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7화 (178/410)

제45장 일행천리(日行千里) (1)

낡은 사당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중독되어 쓰러진 장풍보의 수하들이 숯덩이가 되어 나뒹군다.

금장호위와 그 주위의 십여 명 정도만이 폭풍에 날려 해원기 쪽으로 굴러온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무서운 폭발. 수십 근의 화약이 한꺼번에 터진 것 같다.

청령선고와 위욱경 등이 반사적으로 손을 쳐들며 독기에 당한 이들을 돌보는데,

해원기의 바위처럼 굳은 얼굴은 돌아보지도 않고,

시선이 박살 난 낡은 사당의 뒤를 노려보았다.

공들여 펼쳤던 재단경위의 결계, 그 검망(劍網)을 타고 오르려던 흑염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결계에 감지되었던 괴상한 물체도, 감탄과 호기심을 드러냈던 작은 목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암장검경(暗藏劍勁)의 일제인폭(一齊引爆).

재단경위로 공간을 교직(交織)하지 않았다면 그 괴상한 물체를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낡은 사당의 뒤쪽 벽에 붙은 면경(面鏡). 여자들이 쓰는 작은 손거울 같았고.

사당 안에 거울 하나가 있다고 괴상할 리 없으나, 결계를 펼치려고 검기를 실처럼 가늘게 뽑아 엮자 날실과 씨실이 함께 그 거울에 들러붙은 ‘무언가’를 찾아냈다.

천을 짜려면 실을 엮어야 한다. 실과 실이 그냥 붙는 게 아니라 꼬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검망 전체에 기이하게 진동하는 경력(勁力)이 담겼고, 그 경력은 걸리는 모든 공간을 흔들어댄다.

마치 벼락 맞은 황야가 사방으로 방전(放電)하듯.

자그마한 손거울에 들러붙은 ‘무언가’는 커다란 눈알. 그것도 벌레처럼 꿈틀대는 요사스러운 눈알이었기에 당장 깨버렸고.

그러자마자 검망에 흑염이 달라붙었다.

전율하는 검망까지 태우는 흑염의 정체, 그걸 알기에 곧장 재단경위의 결계를 통째로 터뜨렸던 것.

“명도흑염(冥道黑炎). 좋지 않군.”

운대봉 위에 아무런 기척도 없다는 걸 확인한 해원기의 혼잣말이 무겁기 그지없다.

검기와 장력조차 태우는 검은 불꽃. 명부도(冥府道)에서 유래한 힘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조화부인이 마지막에 곤혹도의 수법을 쓰더니.

지부 오대마도의 또 한 가지가 출현했다.

고독과 독기까지 쓰면서.

이 심각한 사태에 재단경위의 숨겨진 오의를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괘, 괜찮나? 헉, 뭐야, 여기도. 헉.”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는 오소민의 음성이 들리고서야,

해원기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운대봉의 남쪽 기슭을 타고 올라온 오소민. 얼마나 서둘렀는지 머리가 다 헝클어졌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배었다.

오소민도 놀란 표정. 마린과 화산오봉이 운기조식을 해도 멀쩡한 모습이라 마음이 놓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화약이라도 터진 듯 엉망진창이 된 광경이다.

청령선고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오 장로, 그쪽은 어떻게 되었나?”

선뜻 다가가 손을 내밀자 오소민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저야 뭐. 장안분타의 형제들과 궁가십걸(窮家十傑)이 고생은 다 한 셈이라. 지녔던 웅황탄(雄黃彈)을 다 써버렸네요. 화산파 사람들은 독기가 그다지 심하지 않지만, 좌우장로는 중봉의 뒤처리에 바빠서 일단 저부터 왔습니다.”

상황보고가 우선.

오소민답게 간결하게 사정을 알리자, 청령선고가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방의 장안분타, 그리고 총타에서 달려온 궁가십걸. 무가평을 제압한 후에 따로 떨어져 오소민과 함께 화산 내부로 향했었다.

예상대로 화산파 제자들은 북봉으로 오기 위해 중봉에 모였다가 발이 묶인 듯. 곡도와 사풍창을 지닌 장풍보의 수하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독기까지 뿌려진 모양.

그들을 전부 물리치면서 개방 비전의 해독약인 웅황탄까지 곳곳에 터뜨리느라 어지간히 바빴을 것이요, 독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빨리 알리느라 오소민이 이렇게 숨차게 달려온 것이다.

“후, 해 공자?”

