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70화 (171/410)

제43장 낭왕호위(狼王護衛) (2)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해원기 자신은 스스로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호중객잔에서 진자현을 상대했을 때는 아직 무림에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무고한 이를 괴롭히는 악당에 대한 징계였을 뿐.

억울하게 독살당한 화전민들의 마을을 불태우면서 그 복수를 다짐한 것도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내딛게 된 강호.

그리 내키진 않았으나, 일신에 지닌 능력으로 어렵지 않게 헤쳐나가리라 여겼었다.

함부로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다.

살생이 싫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사부에게 물려받은 이 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그러나.

그건 열 살배기 아이에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 치기였다.

세상과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세상에 살고 있었고,

남과 멀어지려 해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남을 돕는 무인이 되고 싶었다며?

더구나 그중에는 어떻든 얽힌 인연이 있음에야.

나에게 귀한 이들을 지켜야만 한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는가. 쓰이지 못할 배움이 무슨 소용이 있나.

세상을 버리고, 사람을 버리는 건.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

그걸 차츰 깨달아간다.

사부가 가르쳐준 무공 안에 뭔가 기묘한 비밀이 숨겨진 이유를 아직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새삼 자신이 배운 것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평현에서 섬서로 넘어오는 동안, 겉으로는 오소민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내부의 잠심침령은 계속해서 무학의 이치를 궁구하였고.

‘박대정심’의 목표가 새삼스럽게 선명해졌다.

필경 지금까지의 해원기는 잡박(雜駁)의 수준이었을 터. 육 년 가까이 공부에 게을렀다는 반성과 함께.

수차제에서 조화부인과, 낙안봉에서 마린과 싸운 것이 훌륭한 촉매가 되었다.

심중덕(心中德)을 먼저 깨우쳤기에 체내에 삼산(三閂)이 존재하지 않으나, 또 그런 까닭에 대지체(大地體)의 가공할 힘도, 상상지(上上智)의 영험한 지혜도 완전치 않은 해원기.

장풍무명 진자현의 정면에 나서면서,

이미 보병(寶甁)과 풍뢰(風雷)를 바탕으로, 잠심침령과 동시안을 쓰임으로 삼았다.

발이 땅을 밟자,

둥.

기슭에서부터 관도까지 무거운 음향이 울린다. 바짝 마른 흙바닥인데.

“명문 화산이 하찮은 무리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리 있을까. 좋지 않은 풍문이 들리기에 협명이 자자한 화산파 장문인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오던 길이었지. 섬북에만 머물던 장풍보가 무슨 이유로 화산을 범하는 것이냐?”

그리고 점잖게 건네는 질문.

진자현과 똑같은 용모의 인물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하들이 쫓던 자는 본래 중년의 여인. 남하하는 중에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고, 번번이 놓쳤으니 만만한 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 길목에서 기다린 자가 또 종남파 장문인. 장풍보와 종남산이 길쭉한 지형의 섬서에서 남북으로 한참 떨어졌긴 해도 빙령이라고까지 불리는 청령선고의 솜씨는 익히 들은 바.

평립을 쓰고 남자로 역용했던 중년 여인은 아마도 청령선고의 부탁을 받았거나 아는 사이로 추정된다.

백여 명의 수하를 거느렸어도 무턱대고 달려들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화산파는 만나지도 못했건만, 종남파 장문인이 등장했으니 이 무가평 주변에 혹시라도 매복이 있을 가능성.

그래서 일단 진군을 멈추고 속을 떠볼 셈이었는데.

청령선고와 중년 여인은 놔두고 어디서 천둥벌거숭이 같은 젊은 놈이 나선다.

평범한 용모에 허름한 옷차림. 떡하니 앞을 막는 기세야 좋다만, 마디만 한 쇳조각 하나 들지 않은 맨몸으로.

벌린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또 어디서 글공부라도 하다 왔나.

‘협명이 자자한 화산파 장문인’을 도우려고 온 의기 넘치는 젊은이라고?

“어이, 넌 뭔데. 아니, 좀 치워봐라. 어른들 얘기하는 데 방해가 되잖느냐.”

화도 나지 않아서 도리어 좌우를 보며 짜증을 부렸고.

그 때문에 해원기가 나설 때 울렸던 땅 울림을 깜빡 잊었다.

진자현의 좌우에서 수신호를 올렸던 장한 둘이 제꺽 고개를 숙이고 달려 나왔다.

챙.

한 소리로 뽑히는 두 자루 칼과 단숨에 십여 장을 뛰어넘는 날랜 신법.

