남동생과 아들 같이 가르쳐야 할 후생(後生)을 가리키는 단어였고.
마침내 그 뜻이 넓어져 사부를 모시고 배우는 도제(徒弟)나 문도(門徒)의 통칭이 되었단다.
사부도 마찬가지.
사(師)와 부(父)를 가리켰던 말이 스승을 어버이처럼 여긴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스승을 어버이로 여겨도 친아버지는 아니요, 그러니 제자를 아들같이 아껴도 친아들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아드님이라.
해원기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잊혀 가던 과거의 한 장면.
우스개를 자주 섞던 쾌활한 탁 소숙이 ‘제자’라는 단어를 일부러 풀어가며 사부의 제(弟)는 자신이니 해원기는 자(子)가 된다고 놀렸었지.
까마득한 옛일이건만.
사부의 성은 묵(墨)이요, 자신은 사부가 지어준 대로 해(海)라는 성을 쓰건만.
이소천은 어찌 ‘아드님’이라 부르나.
마린이 웃음을 터뜨렸고,
“허허, 맞았소. 이 국주가 그리 보고파 하던 검왕이시라오. 이제야 원을 풀었구려.”
청령선고와 위욱경도 미소를 띤 채 끄덕끄덕.
모두가 해원기를 ‘아드님’이라고 부른 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는 모양이다.
이소천이 마린의 웃음에 퍼뜩 정신이 든 듯.
“엇, 어찌 이런 실례를. 아, 앉으시오. 해 공자. 어서, 어서.”
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두 손을 거푸 흔들어댄다.
오소민이 짓궂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해원기를 끌어 앉히고 나서도, 머리를 크게 흔들어 심중의 격동을 풀어내더니.
기어이 호탕한 웃음을 덧붙였다.
“핫하하, 당세에 검왕이 있으니 무얼 걱정하리오! 내가 얘기를 빨리 끝내야겠구먼.”
옥녀동을 울리는 큰 목소리.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크게 뜬 눈이 좌중을 훑으며 헌걸찬 기개를 드러낸다.
국주든 뭐든 그는 표객(鏢客). 필경 장문인이나 방주, 장로와는 달리 직접 강호의 삶을 살아가는 이다.
얼핏 속되 보이는 쾌활함이지만, 그게 도리어 해원기를 편하게 해주고.
“골치 아픈 얘기는 얼른 마치고, 오늘은 쓰러질 때까지 마셔야겠소이다. 술은 마 장문인이 내십시오. 아, 이 녀석도 있어야 하는데. 뭐, 미시(未時)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때를 놓친 적이 없으니까. 하하하.”
흥이 나서 속이 후련하게 웃어젖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