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6화 (177/410)

제44장 공극교직(空隙交織) (4)

해원기의 눈이 번개 치듯 장중을 훑는다.

독기.

형태도 색깔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마린과 금장호위의 싸움을 주시했고, 그래서 사풍창을 날리는 것도 제때에 대처할 수 있었는데.

언제 독기가 퍼졌단 말인가.

금장호위의 뒤처리를 마린에게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조짐이 없었거늘.

전력을 다한 동시안이 순간적으로 전면을 살피자,

팟.

신형이 단숨에 공중을 건너 마린을 향한다.

“마 장문인!”

급하게 부르면서 종횡으로 휘두르는 두 손. 금장호위의 머리를 뛰어넘는 순간에 기이한 기운이 마린에게 밀어닥쳤다.

마치 해원기가 돌연 마린을 공격하는 것 같았으나 실은 주위의 독기를 차단하는 힘.

바로 그 의미를 알아챈 마린이 그대로 몸을 돌려 두 손을 휘둘렀다.

왼손이 부용검 주지화, 오른손이 옥녀검 임심미의 손을 쥐자마자,

“해 대협!”

마찬가지로 해원기를 부르며 둘을 빠르게 내던지곤, 다시 조양자와 곽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휘익.

당장 해원기의 정면으로 날려온 주지화와 임심미.

해원기가 허리를 급격히 꺾어 비룡처럼 몸을 뒤집었다.

사십여 장의 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다가 공중에서 방향을 거꾸로 바꾸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 해원기의 전신이 돌풍에 휘말린 듯 거칠게 흔들리고, 두 발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을 연거푸 차 낸다.

발버둥 치듯 해괴한 자세지만, 기어이 주지화와 임심미를 받아낼 수 있었다.

제남의 대명호에서 보였던 부력답수보다 더욱 어려운 무력답공(無力踏空)의 절정 경공으로 두 여자의 허리춤을 쥐자마자,

“읏.”

짧은 기합과 함께 마침내 몸을 뒤집은 채 공중으로 몇 장이나 더 솟구친다.

마린도 조양자와 곽위의 어깨를 당긴 채 몸을 날려서.

자신을 향해 해원기가 쏟아낸 기이한 기운을 따라 금장호위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말로는 길어도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

해원기와 마린이 청령선고와 위욱경의 앞에 내려섰을 때,

덜컥.

금장호위가 반월도를 떨구면서 힘없이 쓰러졌다.

무릎을 짚으며 억지로 버티는 조양자와 달리 풀썩 고꾸라지는 곽위. 주지화와 임심미는 해원기가 허리춤을 쥐었을 때부터 정신을 잃어 흐느적거린다.

황망히 다가온 청령선고와 위욱경에게 두 여자를 건넨 해원기가 서둘러 요대자에서 약병을 꺼냈다.

“약왕당의 백초환입니다. 일단 한 알씩, 마 장문인?”

설명하며 마린을 보던 해원기의 목소리가 홱 올라가고,

위욱경이 펄쩍 뛰었다.

“여보!”

놀란 소리.

조양자와 곽위를 돌보려던 마린이 돌연 비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위욱경이 급히 손을 내미는데,

해원기가 그보다 빠르게 마린에게 돌진했다.

휘익.

위욱경이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 눈앞이 번쩍하고 중심을 잃을 정도로 질풍처럼 마린을 낚아채 간격을 벌린다.

“잠깐!”

버럭 고함을 치며 내젓는 소매에서 검기가 뿜었다.

파아아.

위욱경과 청령선고를 위협하듯 바닥을 가르는 검기가 어처구니없지만,

청령선고가 당장 위욱경을 당기면서 뒤로 물러섰다.

“떨어져, 위 방주.”

마린도, 청령선고도.

해원기를 누구보다 믿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번개가 치고 질풍이 이는 듯한 움직임, 평소와 다르게 고함치는 말투. 분명히 이유가 있다.

해원기는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손목을 잡힌 마린이 이 짧은 틈에 휘청거리기 시작하며 해원기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아무리 독기가 신속히 번졌어도 화산사봉 넷을 데리고 경공을 펼쳤던 그다.

검환(劍丸)이라는 강주를 현출시킬 정도로 자하단공을 대성한 경지. 제자들처럼 쉽게 침습을 받을 리 없다.

그러던 마린이 독기가 퍼지는 곳을 벗어나고서 이렇게 되다니.

신왕공을 마린의 체내에 밀어 넣으며,

해원기의 눈꼬리가 깊게 접혔다.

파팟.

마린의 손목을 놓고 다급하게 등 뒤로 돌아가면서,

두 눈의 신광이 매섭게 화산사봉을 노려보더니,

약병을 청령선고에게 던진다.

