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장 낭왕호위(狼王護衛) (1)
해원기가 갑자기 뛰쳐나갈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시력, 청력뿐 아니라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오소민이라서.
얼떨떨한 희지원을 놔둔 채 먼저 온 신경을 귀에 쏟았고.
간신히 수십 장 밖의 소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청령선고의 감탄이 끝나기 전에 서둘러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은 방금 희지원이 설명했던 지점.
“저쪽, 조망하기 좋다고 한 연화사 쪽입니다.”
당장 해원기의 뒤를 따르고 싶었지만,
오소민은 어설픈 애송이가 아니다.
안내를 맡은 희지원이 있고, 종남파 장문인 청령선고와 제자인 아교가 있는 상태.
임시로 이루어진 선발대라도 우두머리는 역시 청령선고여야 한다.
감탄을 그친 청령선고가 또 묘한 눈길로 오소민을 보곤 사납게 올라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형, 인원, 상황.
차가운 음성이 빠르게 돌아온다.
“유리한 곳을 선점하려고? 흠, 만만치 않지만, 일단 상대를 확인해야겠지. 오 장로가 지원이와 아교를 데리고 연화사 쪽으로.”
“에? 사부님은요?”
말 빠른 아교가 당장 끼어들지만,
“나는 해 공자의 뒤를 받친다. 너희 둘은 오 장로의 지시에 따라. 됐나?”
마지막은 오소민에게 묻는 말.
오소민이 마른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자신이 해원기의 뒤를 받치고 싶지만, 이 자리에서 다른 말을 꺼내기도 그렇다.
더구나 희지원과 아교를 맡긴 건 여차하면 둘을 화산에 보내라는 뜻. 상황에 따라선 화산에 연락할 사람이 필요하고, 만일의 위험도 고려해야 한다.
오소민이라면 충분히 그런 결정을 내릴 만하다고. 그렇게 인정해준 셈이니.
가타부타 따질 여유는 없다.
“알겠습니다. 음.”
그래도 말이 딱 끊어지진 않았고,
노려보는 듯한 청령선고의 시선에도 한 마디를 덧붙이고서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해형을, 부탁합니다.”
희지원과 아교의 양쪽 소매를 낚아채고 무가평의 외곽을 따라 뛰기 시작하자,
청령선고가 그 뒷모습에 눈꼬리를 살짝 내렸다가,
“흥.”
의미 모를 코웃음과 함께 곧장 몸을 날렸다.
당연한 얘기라서 어이없었나.
처음엔 백 장 밖의 경미한 소음이,
몸을 날리자마자 십여 장이나 가까워진다.
고함과 욕설, 그리고 경력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 해원기의 경공이 아무리 빨라도 이렇게 소리가 급격히 다가올 수는 없다.
누군가 이쪽으로 쫓겨오는 것.
초상비에 육지비행술까지 더해 단숨에 오륙십 장을 뛰어넘은 이유다.
과연 무가평의 끝, 넓은 관도가 북쪽으로 휘어지는 어림에서 싸우는 현장을 찾았다.
십여 개의 인영.
마치 메뚜기 떼처럼 이리저리 튀어 오르고, 날카로운 빛과 거친 바람이 어지럽게 뒤엉킨다.
전부 짐승 가죽을 덧댄 상의에 긴 장화를 신었고, 하나같이 도신이 휘어진 곡도(曲刀)를 지닌 자들.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양팔을 빠르게 휘두르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틈을 찾는다.
챙이 넓은 죽립(竹笠) 위로 긴 머리칼이 흔들리고, 소매와 발목을 단단히 조인 갈의 단삼이 경쾌한 동작에 어울린다. 두 손에 든 건 짧은 단검, 아니, 단검이라기보다는 비수로 여길 만큼 짧은 병기. 그러나 그 짧은 병기가 빛을 뿜을 때마다 십여 자루의 곡도가 거꾸로 밀려나고, 곡도의 주인들이 피하느라 바쁜 판.
그래도 한쪽은 피하려 하고, 또 한쪽은 발을 묶으려는 의도라 쉬 결판이 나지 않는다.