상당한 솜씨다.

해원기가 늘어뜨린 두 손을 올려 자세를 잡기도 전에,

양쪽으로 나뉘어 들이치면서 각각 위아래를 노리는 칼이 순식간에 해원기를 난자할 듯.

“앗.”

위욱경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다,

펑.

폭음과 함께 내동댕이쳐진 두 장한의 모습에 입이 딱 벌어졌다.

신음 한 번 내지 못한 두 장한은 무슨 짐짝처럼 맥없이 나뒹굴고, 주인 잃은 칼 두 자루는 해원기 좌우의 땅바닥에 거꾸로 박혀 흔들리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보지도 못했다.

위욱경만이 아니다. 뒤에서 얼굴을 굳히고 있던 청령선고도, 짐짓 짜증을 부렸던 진자현도 눈을 치켜뜨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해원기의 좌우로 짓쳐 들던 칼잡이 둘은 왜 내던진 짐짝이 되어 돌아오고, 들었던 칼은 또 왜 해원기의 옆에 나란히 꽂혀있나.

무슨 수법인지, 아니, 손을 쓰는 것조차 못 보았다.

해원기가 바닥에 박힌 칼을 힐끗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은 비슷한데 실력은 영.”

그러면서 시선이 향하는 곳은 진자현의 뒤. 곡도를 들고 위욱경을 쫓았던 열네 명의 도객이다.

대우신장에 별다른 손해를 보지 않고 피하던 자들. 진자현의 좌우에서 공격해 온 둘이 이들과 같은 수준이라면.

양손에 검왕수. 오른손의 오행제림은 기수검봉, 왼손의 오귀전륜은 섬전.

오악검법과 절세오검에서 가장 빠르고 매서운 두 가지 검법을 써서,

처음부터 상대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다.

너무 과했을까.

열네 명의 도객과 비슷하게 폭이 좁고 완만하게 휜 곡도지만, 해원기의 몸에 닿기도 전에 빼앗겼고. 두 명은 검세에 휘말려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진자현의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이게, 무슨. 이놈! 무슨 사술을 쓴…….”

“역시 수상하다. 왜 이런 해괴한 짓을 하지?”

버럭 성을 내려던 말이 또 막혀버렸다.

해원기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얼굴을 겨누었으니. 평범한 얼굴에서 유독 기이한 광채를 띠는 두 눈이 똑바로 진자현을 향한다.

“기질이 달라. 전에는 상당히 음험하고 치밀해 보였는데, 지금의 너는 소리만 질러대는군. 말은 겨우 다섯 필, 대오가 정연하긴 해도 먼 길을 치달린 것으로 보이진 않고. 나머지 이백은 어디 있느냐?”

목소리가 엄격해지면서.

진자현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수염이 아니라 입술이 떨리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

이번엔 노해서가 아니었다.

진자현 혼자만이 아니라 손나팔을 불던 둘과 정연하게 대오를 갖춘 백여 명 모두. 뭐에 맞은 것처럼 술렁거리고.

심지어 위욱경과 청령선고까지 미간에 힘이 들어간 건.

일종의 위압감 때문이었다.

해원기의 전신에서 퍼지는 기세가 마치 태산과 같아서 절로 압도된다.

무가평에서 연화사로 향하는 곳. 관도에 이어진 기슭은 해원기가 땅을 힘주어 밟았을 때부터 장악당한 셈이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정통으로 해원기의 시선을 받는 진자현은 더욱.

해원기는 진자현의 수족이랄 수 있는 좌우의 칼잡이를 단 한 번 겪고서 이상함을 깨달았다.

섬북에서 한참 먼 산동까지 와서 직접 도적질에 가담했던 진자현이다.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하려고 인원을 최소화하고 알려지지 않은 호중객잔을 이용할 계획까지 짜면서.

그런 성격은 당연히 무공에도 반영되기에 황풍절호수와 탈명은편을 엮어 쓰는 암습에 능했거늘.

데리고 온 수하, 말 다섯 필, 그리고 기운차게 함성을 지르며 뛰는 백여 명. 모조리 어울리지 않는다.

청령선고가 일러준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해괴한 짓을 하는 것들은 반드시 구린 구석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진자현을 추궁한 건데.

“그만 물러나라. 쓸모없는 것.”

진자현 대신에 엉뚱한 목소리가 나왔고, 그러자마자 진자현과 손나팔을 불던 둘이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우르르 물러난다.

해원기의 눈이 자연히 목소리가 나온 곳을 향했다.

