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3화 (174/410)

제44장 공극교직(空隙交織) (1)

화산에는 예로부터 도가(道家)의 선적(仙蹟)이 많다.

운대봉의 평평한 꼭대기, 그 가운데의 낡은 사당도 예전에 사라진 도관(道觀)이 겨우 남긴 자취일 터.

마린과의 거리는 대략 사십 장, ‘노신’이라 자칭한 여인은 해원기와 마린의 중간쯤.

그 여인의 날카로운 웃음에 마린의 뒤에 선 화산오봉의 넷도 어깨를 움츠리고,

낡은 사당의 지붕에선 흙먼지가 일어난다.

웃음에 내공을 담아 오륙십 장의 공간을 흔드는 건 예사로운 능력이 아니다.

해원기가 힘주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쿵.

운대봉을 울리면서 고막을 찌르는 듯하던 웃음이 단번에 그친다.

산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낡은 사당 지붕에서 일던 흙먼지가 훅 날아가 버리고, 여인의 노란 눈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단치 않은 발 구름 한 번에 자신이 펼친 힘이 뚝 끊겼으니.

그러나 해원기의 시선은 다시 마린을 향했다.

“장문인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무가평에는 청랑도아강과 사풍창이 보였고, 여기에는 금장을 자칭하는 이가 있군요. 그리고 장풍보의 진짜 주인은 낭왕인 것 같고요.”

마린이 내렸던 손을 들어 수염을 쓰다듬었다.

희지원과 아교만을 데리고 나타난 해원기. 무가평을 들먹였으니 청령선고와 오소민은 아직 그쪽에 있다는 뜻이요, 현재 화산이 처한 상황도 파악한 듯하다.

북봉인 이 운대봉에 화산의 전력을 모으라는 명을 내렸으나, 단심원과 수진원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고, 심지어 제자들을 데리러 간 좌우 장로도 감감무소식.

변고가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미 포위당했다.

삼백이 호호탕탕 남하한다는 기별이 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은밀한 기습을 위해 이목을 끄는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장풍보의 주력은 이미 화산에 숨어든 상태.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한 셈인데.

해원기는 이런 상황에서도 되레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

냉막하고 고오하게 보이던 그의 사부와는 다른 성격인데도 이 은근한 배려는,

‘정말 닮았군.’

감동은 일단 마음속에 새겨두고.

“그렇군요. 섬북에서 몽고의 잔당과 변방의 마적을 막는 장풍보라더니 사실은 몽고의 잔당 그 자체였다는 말. 초원의 푸른 늑대를 상징으로 삼는 자들이라, 그 우두머리에겐 낭왕이란 이름을 붙이고, 밖으로는 장풍무명 진자현을 보주로 내세운다. 허, 어지간히 교활한 머리를 굴렸구먼.”

묵직하게 탄성을 내자,

금장호위라고 자칭한 여인의 노란 눈이 빠르게 돌아왔다.

“감히. 썩어빠진 명분이나 내세우면서 힘도 없는 것들이. 그래, 지금 네 처지를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 제자랍시고 화산오봉이라 이름 붙인 애송이들밖에는 아무도 없는. 흐흐, 도복을 입은 꼬마 계집은 종남파 같은데, 저 더벅머리는 어디서 굴러온 천둥벌거숭일까.”

금장호위의 곁에는 험상궂은 용모의 다섯, 운대봉 주위를 포위한 자들은 오십 명.

새로 나타난 해원기를 더해도 마린 쪽은 그 오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화산오봉 따위는 처음부터 눈에 두지도 않았고, 종남파의 꼬마 하나가 더 붙었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래도 해원기는 마음에 걸리는 모양.

마린이 빙긋 웃었다.

“본 파를 아주 잘 아는 듯하군. 그래, 예전의 구주정문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아직 어설픈 본 파지. 그러나 세상의 어느 문파든 처음은 다 그렇지 않겠나. 험한 산을 찾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길을 찾고, 조금이라도 능력이 생기면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고 애쓰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문호(門戶)가 열리는 법. 오직 무력만 믿고 억지를 써서 강압하는 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본 파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라 화산의 다섯 봉우리를 맡겼고, 가까운 이들이 이 마 모의 곤경을 돕고자 나서주었으니. 이만하면 꽤 괜찮은 처지로 보이는데?”

화산오봉의 넷만을 거느리고, 낡은 사당 앞에 섰으면서도.

당당한 화산파 장문인의 점잖은 응대.

이게 금장호위의 속을 더 긁어댄다.

“흐흐, 그렇게 까불다가 또 폭삭 망해보려고. 본래는 네가 기대하는 화산오봉을 하나씩 분질러서 네 무릎을 꿇릴 작정이었다만. 아예 뿌리를 뽑는 게 낫겠구나. 훔쳐간 물건은 화산을 멸한 후에 찾아도…….”