한숨과 함께 해원기를 부르는 건 마지막의 괴상한 장면과 폭발 때문.

해원기가 운기조식하는 마린을 잠시 쳐다보곤 짧게 혀를 찼다.

“쯧, 아무런 기척도 없으니 이렇게 끝난 걸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

마린이 비무에서 이겨서 쓸데없는 살상 없이 항복을 받을 줄 알았고, 금장호위의 입에서 금오혈석이 화산에 있다고 여긴 근거를 알아보려 했건만.

장풍보 무리는 겨우 십여 명이 살아남았을 뿐.

마린은 고독에, 화산사봉은 독기에 해를 입었다.

화산을 침범한 장풍보나 그걸 막아낸 화산이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으며 남은 거라곤 쑥대밭이 된 운대봉.

어처구니가 없다.

청령선고가 미간을 모았다가 습관대로 냉소를 터뜨렸다.

“흥, 금장철기든 뭐든 장풍보 놈들도 다 이용당한 거예요. 이제야 오 장로가 당부했던 의미를 알겠네. 하여튼 일단 정리가 먼저니까…… 위 방주. 마 장문인은.”

삿된 술수라는 걸 직감한 청령선고지만, 여기서 말을 계속하긴 어렵다.

해원기더러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했던 오소민의 당부도 그렇고, 장풍보를 이용해 화산을 농락한 배후도 그렇고.

따져봐야 할 문제는 많으나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은 화산. 종남파 장문인도 객(客)일 뿐이다.

마침 마린이 눈을 뜨기에 말을 멈추었고,

몸을 일으킨 마린이 길게 탄식했다.

“허어, 한심한 꼴이지만 선고의 말이 맞습니다. 아이들도 회복된 듯하니, 수고스럽지만 옥녀봉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이미 오소민의 보고를 들었기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처지. 운대봉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마린이 여러 동도께서 화산에 베푼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린이 정중한 사례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흔히 화산의 오봉이라고 하지만, 옥녀봉은 동봉인 조양봉 서쪽에 붙은 작은 봉우리. 건물 몇 채가 어우러진 명성관(明星觀)은 상한 화산 제자들로 가득해서, 따로 옥녀동(玉女洞)이란 동굴에 자리를 잡아 모였고.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에 좋은 서늘함도 영 반갑지가 않다.

개방 장안분타가 서둘러 구원을 왔는데도 죽고 다친 이가 적지 않고, 쳐들어온 장풍보도 금장호위와 십여 명만 겨우 살아남았을 뿐.

화산이 입은 피해도 피해지만, 괴상한 결말 탓에 분위기가 무겁다.

침묵을 깬 것은 위욱경의 음성.

“동도라. 종남과 개방이야 본디 구주정문이니까 맞는 말이지만, 본 방이 감히 동도에 낄 수 있을지. 쓰읍.”

입술을 당겨 소리를 내는 건 조롱의 의미.

운대봉 위에서 초조해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마린이 독에서 벗어난 후론 생판 남을 대하듯, 아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외면한다.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잖소. 음, 내가 잘못했다면 따로 사과하리다. 지금은 오늘 일어난 변고에 대해 함께 상의할 때이니.”

마린의 어색한 답도 대뜸 끊으며,

“사과는 무슨.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당당한 화산파 장문인께서.”

비아냥만 더해져서 마린은 괜스레 헛기침만.

청령선고가 탁자를 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어찌 하나도 바뀐 게 없을꼬. 자, 우선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부터 살펴봅시다. 무가평, 운대봉, 그리고 여기 옥녀봉. 일이 벌어진 곳만도 세 군데니까.”

마린과 위욱경의 사연을 잘 아는 청령선고가 성질대로 빠르게 화제를 돌린 게 다행이다.

마린이 얼른 말을 받았다.

“옳은 말씀. 선고는 장풍보도 이용당한 거라고 하시던데.”

“뻔하지. 삼백이나 되는 인마라고 허풍을 쳐가며 기습하는 잔꾀까지 썼지만, 결국 전부 쓰러졌잖소. 우리 해 공자가 아니었으면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걸? 게다가 엉뚱한 핑계로 쳐들어온 것부터. 한껏 이용당하다가 버린 돌이 된 거지요.”

“흐음, 확실히 수상하오. 장풍보가 금장철기의 후신이란 건 밝혀졌으나, 그 우두머리, 낭왕이란 자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 금장호위란 자, 어지간히 화산을 우습게 여겼고.”