열네 명의 도객 중 가장 왼쪽에 섰던 자. 단단한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초로의 인물이 혀를 차며 곡도를 흔들었다.

“이쯤이면 화산검협은 몰라도 좌우 장로 따위는 나올 줄 알았는데. 쯧쯧, 종남파를 끌어들일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드러낼 줄은 몰랐구나.”

귀에 거슬리는 음성.

턱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 입을 거의 벌리지 않은 채 말을 내뱉어서 마치 이를 가는 것처럼 불쾌한 말소리다.

과연 해괴한 짓 속의 구린 구석. 그런데 뭘 드러냈다는 건가.

초로의 인물이 흔들던 곡도를 쳐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말이 좋은 단서가 되었지. 그러지 않아도 저 남장여인이 예홍쌍잠인 걸 알고는 더 의심스러웠던 참이거든. 화산파가, 화산검협 마린이 확실하구나. 으하하하.”

해원기를 겨누었다가 위욱경을 겨누었다가.

그리고는 갑자기 터뜨리는 광소가 주위를 쩌렁쩌렁 울린다.

대단한 공력.

청령선고와 위욱경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히는데.

해원기는 또 그새 은근히 바뀌는 뒤쪽에 주의했다. 장풍보의 깃발을 휘날리던 자들이 슬금슬금 뒤로 빠지고 되레 전면으로 나서는 자들은 말들을 치우던 말구종 다섯. 대형을 바꾸면서 풍기는 분위기도 변한다.

칼 두 자루가 저절로 부러지는 쇳소리에 광소가 그쳤다.

“의심스럽고.”

쨍.

“확실하다는 게.”

쨍.

해원기가 한마디 할 때마다 땅에 박힌 칼이 한 자루씩 부러져나간다.

“무슨 말이냐?”

진자현을 가리켰던 손이 왼쪽으로 기울고, 두 눈 깊이 신광이 피어오르면서 주위를 위압하던 기세가 한꺼번에 몰려들자.

초로의 인물이 쳐들었던 곡도를 힘차게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까불지 마랏! 이 곡도장(曲刀長)에겐 기권(氣圈) 따위 소용없어.”

곡도를 쓰는 자들의 우두머리라서 곡도장인가. 허공에 칼을 휘둘러 위압을 걷어낸 곡도장이 거칠게 침을 내뱉었다.

“퉷! 뻔한 걸 모른 체할 셈이냐? 예홍쌍잠은 산서 비마방의 주인, 그리고 화산검협의 마누라지. 명문정파입네, 전통의 구주정문을 재건합네 하면서 사실은 엉뚱한 욕심을 냈더란 말이지? 처음부터 화산과 종남이 짜고 친 판이었겠구나. 그렇게 우리 장풍보의 뒤통수를 쳐서 둘이 하나씩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다? 간판만 내걸고 아직 지붕도 제대로 얹지 못한 주제에 감히.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흐흐흐.”

여전히 듣기 거북한 음성이 낮은 웃음까지 더하니.

마치 들짐승이 흉하게 이를 가는 것 같다.

“음.”

그러나 그 웃음보다 그 내용에 해원기가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이 곡도장이란 자. 해괴한 짓의 구린 속내가 분명하건만, 거칠게 침을 뱉고 흉한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 담겼다.

뭔가 초점이 어긋난 대화.

진자현과 똑같이 생긴 자를 앞세워 화산을 쳐들어온 이유가 이상하다. 그 말에 따르면 이건 일종의 보복.

위욱경의 신분을 알면서 더 의심스러웠고, 해원기의 말에 확실해졌다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화산과 종남이 짜고 사이좋게 나눠 가진다? 뭘?

적을 앞에 두고서도 해원기의 머리가 뒤로 돌아가려고 한다. 무슨 소린지 감이 잡히지 않으니 위욱경이나 청령선고를 찾게 되는데.

“이거, 골 때리네. 대체 어떤 놈이 이런 머리를 썼지? 재장가화(栽贓嫁禍), 아니지, 가화함해(嫁禍陷害)가 정확하겠군. 완전히 당했어. 쳇.”

때마침 낭랑한 목소리가 해원기를 구원하듯 전해졌다.

연화사에서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던 오소민.

그리고 오소민이 언급한 두 개의 성어. 재장가화는 장물을 남의 집에 숨겨두어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뜻이요, 가화함해는 남에게 화를 넘겨 모함한다는 의미니.

해원기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환해지고,

눈썹이 불끈 치솟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