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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왕춘추-174화 (175/410)

제44장 공극교직(空隙交織) (2)

해원기 들의 자취를 따라온 듯, 희지원과 아교가 있는 곳으로 올라온 청령선고의 말에 금장호위의 인상이 더 일그러졌다.

“종남파…….”

눈을 흘기며 이를 가는 소리. 청령선고를 금방 알아봤으나,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마린의 목소리에는 오만상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부, 부인?”

청령선고와 같이 운대봉에 올라온 중년 여인.

마린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건 희지원과 아교가 반가움에 급히 다가가며 부르는 소리 때문이었다.

“숙모, 아니, 사모!”

“사부님! 위 방주님!”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각자의 병기를 든 채 장중을 훑어본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재빨리 앞으로 나서는 건 제자들을 지키려는 본능.

위욱경이 숨을 가다듬으며 침중하게 중얼거리고,

“과연. 이미 화산에 스며들었던가?”

청령선고가 연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호반빙궁의 요괴가 아직 남았을 줄은 몰랐는걸. 진짜 금장철기의 잔당이로구먼.”

치링.

경쾌한 검명을 울린 건 일부러 해원기에게 들려주는 뜻.

해원기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이 이렇게 빨리 이르렀으나 오소민은 보이지 않는다. 위욱경의 ‘이미’와 청령선고의 ‘진짜’라는 단어에서는 화산의 상황을 벌써 안다는 의미가 전해지지만,

그걸 따지기 전에 희지원과 아교에 대해 마음을 놓아도 되는 게 더 중요했다.

오도장 다섯과 졸개 대여섯을 줄였을 뿐. 아직도 상대는 수십 명에 능상음설의 보도를 지닌 금장호위가 있다.

뒤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때, 형세를 확 뒤집을 셈인데.

“어흠, 호반빙궁이라, 옛 기억이 떠오르는군.”

목을 가다듬은 마린의 목소리에 걸음이 멈추었다.

화산 장문인이 제자 넷을 놔둔 채로 먼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위욱경을 보고 당황했던 실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 걸음 크게 나선 채로 오른손의 불요검을 비껴들었다.

“오늘 참으로 온갖 못난 꼴을 다 보여서 창피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주인 노릇을 내팽개칠 수야 없지요. 장풍보의 주인이라는 낭왕이라는 양반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소만, 오늘의 이 행사는 아무래도 금장호위라 자칭한 당신이 주재한 듯한데.”

장중한 음성이 단호한 기백을 품었고,

사당 근처까지 몰린 수십 명은 아예 눈에 들지도 않는지 똑바로 금장호위를 쳐다본 채.

금장호위의 잔뜩 찡그린 시선이 천천히 돌아가자, 가볍게 혀를 찬다.

“쯧, 당신 말대로 본 파는 아직 지붕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어설픈 모양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함부로 업신여겨도 되는 곳은 아니지. 제자들이 발을 묶어놓고 나와 화산오봉을 제압하면 화산은 망한다? 흐흠, 그 정도로 폭삭 망할까?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예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것을. 그리고…….”

고소를 지으며 불요검을 천천히 세우더니,

“과거에 그 칼과 비슷한 기운을 대한 적이 있었다오. 구로빙주(九路氷柱)인가 뭔가 하는. 당시에는 환문(幻門)이라는 삿된 무리에 속했는데. 그래서 어떻소? 괜한 살육만 늘리지 말고 당신과 내가 깨끗하게 결판을 내는 게. 아, 물론 낭왕이란 양반이 나와 주면 더 좋고.”

살짝 흔들었다.

지이잉.

청령선고의 연검과는 달리 지면을 타고 울리는 육중한 검명.

“가, 감히. 으득.”

금장호위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그만 이를 악물었다.

도발.

정체를 알 수 없는 더벅머리가 오도장을 단번에 쓰러뜨렸고, 곧이어 종남파의 장문인과 비마방의 방주가 도착했다.

그걸로 힘을 얻었는지 주둥이를 놀리며 나서는 마린. 화산파 장문인이랍시고 점잖을 떠는 말투엔 구역질이 나고, 함부로 낭왕을 언급하는 건방진 주둥이를 당장 짓이겨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마린의 도발에 치미는 부아를 곧장 터뜨릴 만큼 어리숙하진 않다.

확실히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변했다.

