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2화 (173/410)

제43장 낭왕호위(狼王護衛) (4)

지나치게 기쁘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욱경이 해원기의 손을 잡고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니, 본래 중간에서 소개하려던 청령선고가 얼른 나서주었다.

“자, 위 방주. 반가움은 나중에 다시 자리를 마련해서.”

“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뗀 위욱경. 그래도 흥분으로 물든 시선이 선뜻 해원기의 얼굴을 떠나지 못한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눈앞에 아직 많은 적도가 남아있는 상황까지 무시할 정도로.

해원기가 어색하게 눈인사를 덧붙이자.

청령선고가 오소민까지 손짓으로 부르며 말을 이었다.

“진자현은 가짜, 그리고 곡도장이라 자칭한 놈도 저기 누워버렸네. 그리고 남은 게 청랑도아강 두 자루, 사풍창을 날린 다섯.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는 졸개들. 내가 제대로 보았나요?”

해원기가 오소민에게 했던 말을 다시 정리하고,

굳이 해원기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실재 우두머리는 남은 두 놈일게요. 창을 날린 다섯을 직속으로 거느린. 여기는 결국 눈속임에 불과하고 진짜 주력은.”

슬쩍 오소민을 보며 일부러 말을 그치니.

“북봉을 노리는 거로군요.”

청령선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오 장로도 감이 좋아서 아이들을 먼저 보냈으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네. 해 공자가 가보는 게 좋겠어요.”

“음?”

해원기가 뜻밖이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도객 열둘을 쓰러뜨리긴 했으나 이제 막 싸움이 시작된 판. 그런데 해원기더러 여기를 떠나 북봉으로 가란다.

청령선고의 말이 제자인 아교처럼 빨라졌다.

“우리를 보자마자 화산의 좌우 장로를 언급했고, 나를 알아보고도 느긋했어요. 위 방주를 쫓았던 도객들도 그렇고. 이쪽으로 주의력을 분산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지. 저들이 노리는 건 본산. 이제야 주춧돌 깔고 기둥 세우려는 화산의 상징을 꺾을 셈, 마 장문인을 상대할 준비를 철저히 했나 보오.”

해원기, 위욱경, 오소민을 번갈아 보느라 말투가 오락가락하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가짜 진자현, 또 거짓 우두머리로 보이는 곡도장. 종남파의 장문인이 왔고, 비마방의 방주임을 알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간판만 내걸고 아직 지붕도 올리지 못했다’라고 조롱한 곡도장의 말처럼 현재의 화산파는 화산검협 마린 한 사람이 지탱하는 것과 진배없다.

삼백의 인마를 거느리고 남하했다는 장풍보. 그 주력은 마린을 꺾으려고 직행했을 터. 귀찮은 방해가 되도록 적을 시점에.

그런 계획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읽어내는 청령선고.

오소민조차 눈을 껌뻑거리며 고개만 끄덕였고, 감동을 억지로 삭이려던 위욱경의 얼굴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여긴 나와 위 방주, 그리고 오 장로면 되겠지. 요 아래 사잇길을 따라가면 바로 북봉이에요.”

판단은 정확하고, 결정은 신속하다.

청령선고가 가리키는 연화사와 무가평 사이의 좁은 길을 보면서.

해원기가 머뭇거리자.

오소민이 혀를 차며 그 어깨를 쳤다.

“쯧, 빨리 가. 철기의 잔당 몇에 오합지중이라며. 든든한 두 분이 계시고, 희 소협과 아교 낭자를 보낸 나는 걱정이 태산이라고.”

해원기의 성격을 잘 알기에 굳이 핑계를 대 재촉하는 것이지만.

상황을 보고하러 간 희지원과 아교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치잉.

비수처럼 짧고 보석처럼 영롱한 쌍잠이 서로 부딪쳐 내는 맑은소리.

그 소리에 자신을 보는 해원기에게 위욱경이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회, 해 공자. 가세요. 우리도 바로 뒤따를 테니.”

청령선고가 남자처럼 웃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위 방주의 천주검도(天誅劍道)를 구경하겠네. 그렇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경화청람(瓊華靑嵐)이라도 꺼내야겠는걸.”

치리링.

폭이 넓은 허리띠 안에서 풀려나오는 연검 한 자루. 검신이 청람이라는 이름처럼 검푸르다.

천주마검 공손무원의 천주검도.

영락검선이 장기간 연구한 전진(全眞)의 경화도해(瓊華圖解).

이 두 단어를 듣고서야 해원기가 마음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그럼. 음, 오 형.”

그래도 마지막엔 부탁의 마음을 담아 오소민을 한번 쳐다보아야 했다.

