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5화 (176/410)

제44장 공극교직(空隙交織) (3)

소위 빙백신공.

어쩌다 한 번씩 중원에 모습을 드러냈던 북해 출신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음한기공(陰寒氣功)에 깊은 조예를 지녔기에, 그들의 무공을 통틀어 빙백신공이라고 부를 뿐. 그들이 원(元)의 조정에서 부리는 금장철기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내막을 상세히 알 수는 없었다.

더구나 무림에 위세를 부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돌연 등장한 절세고수에게 금장철기라는 조직 자체가 파괴되었으니.

그렇게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무공이 되었는데.

금장호위의 반월도가 뿜는 한기는 과연 공간 자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허연 서리가 눈발이 되어 풀풀 날리는 사방. 계절이 거꾸로 겨울로 돌아가는 듯.

해원기가 검왕법신을 이룬 채 동시안에 공을 들였다.

‘실로 특이한 음한기공이다. 더구나 저 능상설음의 반월도가 그 효과를 배가(倍加)해서 강상을 저절로 이룬다.’

무학에 대해 광대한 지식을 지녔으나, 직접 목격하긴 처음.

세상의 모든 무학은 대개 음양(陰陽)으로 그 성질을 구분할 수 있다. 뜨겁고 굳센 쪽이냐, 차갑고 부드러운 쪽이냐.

차가우면 부드러운 게 상리. 그러나 금장호위가 펼치는 빙백신공은 그 상리를 벗어나 차가우면서도 굳세고. 그런 이유로 상대를 뜨거우면서 부드럽게 만들어간다.

음유지학(陰柔之學)의 대부분은 차가운 힘줄기로 상대를 공격해서 부지불식간에 신체의 외부를 굳히고 내부를 얼어붙게 하는데,

빙백신공은 아예 대놓고 공간을 먼저 동결시켜버린다.

상대는 당연히 처음부터 방비하기 마련. 내공으로 한기를 막으려고 열을 높이지만, 공간이 얼면서 호흡이 어려워지니 체내의 열이 급격히 높아지고, 이를 가라앉히려고 또 내공을 소모하게 된다.

내력(內力)은 또한 내력(耐力). 버티는 힘이 없고서야 백 년의 내공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맥이 빠져 끝내 스스로 데친 나물처럼 늘어질 터.

마린이 절묘하게 초식을 이으며 몇 번이나 금장호위를 몰아넣으려 하지만, 차츰 한기의 침습을 받아 단홍검강의 붉은빛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화산 독문의 단홍검은 표홀한 특성대로 공간을 자유자재로 누벼야 하거늘, 주위가 모조리 얼어붙는 바람에 그 장점을 살리기 어려운 듯.

“저 바보가.”

해원기의 귓가에 위욱경의 초조한 혼잣말이 들리는 건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

어지간히 조바심이 나나 보다.

그러나 해원기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마린의 단홍검강은 그저 범위를 줄였을 뿐, 오히려 불요검이 온통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응축되었다.

과연 마린의 검이 돌연 기세를 바꾼다.

떵, 떵.

처음 금장호위의 도기를 때리던 방법이 더욱 무거워져 그야말로 태산이라도 뭉갤 듯.

얼어붙었던 공간이 박살이 나서 흩어지고 금장호위가 힘겹게 물러나는 모습이 보인다. 빙백신공의 강상이 깨지면서 충격을 받은 듯.

위욱경의 뒤에 있던 희지원이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토했다.

“어? 굉자결(轟字訣)?”

표홀한 단홍검강이 한순간에 태산을 뭉갤 듯 무거워진 이유. 그게 붕악의 요결임을 얼마 전에 배운 희지원이잖은가.

희지원의 놀라움이 무엇 때문인지 신경 쓸 틈도 없이.

마린의 신형이 어느새 금장호위를 뒤쫓아 공중을 뛰어넘는다. 유려한 장공낙안(長空落雁)의 신법에 곧게 뻗은 불요검.

굉자결의 무거움은 어디로 갔는지. 시뻘겋던 단홍검강이 그저 검신에 흐릿하게 맴도는데.

금장호위가 억지로 몸을 세워 반월도를 내밀자마자,

“탓!”

마린의 짧은 기합과 함께 노을이 좍 뻗는다.

펑!

“큭.”

신음을 토하는 금장호위, 머리에 뒤집어쓴 큰 모자가 날아가 노란 머리칼이 미친 듯이 나부끼고,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다.