기묘한 광경.
그렇다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해원기가 몸을 뒤집어 내려서면서 대우신장을 가운데 밀어 넣었다.
“멈춰라!”
펑.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는 곡도는 모두 열네 자루.
해원기가 미간을 모으며 주위를 훑었다.
비록 힘을 다하진 않았어도 공간을 통째로 밀어내는 대우신장이다. 단 한 명도 칼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몸을 세우는 자세도 전혀 흔들리지 않으며.
한쪽으로 몰아낼 요량이었건만, 사방으로 퍼져 크게 포위한 형국이 되었다.
대우신장의 경력을 힘으로 부딪치지 않고 적절히 이용했다는 의미.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가운데에서 협공을 당하던 죽립의 인물이 급히 고개를 돌려서,
해원기와 서로 눈이 딱 마주쳤으나.
둘 다 동시에 표정이 묘해졌다.
“누구……?”
“수염이……?”
죽립의 인물은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하다가 낯선 해원기의 얼굴에 의아해졌고,
해원기는 죽립 아래의 이상한 얼굴 때문에 당황했기에.
대나무를 평평하게 엮고 정수리 쪽에 구멍을 낸 평립(平笠)을 쓴데다가 손목과 발목을 천으로 바짝 감은 갈의 단삼을 걸쳐서 얼핏 표사(鏢師)로 보이는 차림새요, 생김새도 흰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드물게 보는 미중년(美中年)인데.
양쪽으로 멋지게 기른 콧수염은 한쪽만 남았고, 짧은 턱수염은 거꾸로 뒤집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간당거리니.
해원기의 손가락이 저절로 그쪽을 가리키게 되고,
죽립의 인물이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아, 이게.”
얼른 입가를 가리는 통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런 자리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마침 두 사람 다 아는 목소리가 때맞춰 날아들었다.
“해 공자, 어? 위 방주!”
“선고?”
“장문인.”
깜짝 놀란 죽립의 인물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 보다 몇 장 높은 곳으로 내려서는 청령선고가 보였다.
해원기는 미리 알았었는지 대답만 하고 얼른 주위를 경계하는 자세.
청령선고가 눈을 깜빡이며 좌우를 훑어보았다.
“위 방주가 왜 여기. 저자들은 누군데?”
죽립의 인물도 바로 시선을 되돌려 청령선고를 등진 채 빠르게 대답했다.
“장풍보야. 위남을 벌써 지났더라고. 바로 뒤에 무더기로 따라와.”
입을 가렸던 손이 남은 가짜 수염을 한꺼번에 뜯어낸다.
위남 근처까지 갔다는 의미. 상대의 병력을 파악하자마자 들켜서 이렇게 추격을 받았다는 말이다.
뒤늦게 도착하면서 좀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청령선고도 노련하지만,
수십 리를 달렸을 터인 죽립을 쓴 인물의 대응도 침착하다.
미간을 모아 위남 쪽으로 멀리 시선을 보내는 해원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위 방주.
가짜 수염 밑에는 꽤 단아한 중년 부인의 얼굴이요, 열네 명을 여유 있게 상대하던 두 손의 짧은 병기.
비마방주인 예홍쌍잠 위욱경임을 짐작했다.
청령선고가 나타나고, 위욱경과 몇 마디를 나누자.
넓게 포위했던 열네 명의 도객이 돌연 뒤로 빠지고, 그 뒤로 뽀얗게 피어나는 황진.
두두두두.
힘차게 달리는 말 다섯 필을 확인하자마자 그 위에서 다섯 개의 인영이 유성처럼 날아들면서.
와아아!
곧이어 엄청난 함성과 함께 백여 명이 관도를 덮으며 달려오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진시에서 사시로 넘어갈 즈음이니 아직 아침이라고 할 수 있고, 여름철의 태양이 뜨거워질 무렵이건만.
백여 명이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살벌한 모습에는 누구나 등골이 서늘할 터.
위욱경과 청령선고의 말문도 닫히는데.
