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낭왕호위(狼王護衛) (3)
완전히 당했다.
마린이나 청령선고처럼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 이들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건만,
오소민이 어처구니없이 혀를 차는 이유를 해원기는 금방 알아챘다.
사건의 시작부터 그 내막을 계속해서 궁리해본 두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풍보의 내습은 바로 누군가가 사주한 일.
그것도 겁표의 세부적인 상황을 잘 아는 자가 지극히 교묘하게 꾸며댄 게 틀림없었다.
장풍무명 진자현은 산동에서 도둑질을 마친 후, 호중객잔을 이용해 은밀하게 산서로 넘어갈 계획을 세웠다. 함께 도둑질하고 똑같이 분배를 마친 나머지 여덟을 믿을 수 없었기에.
오죽하면 호중객잔에서 해원기를 보자마자 삼호니 칠호니 말투를 트집 잡았을까.
그런 진자현이 산서의 중심지인 태원에서 죽었다. 같이 죽은 일당에는 관아의 포쾌와 군부의 전령도 있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즉, 진자현은 산동에서 산서까지 와서, 다음 섬서로 넘어가기 전에 죽임을 당했고. 그 흉수는 같이 도둑질한 나머지 여덟 중에 있다는 의심이 당연하다.
그 의심에 딱 맞아 떨어지는 대상.
남편은 섬서 화산파 장문인이요, 부인은 산서 비마방 방주. 그리고 종남파 장문인이 이들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면.
‘가화함해’가 아니라 ‘재장가화’가 더 맞는 말일 수도.
진자현이 훔친 오리 알, 금오혈석으로 의심되는 그 돌멩이는 지금 해원기의 품에 있으니까.
누군가가.
기가 막힌 모략을 꾸몄다.
절대로 이 싸움을 피할 수 없는.
내막을 알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오해라고 해명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 오해가 오히려 해원기를 더 화나게 했을 뿐.
오소민을 향하려던 눈길이 날카롭게 곡도장에게 돌아갔다.
“구주정문이 하찮다? 도적 주제에 당찬 소리구나. 그래, 너희가 누구길래?”
왼발이 앞으로 나가면서 오른손이 옆으로 뻗고.
사라라랑.
그 손끝에 아지랑이로 엮은 비단이 풀리는 듯.
동시에 청령선고와 위욱경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막 연화사 쪽에서 넘어오던 오소민도 움찔 몸을 세워야 했다.
조금 전의 위압감과는 전혀 다른 느낌.
본능이 피하라고 한다. 위압(威壓)이 아니라 위험(危險)이니까.
정면으로 마주하던 곡도장에겐 더한 충격.
“윽.”
뭐에 찔린 것처럼 펄쩍 뛰면서 급히 곡도를 앞에 세우고,
“크으으응.”
그 악다문 입에서 불쾌한 웃음보다 더 흉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듯. 그 흉한 신음이 신호인지 나머지 열세 명이 곡도장의 옆으로 좌르르 달라붙었다.
똑같이 곡도를 얼굴 앞에 세운 자세. 해원기를 향해 곡도장이 가장 앞에 서고, 마지막 열네 번째가 가장 멀리 떨어진 사선을 이룬다.
처음 보는 기이한 진형이지만, 해원기는 거침없이 왼손이 그린 원을 무찔렀다.
발검제형.
위이잉.
투명한 유리검의 강기가 장대하게 뻗어 곡도장을 짓이길 듯.
곡도장이 입을 꽉 다물며 곧장 곡도를 휘둘렀다.
평범한 판도(板刀)에 비하면 형태는 더 많이 휘었고 폭은 더 좁은 칼. 빠르게 휘두르기에 적합하고 예리하게 베어내는 데 유리하다.
이미 해원기의 기권을 간파한 실력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검강을 정확하게 짚어내는데.
아무리 쾌속해도 폭이 좁은 곡도가 베어낸다기보다는 때리는 듯하다.
파파파파.
그리고서 연달아 울리는 파열음.
곡도장의 곁에 붙어선 도객들이 마치 뒤늦은 흉내에 급급한 것처럼 차례로 똑같이 곡도를 흔들고.
채 여섯 번째 도객에 이르기도 전에 검강이 사라졌다.
그러든 말든 해원기는 이미 손을 바꿔서 또 한 번의 발검제형을 쏟아낸다.
위이잉.
똑같이 장대한 검강이 사선의 끝, 가장 멀리 떨어진 도객을 향하고,
조금이라도 거리가 멀어선지 더욱 빨라진 제이격(第二擊).
예상하기 어려운 공격일 텐데.
곡도장이 막아낸 것에 힘을 얻었나. 그 도객도 서슴없이 나서며 또 곡도로 후려쳤다.