단번에 형세가 뒤집혔고 마린의 신형은 다시 요자번신으로 바뀌었다.

어검으로 날렸던 불요검을 회수해 일격을 날릴 참.

그런데 승기를 잡은 마린의 미간이 확 좁아지며 왼손이 벼락같이 휘돌았다.

치치치치칭.

요자번신의 신법을 따라 마린의 신변에서 터지는 불꽃. 그건 십여 자루의 단창이었고, 양쪽에서 또 연달아 단창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마린만이 아니라 낡은 사당 앞에 선 화산사봉까지 노리는 수십 자루의 사풍창.

하나하나가 경력을 품은 투창이다.

마린도 순간 멈칫거릴 수밖에. 미처 화산사봉을 돌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고약한 것들!”

한 소리 꾸짖음이 두 줄기의 거대한 검형을 뿜었다.

와자작.

사풍창 수십 자루가 썩은 수수깡처럼 부서져 날아가는 장관에.

간신히 버티고 섰던 금장호위의 다리가 풀려버렸다.

“허억. 이, 이게.”

자신의 좌우를 훑고 지나가는 거대한 검형 두 개. 어마어마한 기운이 낡은 사당까지 날아가며 사풍창과 사풍창을 날린 수하들까지 휩쓴다.

사풍창만이 아니라 수하들까지 맥을 못 추고 픽픽 쓰러지고, 금장호위 자신도 맥이 풀린 건.

이 거대한 검형을 따라 후끈한 열기가 퍼지기 때문.

마린에 의해 깨지긴 했어도 공간에 퍼졌던 빙백신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겨우 머리를 돌린 금장호위의 눈에 두 팔을 검처럼 내지른 해원기의 모습이 들어왔다.

노기로 치켜뜬 눈매.

“귀국 출신은 약속도 지키지 않느냐?”

거듭 꾸짖으며 두 팔이 위아래로 나뉘어 벌어진다.

사아아아.

거대한 검형은 땅으로 가라앉고, 후끈한 열기는 하늘로 떠오르는 듯. 금장호위는 그것보다 자신과 수하들이 전부 해원기의 두 손안에 갇힌 듯한 느낌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일대일의 대결이라고 해놓고 열세에 처하자 수하들을 동원하다니.

그 잘못을 따지는 해원기의 눈이 무서워선가. 당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 아니…….”

방금까지 빙백신공과 반월도로 설치던 기세는 어디로 갔나.

쌍불검을 쥐고 마린이 화산사봉 앞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장풍보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쓰러졌다.

그리고 전신에 전해지는 가공할 기세.

제자들을 살필 새도 없이 마린이 쌍검을 교차하며 크게 외쳤다.

“해 대협!”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깨달았다.

금장호위와의 싸움을 예의주시하던 해원기가 사풍창이 날아들자마자 즉각 손을 쓴 것이요, 이 가공할 기세가 운대봉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강해진다.

잔뜩 긴장한 화산사봉이 제대로 검을 치켜들지 못할 정도로.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자하단공을 대성하지 못했다면 마린도 같은 처지였을 터.

해원기의 시선이 비로소 자신을 향하고, 그 얼굴 위로 얼핏 어색한 표정이 스치더니.

위아래로 나누었던 두 손에서 천천히 힘을 빼기 시작했다.

마린이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른 주위를 살폈다.

근 오십에 이르던 장풍보의 인원 중에 절반은 형편없이 나뒹굴고, 나머지 절반은 병기를 들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한다.

처음에 정연하게 두 무리로 나뉘었던 모습은 다 잊은 듯 어수선한 모습.

그 가운데에 주저앉은 금장호위도 믿기 어렵게 덜덜 떨어댄다. 마치 자신의 빙백신공에 당한 것처럼.

그 모습을 확인하면서 마린이 가볍게 혀를 찼다.

젊었을 적에 전진대주루(全晉大酒樓)라는 곳에서 구로빙주의 습격을 받았었고, 그때는 남의 도움으로 간신히 피하면서도 심한 내상을 입었었다.

북해 빙궁에서 유래했다는 빙백신공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경험 덕에 단홍검에 굉자결을 더하고 화악검결로 제압할 수 있었으나.

역시 상대를 지나치게 믿었었나. 어느 정도 대비는 했었어도 대뜸 사풍창을 무차별하게 쏘아댈 줄이야.