“낭왕이 그렇게 말하던가?”

해원기가 금장호위의 거친 말을 뚝 끊어버렸다.

마린의 위신을 생각해서 대화를 맡기고 주위를 살필 생각이었으나.

듣기 싫은 거친 말이 금오혈석을 언급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 마린에게 함부로 대하는 금장호위의 언행이 불쾌하기 짝이 없어서 말투가 딱딱해졌다.

금장호위의 눈매가 확 뒤집히고,

“이놈들잇.”

씹어 뱉는 욕설.

자신의 말은 무시하고 마린을 내세우던 해원기가 또 불쑥 끼어드는 게. 마치 농락당하는 기분.

손을 쳐들어 해원기를 가리킨다.

“오도장(五刀長), 저놈부터, 떨거지들까지 다 죽여버렷. 화산, 멸(滅)!”

더 입을 놀려봤자 괜한 수고.

자신의 곁에 선 다섯, 오도장이란 자에게 해원기 쪽을 맡기고, 날카롭게 고함을 외치자.

“멸!”

오십 명이 한꺼번에 외치며 달려들었다.

대부분이 곡도와 단창. 칼날과 창끝이 햇빛에 냉기를 뿌리고,

운대봉 위가 한순간에 살기로 뒤덮였다.

무가평으로 대오를 갖추어 진군한 백여 명은 대부분 허장성세.

곡도장이라고 하던 자를 포함한 열넷과 사풍창을 던진 말구종 다섯만이 제대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운대봉 위는 전부가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수준.

금장호위가 화산을 멸한다고 자신하는 이유일 터.

당장 해원기를 향해 날아드는 다섯 자루의 곡도가 전부 곡도장 이상으로 푸른 강기를 뻗어낸다.

“희 소협, 뒤로!”

해원기가 빠르게 주의를 시키면서 두 손을 크게 휘둘렀다.

봉우리에 오르면서 네댓 명을 쓰러뜨려 포위망의 한쪽을 끊은 셈이지만, 모조리 마린에게 달려든 후에는 이쪽 공간이 전부 오도장의 위협을 받게 된다.

희지원과 아교를 보호하는 게 우선.

차아아아.

대우신장이 밀어내자 오도장이 곡도를 기이하게 휘두르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무가평에서와 마찬가지. 장력을 받아치거나 자르려 하지 않고 능숙하게 피한다.

어떻든 틈이 생겼고,

해원기가 곧장 몸을 날렸다.

열넷으로 기이한 도진을 이루었던 도객들, 그 중추는 가운데의 두 명이었는데. 오도장의 청랑도아강은 그 두 명의 수준.

위이이잉.

해원기의 손가락이 좌르르 붙으면서 휘황한 빛이 출현했다.

처음부터 군림검. 광검(光劍) 한 자루가 팽이처럼 돌며 오도장을 들이친다.

차차차차창.

“으음.”

청랑도아강의 푸른빛이 제때 막아내긴 했어도 등골이 서늘한 기운에 신음이 절로 섞이고,

빛이 사방으로 뻗어 오도장을 얽어매는 변화.

오도장이 자신도 모르게 한곳으로 몰리며 급히 곡도를 겹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팟.

파열음을 내며 시차를 두고 똑같이 움직이는 다섯 자루의 곡도.

청랑도아강을 두른 채로 예의 도진과 같이 날아드는 강기를 무산시키려 하니.

해원기의 눈에 신광이 맺혔다.

희지원과 아교를 보호하고, 재빨리 마린을 도와야 한다.

마음을 정하니 상대할 방법이 환히 떠올랐다.

잠심침령과 동시안. 무가평에서의 싸움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그 효과까지 새겨두어서 차츰 상상지로 바뀌어 간다.

평소의 유리검 대신에 군림검이,

검왕수보다 어검이 적절하다고.

답을 구했다.

수원광한(水源廣寒)에서 등목구룡(藤木九龍)으로 나아가자 과연 오도장이 모여서 도진 같은 형태를 취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폭령진화(爆令眞火)와 대괴무극(大塊無極)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사방으로 뻗던 빛이 삽시간에 화염으로 폭발하더니 거대한 잿더미가 쏟아지는 듯.

파열음이고 뭐고.

퍼엉!

“으아악!”

청랑도아강과 곡도가 한꺼번에 박살 난 오도장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폭음과 비명만으로도 놀랄 지경인데.

끼이이이잉.

군림검이 굉음과 함께 더욱 거대한 빛으로.