파파파파.
또 그 파열음.
발검제형의 거창한 검강이 찌른 건 분명 한 명이건만.
시차를 두고 흉내를 내는 것도, 여섯 번째에 이르기 전에 검강이 무산되는 것도 똑같다.
연속으로 쏟아낸 발검제형이 맥없이 스러지고,
“크르르릉.”
진짜 들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깔리면서,
들러붙었던 도객들이 좌우로 쫙 펼쳐졌다.
경적필패(輕敵必敗).
상대를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 사부에게 배운 교훈을 절대로 잊지 않는 해원기다.
그래서 사부는 여간해선 선공을 취하지 않았다. 물론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능력을 지니기도 했지만, 상대의 능력을 제대로 헤아리는 게 무엇보다 먼저다.
그걸 잘 아는 해원기가 처음부터 두 번의 헛손질.
과연 곡도장을 비롯한 열네 명의 도객이 당장 반격으로 나섰고,
날개를 편 것처럼 좌우로 짓쳐 들었다.
발검제형을 막아낸 곡도장과 마지막 도객을 앞세우고 양쪽으로 사선을 그린 채로. 가운데 두 명이 움푹 들어간 기러기 떼 같다.
짐승이 아가리를 잔뜩 벌리고 물어뜯듯이 곡도가 이빨이 되어 날아든다.
솨솨솨솨솨.
삭풍이 몰아치고 짙푸른 기운이 휘몰아치는 공간에 혼자 선 해원기. 단번에 난도질이 날 순간,
“흠.”
해원기의 입술 사이로 가볍게 새어 나온 기합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거듭 내뻗었던 두 손을 크게 휘저어 힘차게 당기자,
콰쾅!
“크악.”
“허억.”
갖가지 비명과 함께 짐승의 아가리가 거꾸로 찢겨 날아갔다.
비탈에 흙먼지가 치솟고 부러진 곡도의 파편이 폭죽처럼 날리면서.
시야가 흐릿해졌으나 해원기는 곧장 정면으로 미끄러지면서 두 손을 동시에 내질렀다.
세 번째 발검제형.
이번엔 선명한 검형이 실제로 드러난다. 손끝이 아닌 팔뚝까지 검으로 화한 것처럼. 두 자루가 정면을 찌르자 새파란 칼이 흙먼지 속에서 불쑥 일어났다. 두 자루가.
째쨍.
또 부러진 곡도를 따라 흙먼지 속에서 훌쩍 날아오르는 둘.
그리고,
피잇.
단창 다섯 자루가 한꺼번에 벼락 치듯 날아들었다.
펑.
흙먼지를 한꺼번에 날리는 폭풍. 해원기가 그 폭풍을 탄 것처럼 표표히 물러나는 모습이 비로소 보인다.
비탈을 아무렇지 않게 거슬러 올라 높은 곳에 발을 디뎠다. 연화사로 넘어가는 고개, 청령선고들이 있는 곳에.
해원기의 신분을 아는 청령선고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이니 처음 보는 위욱경은 마치 도깨비라도 쳐다보는 듯.
싸움이 시작되고 장풍보의 도객들이 열넷이나 몰려드는 데도 청령선고가 가만히 있을 때는 뭔가 대비가 된 줄 알았다. 당장 연화사 쪽에서도 잘생긴 청년이 또 등장했으니까.
그런데 싸움이 뭔지 알아볼 수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고,
자신을 추격하며 애를 먹이던 열넷 도객의 솜씨는 예상을 훨씬 넘는 수준.
그러다가 굉음, 비명, 또 폭음이 이어지더니 시야가 훤해지면서 해원기가 바로 옆에 내려섰다.
“청랑도아강(靑狼刀牙罡)에 사풍창(沙風槍). 철기의 잔당이 맞군요.”
위욱경에게 소개할 틈도 없다. 언뜻 정신을 차린 청령선고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청랑, 사풍. 과연 마 장문인의 예측이 맞았군.”
급히 옆으로 다가온 오소민도 묻느라 바쁘다.
“저들이 주력 같아?”
해원기가 바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곡도를 쓰는 열넷, 사풍창을 던진 말구종 다섯. 이들 외에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일 거야. 내공을 제대로 익힌 자가 거의 없네.”
“그렇군. 가짜 진자현을 내세운 것부터 수상하더라니. 선고, 제가 일단…….”
청령선고 역시 해원기의 말을 알아들은 듯 바로 말을 받다가.
“애들을 북봉으로 먼저 보냈지? 잘했네, 오 장로. 아!”
그제야 멍하니 해원기만 보는 위욱경을 의식하고,
“위 방주, 여기는 개방의 순행장로, 들어봤지? 유룡개라고.”