무인으로서의 신의도 도리도 없다.

그게 해원기를 화나게 했나 보다. 그리고 이 무서운 능력.

그냥 놔뒀다간 금장호위와 오십 명의 수하까지 모조리 검기에 꼬치가 된다는 걸 직감했다.

이건 화산파의 싸움. 일부러 해원기가 체면을 살려주기까지 했는데.

마린이 곧장 금장호위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은 끝났다. 더 궁색한 꼴을 보이겠나, 아니면 여기서 물러나겠나? 화산을 더는 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챙.

교차했던 쌍검을 부딪쳤다가 내리며 엄숙하게 묻는 말.

이 이상은 의미 없는 살육이 된다. 화산파의 장문인으로서 자파의 안전과 위신이 먼저요, 무도를 걷는 검객으로서도 전의를 잃은 자에게 검을 겨누고 싶진 않다.

서둘러 이들을 쫓아내고 제자들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되찾지 못하는 금장호위.

마린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그저 해원기만 쳐다보며 떨어댄다.

해원기는 이제야 두 손을 풀어 내리고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고.

장풍보의 수하들을 미리 주목하고 있었기에 곧장 손을 쓸 수 있었다.

생각보다 과했던 금광섬삭을 억지로 제어하긴 했어도 금장호위는 반월도로 막아냈었다.

그건 금생수(金生水)의 이치에 따른 빙백신공의 효과. 그래서 대괴무극과 폭령진화를 함께 펼쳤다.

연거푸 내지른 발검제형이 금장호위를 가운데 두고 두 패로 나뉘었던 장풍보 수하들의 사풍창을 날려버렸고,

신의를 저버린 데 노해서 발검제형을 곧장 검림소연으로 이어 붙였다.

무도를 저버리는 ‘고약한 짓’을 매섭게 응징할 셈.

그런데.

군림어검대법에 집중하느라 양손이 이미 검왕수라는 걸 깜빡했었나.

검림소연으로 두 손을 위아래로 나누고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대괴무극이 땅에, 폭령진화가 하늘이 되었으니. 손안에 갇힌 공간이 금세라도 초토(焦土)가 되어 모조리 재를 만들어버릴 것 같고.

그 기세가 심지어 낡은 사당까지 확대되려고 한다.

더구나.

공간에 갇힌 자들. 사풍창과 함께 쓰러진 자들뿐 아니라 나머지 절반도 급격히 기가 죽었고.

금장호위는 아예 전신을 떨며 일어서지도 못한다.

상상지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을 터.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함께 운용되고,

발검제형이 수발여의(收發如意)라는 오의를 품자,

검림소연 역시 단순한 기권(氣圈)에 머물지 않았다.

마치 깊이 잠들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처럼,

검왕오형이 전부 상상외의 위력을 드러낸다.

금장호위를 비롯한 근 오십 명의 졸개들이 전부 맥을 못 추는 건 바로 검기핍인(劍氣逼人)의 심병권(心兵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해원기가 금장호위에게 다가가며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정당한 비무에서 패했소. 마 장문인의 관용에 감사하며 수하들을 전부 물리시오. 병기 한 자루 화산에 남기지 말고. 그리고서.”

잠깐 말을 끊고 마린을 본다.

“장문인, 괜찮으시면 사태가 정리된 후에 이 자를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손을 모으며 정중한 요청. 나설 자리를 가리는 예의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금장호위에겐 물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마린이 쌍불검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굳이 잡을 일이 없습니다. 일단 본 파의 제자들이 어떤지부터 알아보고, 그런 후에는 해 대협의 뜻대로 해도 좋습니다.”

승낙을 받은 해원기가 시선을 내렸다.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금장호위. 노란 머리칼에 노란 눈이 낯설지만, 지금은 그저 겁에 질린 처량한 여인네와 다름없다.

해원기가 다시 말을 걸려는데.

펑, 펑.

산 아래 어디선가 울리는 폭음. 깊은 골짜기 탓에 아련하게 들리지만, 고수의 귀에는 분명하게 들렸고.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오소민의 고음이 급하게 다가왔다.

“해 형! 조심해! 독기(毒氣)!”

내공을 싣고도 목청껏 지른 외침이란 걸 알아채기 전에,

퍼퍼퍼퍽.

장풍보의 남은 절반이 짚단처럼 옆으로 넘어가고, 마린 뒤의 화산사봉도 별안간 중심을 잃고 흔들거려서.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