전면 수십 장을 휩쓰는 엄청난 빛 뒤로 해원기의 심각한 표정이 언뜻 보였다.

군림어검대법(君臨御劍大法).

고죽(孤竹)에 전해지는 천손지무(天孫之武)는 본디 신왕공과 천손검법 뿐.

잠심침령이니 동시안이니, 구음입무니 행위지니 하는 여러 기예도 그저 신왕공에서 파생된 응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조의 원혼이 마침내 귀왕검(鬼王劍)으로 화했기에 이에 대비할 검학이 필요했고,

누대의 심혈이 더해진 끝에 해원기의 사조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된 것이 바로 군림검이었다.

거역하는 모든 것을 처단하는 군림의 검. 그리고 그 바탕은 오행어검(五行御劍).

해원기 오른손의 오행제림이 비록 진검(眞劍)이 아닌 검왕수라서 완전한 어검대법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또 그런 까닭에 오행의 순환이 반드시 끝까지 이루어진다.

수원광한, 등목구룡, 폭령진화, 대괴무극 다음으로 금광섬삭(金光閃爍)이 자연히 이르나니.

눈도 뜰 수 없는 찬란한 빛에 지면이 대패처럼 깎여나갔다.

낡은 사당을 목표로 한꺼번에 덮쳐들던 오십 명.

마린과 화산사봉도 막 검을 뽑아 막으려던 참인데.

명령을 내렸던 금장호위가 가장 먼저 변고를 눈치 챘다.

“키아앗!”

귀를 찢는 고함을 지르며 벼락같이 내뻗는 손에는 이 척 남짓한 반월도(半月刀).

그리고 그 반월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거대한 빛을 쪼갰다.

쾅!

운대봉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

“으음.”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옆으로 밀려나는 금장호위는 멀쩡하지만,

충격의 여파로 근처에 있던 자들이 십여 명이나 비틀거렸다.

당연히 이 놀라운 상황에 싸움이 멈추었고,

금장호위가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리는 말이 똑똑히 들린다.

“어검과 검강을 같이 쓰는 건 화산검협밖에 없을 텐데…….”

말을 맺지 못하는 건 노란 눈에 의혹이 가득하기 때문.

자신의 반월도가 쪼갠 이 거대한 빛이 어검으로 날린 검강, 즉 일종의 어검강이라고 여겼으나.

해원기에겐 검이 없잖나.

상황이 이상해졌다.

해원기가 오른손을 가볍게 털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검강으로 오인하는 금장호위의 혼잣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하마터면 군림검을 거두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어검대법이 더 강해졌다. 역상정위의 실체를 깨달은 후로.’

진평현에서 섬서로 오는 동안에 열심히 무공을 궁구하긴 했지만, 마린과의 비검을 거치고 나서 그 변화가 급격하다.

머리로 아는 것보다 마음으로 깨닫는 것. 심중덕을 먼저 이루었기에 상상지가 역순(逆順)으로 열려간다는 걸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생각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

시선이 금장호위의 손에 들린 짤막한 반월도에 머물렀다.

폭이 넓은 칼등은 직선, 예리한 칼날은 불룩하게 배가 나온 형태. 눈처럼 흰 도신에는 이슬이 맺혔고, 손잡이와 나뉘는 호수(護手)는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하다.

희귀한 보도(寶刀). 이 반월도가 군림검을 막아냈다. 비록 해원기가 마지막에 힘을 거두려고 애쓰긴 했어도.

“과연. 능상음설(凌霜飮雪)의 도. 사백력아(斯伯力亞)라는 지명이었던가, 귀국(鬼國) 사람이었군.”

박대정심을 목표로 머릿속에 채워두었던 수많은 지식.

어찌 된 일인지 알아냈다.

서리를 뛰어넘고 눈을 들이마신다는 칼. 서리와 눈은 전부 수기(水氣)의 변화다. 억제한 금광섬삭을 수기가 자연히 이어받으며 막아낸 것인데. 이런 칼을 얻기 위해 지독한 수련을 거치는 자들, 아득한 북쪽 빙천설지(氷天雪地)에 사는 일족에 관해 배운 적이 있다. 그러니 금장호위의 출신이 자연히 짐작이 가고.

금장호위의 눈가가 바르르 떨었다.

“사백력아까지 안다?”

중원에서는 보통 북해(北海)라는 통칭으로 부르지, 구체적인 지명을 아는 이가 없거늘.

그런데.

“호오, 그럼 호반빙궁(湖畔氷宮)의 요괴란 얘기잖아.”

‘사백력아’란 지명을 아는 이가 또 있었다. 냉정하고 야멸찬 청령선고의 목소리가 불쑥 들리자 해원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무가평 쪽이 생각보다 빨리 정리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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