“이걸! 여덟 명 전부!”

받는 걸 확인하기 전에 내리감는 눈. 해원기의 두 손이 곧장 마린의 등에 붙었다.

존댓말을 할 여유도 없다.

잠심침령의 심상에 마린의 내부가 그린 듯이 들어오고,

손목을 잡았을 때 감지했던 ‘뭔가’가 마린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통과해 단전(丹田)으로 침입하려는 걸 확인한 순간.

해원기의 제탁지검이 그대로 베어버리면서 신왕공의 청정력(淸正力)이 발현되었다.

“컥.”

시커먼 피 한 덩이를 내뱉는 마린.

비로소 정신이 드는지 머리를 크게 흔들곤 눈을 떴다.

“이건……?”

해원기가 손을 떼며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히 때에 맞췄군요. 그래도 내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무엇보다.”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바라보는 전면. 마린이 그 시선을 따라 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잠깐 새.

이 운대봉을 포위했던 장풍보의 오십여 명이 모조리 쓰러졌으니.

사풍창을 날려버린 해원기에 의해 전부 기가 눌린 것처럼 위축되긴 했으나 그래도 칼과 창을 든 자들이,

마치 일제히 잠에 빠진 것처럼 가지런히 누워버렸고, 어디에서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반월도까지 놓친 금장호위는 아예 안면을 땅바닥에 처박은 채.

전부 죽었다.

낡은 사당의 양면으로 줄지어 누운 시체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숨을 돌린 이는 해원기만이 아니어서.

청령선고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다들 괜찮아요. 이 아이들의 독기도 풀려갑니다. 그런데…….”

정좌한 화산사봉은 백초환 덕에 운공에 들어간 듯. 희지원과 아교가 긴장한 채 양쪽 끝을 지키고.

약병을 든 청령선고와 어쩔 줄 모르는 위욱경이 급히 다가온다.

두 사람 역시 졸지에 시체로 뒤덮인 광경에 할 말을 잊은 듯.

“대체 어떻게 된. 저 사람은 괜찮은…….”

위욱경의 말끝도 흐려지자 해원기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위 방주께서 마 장문인을 좀 돌봐주시죠. 체내의 고(蠱)는 제거했습니다만.”

얼른 마린에게 향하는 위욱경. 청령선고는 그보다 해원기의 말에 눈을 치켜떴다.

“고? 고독(蠱毒)이란 말이에요?”

돌려주려고 내밀던 약병까지 부르르 떨린다.

해원기가 그 약병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화산 제자 넷은 독기에 침습 당했지만, 마 장문인은 고독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 모르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군요.”

약병을 요대자에 넣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도 청령선고가 말을 붙이지 못했다.

과거에 온갖 해괴한 짓을 벌였던 사도 출신이기에 고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청령선고.

서로 종류가 다른 독충을 한 항아리에 넣고,

장시간 굶기면 독충들끼리 서로 잡아먹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얻게 된 최후의 한 마리 독충은 참으로 지독한 악기(惡氣)까지 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삿된 술법으로 제련하면 절정고수라도 피하기 어렵다.

그 효용도 다양해서 급성으로도 만성으로도 쓸 수 있고, 생사를 결정하거나 심성을 갉아먹을 수도 있어서.

과거의 겁난을 일으킨 배경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정신을 차린 마린과 그 곁으로 다가가던 위욱경도 크게 놀랐다.

모두가 난세를 겪은 이들.

백여 년에 걸친 난세의 시작이 바로 남의 머릿속을 엿보고, 심성을 사악하게 뒤바꾸는 흉측한 고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못한다.

절대심인고(絶對心印蠱)라는 그 이름을.

앞으로 나선 해원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자하단공을 대성해 독기의 침습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마린이 왜 휘청거렸는지. 해원기가 아니었다면 제때 손을 쓰지 못했을 것이요,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부에게 자세히 배웠기에 절대심인고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독기가 언제부터 퍼졌는지, 고독이 어디서 마린에게 들어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소민이 공력을 실어 알려주지 않았다면 미처 방비하지 못했을 수도.

‘해독되어도 시간이 걸리면 내상을 피할 수 없고, 특히 고독에 당하면 원기(元氣)를 크게 상한다. 대체 누가 어떻게 독기와 고독을 함께 풀었단 말인가.’

화산을 멸하겠다고 달려든 장풍보.

위남에서 한 무리를 엮어 이목을 끌고, 본대는 미리 화산에 숨어들어 힘을 모으기도 전에 우위를 점했다. 더구나 그 우두머리는 화산검협을 눈 아래 두는 금장철기 출신.