오소민부터 서둘러 인사를 시키려 했는데.
그녀의 냉정한 말투도 왈칵 터져 나온 위욱경의 목소리에 끊겨버렸다.
“그건, 검형수(劍形手), 묵 대협, 검주의. 아니, 그럼, 설마, 회에주?”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이 나와서 자신도 목이 멘 듯 끝부분이 확 뒤집혀 올라가니.
해원기가 살짝 몸을 돌려 손을 모았다.
“처음 뵙습니다. 해원기입니다.”
이름을 듣자 손이 먼저 나온다.
포권한 해원기의 손을 덥석 움켜쥐는 위욱경은 자신이 여전히 영롱한 비녀 두 자루를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그대로 손을 포개고선 마구 흔들어댄다.
“회주! 그래, 회주, 회주셨구나!”
격동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이 부딪칠 듯 다가와서 해원기가 난감해졌다.
때와 장소가 다 좋지 못하다.
사부가 세상에 날 때부터 지녔던 문제, 그건 천생살기(天生殺氣)였다.
그 지극한 살기는 고죽지보에 잠든 귀왕(鬼王)의 힘을 너무도 쉽게 현현하니까. 억겁의 업화(業火)처럼 타오르는 그 원한은 신왕공조차 사왕공(死王功)으로 바꿀 만큼 위험하기에.
검을 검대(劍帶)로 묶어 검집 채로 검법을 펼쳐야 했고, 이를 어지간히 귀찮아해서 마침내 맨손으로 검기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해내셨다나.
그 검형수를 다시 다듬은 건 제자인 해원기가 아예 검을 지니는 것까지 꺼렸기 때문이었다.
고죽지보인 이제검(夷齊劍)으로 구현했던 십대검상을 맨손으로도 가능하게.
그게 검왕수요, 그러면서 사부가 스스로 깨달은 심득(心得)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전해주었다.
얼마 전에 그 검왕오형의 네 번째인 역상정위를 펼치다 숨겨진 위력을 깨달았기에,
해원기는 새삼 검왕오형 전부를 다시 궁구했었고.
그래서 처음부터 선공을 펼쳤던 것이었다.
대우신장을 가볍게 넘겼던 자들, 유리검만으로 발검제형을 거듭해서 뻗어내자 과연 기이한 방법으로 강기를 무산시켰다.
딱 붙어서 똑같은 동작을 시차를 두어 행하고, 파열음이 차츰 잦아든다.
이건 하나의 진세.
유리검의 검강이 호수에 조약돌을 던진 것처럼 반동도 없이 소실되니 저 사선의 도진(刀陣)엔 힘을 나누어 흡수하는 효과가 있다는 뜻.
그게 가운데의 두 명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걸 두 번이나 확인했다.
그냥 강력한 찌르기로만 여겼던 발검제형의 본뜻,
말 그대로 검을 뽑아 길이를 잰다는 거다.
길이를 재면 상대와 나의 간격이 뚜렷하고, 간격이 뚜렷하면 검이 어디를 노려야 할지 자연히 정해지는 법.
그리고 검을 뽑았으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나?
다음의 정확한 공격을 위해 다시 거두어야(收) 한다.
발검제형에 숨겨진 비밀. 그건 바로 간격의 확인과 수발(收發)을 뜻대로 함이었다.
가운데의 두 명에게까지 분단된 힘은 본래 내가 뽑은 검.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다.
도진이 짐승의 아가리로 물어뜯으려 했을 때, 떨쳤던 검강을 거두어들이며 더욱 강하게 베고자 했고,
과연 열네 자루의 곡도에 남은 검강의 흔적까지 남김없이 호응해서.
곡도장이라고 자칭했던 자까지 열두 명의 곡도가 전부 박살이 나면서 쓰러졌다. 중앙의 둘만 빼고.
그들을 제압하려고 다시 뽑은 검. 간격이 좁혀지면 검도 따라서 짧아진다. 그것도 유리검이 아닌 본연검.
그런데도 중앙의 둘은 청랑도아강으로 기어이 막아내며 그 반탄력으로 빠져나갔고, 동시에 뒤를 끊듯이 다섯 자루의 단창이 한 점에 내리꽂혔다. 이 또한 사풍창이란 무공의 절초.
상황을 파악한 해원기가 잠시 이를 전하기 위해 물러섰을 뿐.
청령선고와 오소민에게 일러주어 판단을 맡기곤 다시 나설 참이었다.
남은 곡도는 두 자루, 그리고 단창을 날린 말구종 다섯. 몸뚱이가 백여 명이라도 머리를 잃으면 힘을 쓰지 못할 터인데.
비녀를 쥔 손에 잡혀서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