장풍보의 십삼도장(十三刀長)을 전부 이끌고 나와서 화산을 완전히 말살할 셈이었는데. 서쪽 위남에서 화산파의 이목을 끄는 역할을 맡은 도장 둘은 여태 이르지 않고.

되레 종남의 청령선고와 비마방의 예홍쌍잠이라는 변수. 정체불명의 더벅머리도 전부 서쪽에서 올라왔다.

검강과 어검을 병용하는 화산검협이 비록 당세에 손꼽히는 검객이라도 금장호위인 자신이라면 충분히 상대하리라는 자신. 설사 종남파가 끼어든다 해도 다 늙은 영락검선은 운신조차 어렵다니 딱히 꺼릴 게 없었거늘.

직접 보게 된 청령선고와 예홍쌍잠은 전혀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무겁고 유장하다고 소문난 청령진기를 익혔을 청령선고가 연검으로 경쾌한 울림을 내질 않나, 표홀하고 화려하다는 자하공을 지닌 마린은 거꾸로 이렇게 육중한 검명을 전하질 않나.

게다가 환문의 구로빙주라면.

어쩐지 뒷골이 당겨서 마린의 도발에 선뜻 응하질 못했다.

장풍무명 진자현으로부터는 대강 비슷한 수준의 도적들이라고 들었는데.

화산과 종남이 이렇게 커졌었나.

여전히 오십에 가까운 수하가 운대봉에 있고, 도장 여섯이 단심원과 수진원을 봉쇄한 상태다.

약세를 보일 필요가 없다.

“흐흐, 화산검협이란 이름이 그리 잘났나? 명문정파라는 간판에 목숨을 걸려고? 뭐, 나야 아무 상관없지. 하나씩, 하나씩, 종남과 비마방도 이참에 싹 정리해두는 게 나쁘진 않아. 그러지 않아도 슬슬 눈에 거슬리는 판이었으니까.”

치치치.

반월도를 흔드는 게 신호인지.

달려들었던 수십 명이 두 덩어리가 되어 앞뒤로 물러나고, 가운데 선 금장호위의 발치를 중심으로 허연 서리가 퍼져나간다.

도발에 응했는가.

마린이 뒤를 잠깐 돌아보고 크게 한 걸음 나섰다.

“예전에 이 사부는 빙공(氷功)에 크게 당했었단다. 빙공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거라.”

얼굴이 허옇게 질린 제자 넷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건넨 말. 지금 이 상황에서 무공을 가르치나.

불요검 한 자루만을 크게 휘둘러 겨눈다.

“얼마나 눈에 거슬리는지 모르겠소만, 지주(地主)의 예는 차려야겠지. 자.”

치잉.

먼저 손을 쓰라는 양보. 조금 전과 달리 맑은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니.

화산 단홍검을 준비했다는 뜻이지만.

금장호위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 가소로운!”

버럭 고함을 치며 반월도가 정면으로 베어나간다.

촤아아아.

마린의 단홍검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희뿌연 기운이 단숨에 십여 장을 뒤덮고, 졸지에 주위에 몰아치는 한기.

검을 쥔 채 마린의 뒤에 서 있던 화산사봉이 전부 몸서리를 칠 정도로.

한창 더워질 시각에 이게 무슨 괴변일까. 검을 겨눈 마린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다.

“위 방주.”

청령선고가 위욱경을 부르는 소리에 해원기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와락 앞으로 나가려는 걸 청령선고가 소매를 잡은 듯.

잔뜩 긴장한 위욱경의 얼굴을 보고서야 해원기가 황연히 깨달았다.

부부.

뭔가 틀어진 관계라고 듣긴 했어도 마린과 위욱경은 부부 사이다.

“저 바보가. 또 쓸데없이 잘난 체를.”

“여긴 화산이잖아. 마 장문인의 위치를 생각해야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뜨는 위욱경과 달래듯 말을 받는 청령선고. 그 대화의 의미보다 ‘바보’라는 호칭에 절로 묘한 감정이 들지만, 해원기가 얼른 청령선고를 거들었다.

“괜찮을 겁니다. 아무리 호반빙궁의 빙공이 특이해도 마 장문인의 화악검결을 능가할 수는 없지요.”

차분한 말에 위욱경의 시선이 제꺽 다가온다.

“저, 정말. 아니, 화악검결을 완성했나요? 그걸 해 공자가 어찌?”