사부와 이어진 과거의 소중한 인연들.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해원기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청령선고와 위욱경. 보조를 맞추느라 오소민도 서둘러서 눈 한 번 맞추지 못했다.

무가평과 연화사가 화산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유가 바로 이 사잇길.

관도에 비하면 턱없이 좁지만, 그래도 몇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넓이고. 험준한 갈래가 무수히 겹쳐지는 화산에 어려움 없이 닿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 길을 따라 몸을 날리는 해원기의 눈이 비췻빛으로 물들었다.

신화검형(身化劍形)에 질풍결(疾風訣)까지 곁들인 엄청난 속도. 일각이나 지났건만, 먼저 떠난 희지원과 아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둘도 신속하게 보고하려고 전력을 다했겠으나.

‘남들이 모르는 샛길로 갔을 수 있지.’

희지원의 별호는 운대검. 바로 북봉의 이름을 땄으니 북봉 주위의 지리에는 익숙할 터.

그래도 적의 주력 바로 앞에 먼저 나서는 처지가 될까 걱정이 된다.

지리에 어두운 해원기로선 이 사잇길을 따라가는 방법뿐이다.

시선이 절로 하늘로 향했다.

무가평 쪽에 남은 세 사람, 먼저 북봉을 향한 두 젊은이. 장풍보의 주력은 얼마나 되고 어떤 자들일지. 마린과 화산파 제자들은 충분한 준비를 마쳤을지.

갖가지 생각이 몰려든다.

주위를 살필 넓은 시야가 필요한 때. 이럴 때야말로 동강이 필요한데.

진평현에서 보낸 심부름이 꽤 시간이 걸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찾는 신세. 그만큼 답답하고 초조해서다.

내공의 소모를 아끼지 않고 더욱 속도를 올리려던 순간,

해원기의 신형이 돌연 휙 뒤집혔다.

신왕공에다 보병청강의 힘, 동시안과 잠심침령이 고양되면서 강화된 청력에 미세한 소리가 걸렸다.

질풍이 선풍으로 바뀌어 공중에서 튕기듯 오른쪽의 절벽으로 부딪쳐간다.

우뚝 선 것 같다는 화산답게 깎아지른 절벽.

그러나 도끼로 마구 내리찍은 것 같은 그 절벽에 눈치 채기 어려운 틈이 있었다.

미세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바위틈.

“에구머니나니나!”

별안간 한 무더기의 돌개바람이 닥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외침이 터졌고,

해원기가 급히 경공을 풀어 틈새 앞에 내려섰다.

놀란 외침조차 콩을 쏟아내듯 바쁜 아교의 목소리다.

“해 대협!”

황망하게 아교의 입을 막으려던 희지원이 비로소 알아본다.

“괜찮소? 무슨 일로…….”

한참 숨을 참았던가. 두 사람이 길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내밀어 두리번거리는 모습.

“네, 그게.”

“이상한 자들이 있었어요. 유람객처럼 꾸미기는 했는데, 종자도 거느리지 않은 셋이 이 날씨에 전립에다 면사까지 하고. 이 멍청이, 아니, 희 소협이 빠른 길이 있다고 절벽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못 봤을 뻔. 눈치도 엄청 빨라서 일단 이 바위틈에 숨어 기척을 살피는 중이었죠. 언제 사라졌대? 장풍보가 또 여기에도 몰래 숨어들었나 싶어서. 어디로 갔지?”

다다다다. 아교의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말이 희지원보다 먼저 떠들어대지만,

시간을 줄이는 데는 이게 낫다.

그런데 ‘멍청이’라.

해원기가 입가에 맺히려는 쓴웃음을 지우고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던 중이라 간신히 들었던 바위틈의 소리, 희지원과 아교를 제외하곤 아무런 기척도 전해지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한낮. 날씨가 더워질 때거늘 겨울에나 어울릴 전립과 면사를 착용한 셋. 당연히 의심스러운 자들이다.

장풍보가 또? 그렇다고 해도 왜 단지 셋만 보냈을까?

해원기가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오. 희 소협, 서두릅시다. 장풍보는 북봉을 직접 노릴 셈이요.”

“에? 위남에서 오려면 이 길밖에 없는.”

“알겠습니다. 이 절벽을 넘어 산차(山岔)를 한 군데만 거치면 됩니다.”

이번에는 희지원이 아교의 말을 끊고,

‘멍청이’ 주제에 감히 턱짓으로 따라오라며 몸을 솟구치니.

아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해원기의 심각한 얼굴에 더는 가벼운 입을 놀릴 수 없었다.

어떻든 희지원을 만난 건 다행. 북봉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했고,

아교는 눈이 휘둥그레져 바로 곁의 ‘멍청이’를 쳐다보느라 바쁘다.