비록 마린의 실력을 경시하는 잘못을 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즉각 집단 자살을 할까.

말이 되지 않는다.

본래 이 운대봉에 모여야 할 화산파 제자들. 좌우 장로가 소집하러 간 단심원과 수진원의 제자들이 오지 못하는 건 장풍보의 계책일 터. 오소민은 그 계책을 깨뜨리기 위해서 따로 움직였고, 먼저 독기의 출현을 알았을 것이다.

해원기의 머릿속에 언뜻 두 가지가 떠올랐다.

희지원과 아교가 중간에 보았다던 희한한 유람객 셋. 그리고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청령선고를 통해 전했던 오소민의 당부.

장풍보 외에 또 누가 끼어들었던 말일까.

해원기가 생각을 멈추고 두 손을 천천히 들었다.

오십여 명의 시체. 낡은 사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늘어진 시체에서 독기가 스멀거리며 이어지려고 하는 게 동시안에 똑똑히 보인다.

시체를 매개로 독기가 더 만연하고, 저 속에 또 고독이 숨어있을 가능성도 있다.

“잠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침중하게 말을 건네고 두 손이 종횡으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피어나는 영롱한 서기(瑞氣). 물에 잠긴 듯 은은하면서 비단처럼 너울대는 검기가 차츰 퍼져나가는 광경에,

해원기의 뒤에 있는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대첨산 황장촌, 독기에 뒤덮인 화전민 마을을 태웠던 그 검왕수.

이 운대봉은 황장촌과 달리 산꼭대기요, 밀집한 시체의 수도 두 배. 더구나 전부 무공을 익힌 자들이고 고독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독기가 새어나갔다간 더 어려워질 터.

적멸검으로 결계를 치고 군림검의 폭령진화로 태울 셈이다.

검왕오형의 두 번째, 재단경위로 면밀하게 공간을 자르는 게 우선.

뒤에 있는 이들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운대봉 밖으로 독기가 퍼지지 않도록. 재단경위가 말 그대로 가로세로로 공간을 ‘재단’한다.

사부가 검형수의 금교전(金鉸剪)을 기초로 만검천인(萬劍千刃)의 요결을 더해 창안한 재단경위. 삼십삼천신마봉헌과 대천세계신마난무의 두 초식을 덧붙여 신마공무(神魔共武)로 쓴 적은 있지만,

이렇게 결계로 사용하기는 처음.

검기를 나누고 쪼개서 실처럼 가늘게 뽑아 그물을 짜듯 공간을 덮었다.

그 때문일까.

일지광한에서 오지무극까지 딱 붙어 곧게 편 다섯 손가락이 조금씩 떨어지고,

공들여 그물을 펼치던 해원기의 시선이 돌연 낡은 사당을 꿰뚫듯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놀란 듯,

팍.

사당 너머에서 뭐가 깨지는 소리가 작게 나더니,

“호오, 이건 또 뭐냐? 공극(空隙)의 조감(照鑑)을 이렇게 깬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로군.”

화르륵.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를 조그만 목소리는 당장 낡은 사당에 피어오르는 불꽃 속에 파묻히고.

그 불꽃이 거꾸로 해원기가 펼친 그물을 타고 빠르게 타오른다.

새까만 불길.

그 흑염(黑焰)을 보자마자 해원기가 지체 없이 두 손을 교차했다.

콰쾅!

화산이 터지듯 운대봉 꼭대기가 일시에 폭발했다. 적멸검의 무량대적(無量大寂)을 펼칠 새도 없이.

재단경위도 변했다.

절령제십일(節令第十一) 소서(小暑)

소서(小暑)는 여름의 다섯 번째 절기로 더운 여름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음을 표시한다. 서(暑)란 글자는 염열(炎熱)을 뜻하니, 소서는 소열(小熱)이라. 날씨가 조금 더워졌으나 아직 더 더워질 것을 가리킨다.

소서에서부터 복중(伏中)으로 들어가 날씨가 때 없이 변화한다. 바다에서 따뜻하고 습한 기운이 밀려와 고온다습해져서 비가 많이 내리고 천둥도 자주 친다.

햇빛은 맹렬해지고, 천둥과 번개가 수시로 치며, 비는 대지를 흠뻑 적시나니.

만물이 왕성(旺盛)하게 성장(成長)하는 때라. 이 왕장(旺長)을 심지어 광장(狂長)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고대에는 이 소서를 지나면 ‘식신(食新)’이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갓 나온 쌀이나 보리를 갈아 떡이나 국수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음식을 갖추어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으니, 소위 ‘천지는 생명의 근본이요, 선조는 사람의 근본(天地者, 生之本也. 先祖者, 類之本也.)’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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