위욱경이 또 뭐라고 끼어들까 대화가 빠르게 이어지는 게 역력해서.

오소민이 그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려야 했다.

대강 짐작이야 가지만, 부부였던 두 사람의 틀어진 감정에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다.

그런데 생각에 잠겼던 해원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장풍보의 남하를 계속 살피셨던 분은 위 방주시지요?”

삐딱하게 딴청만 피우던 위욱경의 표정이 확 부드러워진다.

“아, 예. 얘기하자면 조금 긴데. 취개 단 장로가 의심을 품기 전에 본 방은 장풍보를 주시하기 시작했답니다. 산서에 말(馬)을 파는 자들이 왔는데 그자들 대부분이 꽤 안 좋은 소문이 난 인물, 그리고 장풍무명 진자현과 어울린다고 알려졌던 자들이었지요. 그래서 은밀히 알아보던 중에 잠시, 음,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단 장로가 찾아오고 나서 근래에 다시 동정을 살폈습니다. 연락은 지원이에게 맡기면서.”

잠깐 어두워지는 눈매.

시간을 내지 못한 이유가 천주마검 공손무원의 죽음이겠지만, 해원기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큰 목장을 운영해 치부했고, 장성 부근의 마적이나 오랑캐들을 쫓아낸 장풍보라지만, 그 실체는 마적의 우두머리일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 근거지인 섬서 쪽에선 얌전히 지내고 산서나 감숙(甘肅) 쪽으로 장사를 하지요. 그런데도 관부에선 영 눈치를 채지 못하고. 아니, 일부러 눈감아 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여간 내부를 엿볼 생각으로 혼자서 섬서로 넘어왔던 건데. 에휴, 이번엔 완전히 속았어요.”

삼백이 눈속임에 당한 셈.

오소민이 잠깐 해원기를 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관부라면. 위 방주께선 혹시 수상한 점을 관부에 알린 적이 있나요?”

“태원부에 아는 이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위욱경.

오소민이 묻는 의미를 아는 해원기가 바로 시선을 돌렸다.

“단 장로가 용케 때를 맞추었더군. 그리고 자넨 장풍보 말고 다른 자가 있는 걸 예상했던 듯한데.”

무가평에 장안분타가 지원을 나온 것, 청령선고에 부탁한 당부.

오소민이 화제가 자신에게 돌아오자 히죽 웃었다.

‘바부탱이’가 꽤 심각하지만, 나름 진지하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으니.

기특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으나. 여기선 ‘검왕’의 위신을 세워주련다.

“응, 위 방주께서 틈틈이 술귀신 사형에게 사정을 알리셨거든. 용케는 술귀신 사형이 아니라 위 방주께서 용케 그런 양반을 찾아낸 거라네. 묘한 얘기까지 알아내서 나에게 일러주었는데, 이건 아무래도 위 방주 부탁으로 태원부 안을 살폈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맞아요. 내가 부탁했었지요. 오 장로는 영민하군요.”

해원기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런 양반’과 ‘묘한 얘기’가 바로 개방의 지원과 제삼자 개입의 근거. 이 또한 위욱경과 연관된 일이다.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다시 물으려 할 때.

“순행장로, 이 국주(局主)께서 오셨습니다.”

동굴 입구에서 조심스럽게 전하는 말소리. 호위를 맡아 입구를 지키는 궁가십걸 중의 하나다.

오소민이 얼른 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모시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자, 해 형, 아니, 마 장문인이 더 반가우시려나.”

해원기와 마린을 번갈아 보며 하는 소리에 궁금증이 일어서,

저절로 안으로 들어서는 인물에게 시선이 모여들었다.

단단한 체형에 날렵한 발걸음, 누런 영웅건(英雄巾)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고, 청수한 이목구비에 덥수룩한 수염. 간편한 황의 경장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았고, 넓은 허리띠에는 짤막한 단봉(短棒) 한 자루를 꽂았다.

반가운 인물이라고 했다. 해원기와 마린의 시선이 유심히 외모를 살피는 동안,

중년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일월표국(日月鏢局)을 맡은 이소천(李嘯川)입니다. 이제야 뵙는군요.”

누구에게 하는 인사말인지.

그러나 그 이름을 듣자 해원기도, 마린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 이런. 이 소협, 아니, 이 표사!”

두 사람 다 깜짝 놀랐다.

일행천리표의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설마 이 사람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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