산줄기가 갈라지는 산차까지는 희지원이 앞장섰지만, 그다음엔 경공이 훨씬 빠른 해원기에게 방향을 알려줘 괜히 발목을 잡지 않으려 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희지원과 아교의 발밑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화산파는 요자번신, 종남파는 중천종령(中天鍾靈)의 경공신법. 그런데 아무 상관없이 그 바람이 둘의 몸을 계속 밀어대니.

계단을 밟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북봉 위로 올라가게 된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렇게 희지원과 아교를 이끌고 나아가던 해원기가 문득 허리를 퉁겨 일 장이나 더 높이 치솟았다.

“조심!”

평소와 달리 매섭게 경고하며 두 손이 날갯짓하듯 흔들렸다.

파파파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기가 종횡으로 뻗으면서,

“컥.”

“어억.”

몇 개의 숨 막히는 소리. 아직 희지원과 아교는 그저 봉우리 위까지 오르느라 딴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고.

겨우 운대봉 위에 발을 디디고서야 주변에 널브러진 네댓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부 상의 위에 짐승 가죽을 덧댄 장풍보의 수하들.

그리고 갑자기 봉우리 위에 뛰어오른 희지원과 아교에게 향하는 무수한 시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저절로 긴장된다.

운대봉은 뾰족한 꼭대기를 크게 베어낸 것처럼 널찍한 모양. 마린과 검을 겨뤘던 낙안봉의 단심원만큼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족히 수십 장에 이르는 원형의 평지 위에.

수십 명이 외곽을 채웠고, 그 가운데의 낡은 사당 앞에 마린과 화산오봉의 넷이 서 있다.

완전히 포위를 당한 광경.

그 포위의 한쪽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셈이니 시선이 모이지 않을 수 없다.

해원기가 날카롭게 상황을 살피고 옆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가려져 마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비스듬히 낡은 사당 쪽으로 늘어선 여섯. 고개를 돌린 건 다섯이요, 따로 앞에 선 하나는 여전히 마린 쪽을 향한 채.

“장문인께 불청객이 많이 온 모양입니다.”

침착하게 말을 건네자 비로소 마지막 하나의 머리가 살짝 움직였다.

“흠, 운대검 하나를 기다렸는데 왜 셋이지?”

나직한 음성이 조금 의아한 듯. 돌아보지 않고도 세 사람인 걸 안다.

마린이 못 들은 척 해원기에게 웃는 낯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러게 말이오. 이렇게 많은 불속지객(不速之客)이 급속(急速)하게 들이닥칠 줄은 몰라서. 접대가 부족할까 걱정이외다.”

불속지객은 불청객의 우아한 표현. 예상하지 못한 적의 기습에 당했으나 말에는 여유가 넘친다.

마린의 공경하는 말투가 의외였을까. 천천히 해원기를 향하는 얼굴.

남장에 커다란 모자를 덮어썼지만, 잔주름이 살짝 보이는 얼굴에는 수염 한 올도 나지 않았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

특이하게 노란 두 눈이 해원기를 훑는 동안 마린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엉뚱한 얘기를 하는 통에 아주 난감하군요. 장풍보의 주인에게 가야 할 물건을 본파에서 찾는답니다. 이제껏 보주인 장풍무명 진자현을 만난 적도 없건만.”

어처구니없다는 어감인데.

“흥. 진자현은 아무나 하는 각색일 뿐. 장풍보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들이.”

오십 대 여인의 입에서 비웃는 소리가 툭 튀어나왔고.

해원기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긴. 진자현은 벌써 두 번이나 봤군. 그럼 진짜 장풍보의 주인은 누구요?”

번쩍.

오십 대 여인의 노란 눈이 기괴한 빛을 뿜더니.

곁에 늘어선 다섯 명을 손으로 물리며 몸을 돌렸다.

“두 번이라. 낭왕(狼王)께서 화산검협 말고도 걸리는 자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니. 네놈은 누구냐?”

해원기가 잠깐 마린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낭왕? 처음 들어보는데. 남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자신이 누군 지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니겠소?”

마린도 모르는 이름인 듯. 장풍보의 진짜 주인이 바로 이 낭왕일까.

여인의 노란 눈이 흉하게 일그러지다가 날카로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호호호, 그래, 노신은 낭왕을 모시는 금장호위(金帳護衛)라고 한다. 어린놈이 뭘 믿고 건방을 떠는지 궁금하구나.”

찌르릉.

운대봉이 깜짝 놀란 듯 울고, 해원기 뒤의 희지원과 아교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급히 귀를 막는다.

대단한 공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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