감정이 복잡해져서인지 말에 두서가 없다. 그래도 해원기는 일부러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화악검결’은 아마도 화산파 안에서도 아는 이가 적을 터. 그걸 위욱경이 바로 알아들었다는 건 그만큼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 장문인 덕에 화산에 오르자마자 같이 검을 논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형은.”

해원기가 화제를 바꾸다가 시선을 돌렸다.

막 금장호위가 희뿌연 한기를 쳐내는 순간,

마린의 신형이 그 한기를 올라타듯 뒤집혔다. 화산 독문의 요자번신, 그러면서 단홍의 검이 그 한기를 내리친다.

쩡.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무거운 일검.

희뿌연 한기가 얼음이 깨지듯 부서져 날리고, 반월도를 당기는 금장호위의 놀란 표정이 보였다.

충격을 받은 듯 밀려나는 걸음을 억지로 디디면서,

금장호위의 반월도가 예의 그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공간을 휘저었다.

쉬이이이.

희뿌연 도기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구름처럼 일고,

소름 끼치는 한기가 해원기 들이 있는 곳까지 들이닥친다.

치링.

청령선고가 연검을 떨치며 급히 외쳤다.

“공력을 끌어올려라!”

희지원과 아교로선 견디기 어려운 한기. 서둘러 대비하려는데.

스스스.

청령진기를 주입했던 연검이 맥없이 공간을 가를 뿐. 소름 끼치는 한기는 해원기의 앞에서 아지랑이처럼 흩어져버렸다.

아니, 아지랑이는 해원기의 양손에 어린 채.

“그렇다고 저들이 비무의 결과에 순순히 승복하리란 보장은 없겠죠. 그리고 어떻든 저 금장호위에겐 알아볼 게 있습니다.”

말소리가 워낙 침착해서 뭘 했다고 여기기도 어렵다.

청령선고가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에 해원기가 묻다가 만 얘기.

“오 장로는 개방 형제들을 배치하느라 늦나 봐요. 취개 단 장로가 미리 장안 분타에 연락을 취해놓았답니다. 마침 일월표객(日月鏢客)을 만난 김에. 나도 처음 보았네, 일월표객. 그 덕분에 무가평을 금방 제압할 수 있었고.”

오소민과 무가평의 소식을 뒤늦게 전하자 해원기의 머리가 살짝 기울었다.

때맞춰 개방의 지원이 들어와서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빠르게 해원기의 뒤를 따랐다는 말이지만,

어떻게 취개가 시간을 맞추어 연락을 취할 수 있었을까. 또 일월표객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다.

긴장한 채 관전하던 위욱경도 청령선고의 말에 비로소 안정을 찾았는지.

“과연 일행천리표(日行千里鏢)라는 이름 대로. 단 장로에게 소식을 전한 게 언젠데 벌써 장안의 개방 분타까지 왔을 줄은. 오 장로는 화산 내부에 스며든 적도를 먼저 물리쳐야 한다고 서둘렀어요. 기민하더군요. 그리고 해 공자는.”

말을 덧붙이다가 청령선고를 보는 건 아직 해원기에게 말하는 게 어색해서.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우리 둘에게는 해 공자 옆에 붙어있으라고 하더군요. 흥, 깜찍하게도.”

청령선고가 습관인 코웃음과 함께 빠르게 말을 맺었다.

해원기의 기울었던 머리가 이해했다는 듯 똑바로 돌아왔기에.

오소민이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을 터. 그만큼 오소민을 신뢰하는 해원기에겐 충분한 설명이 되었지만.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오물거리는 청령선고의 입, 그리고 그 입을 막는 위욱경의 눈짓까지 알 수는 없었다.

청령선고는 어쩐지 젊은 개방 장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우선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무림에 발을 들인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간의 경험이 예전에 들었던 얘기들과 어울려 한층 해원기를 세심하게 만들었다.

호반빙궁 출신의 금장호위. 흔히 빙백신공(氷魄神功)이라고 일컬어지는 빙궁의 무공은 확실히 상대하기 어려운 면이 있고, 그녀의 손에 들린 반월도는 능상설음의 효과를 지닌 보도.

게다가 두 덩어리가 되어 양쪽으로 공간을 벌린 수십 명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그렇게 상황을 살피는 사이, 마린과 금장호위의 싸움은 빠르게 격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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