해원기는 도리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마상에서 뛰어오른 다섯 개의 인영이 해원기를 비롯한 세 사람을 확인했는지, 동시에 공중제비를 넘으며 열네 명의 도객 앞에 떨어져 내린다.
가운데의 인물이 해원기부터 위욱경과 청령선고의 얼굴을 차례로 쳐다보고,
좌우의 인물이 손을 번쩍 쳐들자 양쪽 끝의 인물이 손을 말아 입에 대고 힘차게 불었다.
뿌우.
마치 나팔처럼 묘한 음향. 그게 신호인 듯 달려오던 백여 명의 함성과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정연하게 늘어서는 수십 장의 깃발. 말구종들은 다섯 필의 고삐를 잡아 뒤로 빠지고, 장풍(長風)이라고 수놓은 깃발들을 따라 갖가지 병기를 든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유지하니.
이 정도면 거의 군(軍)이라 할 만하다.
그걸 확인하는 자도 양쪽 끝에서 손으로 나팔을 분 두 사람뿐.
가운데의 인물과 좌우에서 손만 쳐든 자들은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만큼 숙련되었다는 자신감.
함성이 마침내 잦아든 후에야 가운데의 인물이 짧은 말채찍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렸다.
“알아볼 만한 얼굴은 하나뿐이군. 종남파도 끼어들었는가?”
함성이 없더라도 잘 들리지 않을 혼잣말. 가장 뒤, 가장 높은 곳에 선 청령선고를 알아보고 멈췄다는 거다.
그 말채찍이 슬쩍 올라가 위욱경을 가리키면서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동천(銅川)과 백수(白水)에도 기웃거렸다는 보고가 있었지. 이제 보니 계집이었네. 이 앞의 어린놈도 그렇고, 전부 화산파의 기록에는 없는 낯짝들이라. 흠.”
흥미롭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 건방진 모습에 청령선고가 차가운 목소리를 높였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너는 장풍보에서 뭐 하는 녀석이냐?”
본래 냉랭하기로 이름난 청령선고다. 그야말로 대군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는 상대에게 기가 죽을 리 없는데.
대뜸 아래로 깔고 묻는 말의 답은 엉뚱하게 해원기의 입에서 나왔다.
“장풍무명 진자현. 똑같군.”
해원기의 시선은 계속 가운데 인물의 얼굴에 머물렀다.
좌우에 선 자가 수신호를 하든, 양쪽 끝이 손나팔을 불든, 심지어 백여 명의 무리가 군처럼 대형을 유지하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당당한 체구에 바윗덩이처럼 단단한 용모. 분명히 호중객잔에서 제압했던 진자현이다.
그러나 증명단이 분명히 죽었다고 했었고,
지금 눈앞의 이 진자현은 해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니.
해괴한 일이다.
가운데 인물이 청령선고를 보던 시선을 해원기에게 옮겼다.
“호오, 내가 누군지 안다? 차림새를 보니 너나 저 계집이나 종남파는 아니고. 화산파가 어디서 희한한 방수(幇手)를 구해왔구나. 그래, 너희 내력이나 읊어보아라.”
해원기와 위욱경이 한패로 보이는 모양.
거만하게 묻는 말에 해원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위 방주께 인사는 나중에 드리지요. 장풍보 무리가 삼백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화산에서 청령선고가 밝힌 장풍보의 규모는 위욱경이 제공한 정보였다.
떡하니 적의 우두머리 앞에 서서 태연히 무시하는 태도에,
위욱경이 기이한 눈으로 해원기를 보다가 얼른 말을 받았다. 청령선고가 도착했을 때 ‘해 공자’라고 불렀으니 아는 사이.
“맞소. 동천에서 위남으로 내려올 때는 분명히 삼백 정도임을 내 눈으로 보았소.”
확답을 받은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자현에게 얼굴을 돌렸지만,
여전히 진자현의 물음에 답할 생각은 없는 듯.
“선고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은 반드시 구린 구석이 있습니다. 자세히 살폈으니 날뛰기 전에 눌러놓는 게 좋겠군요.”
청령선고가 해준 말과 아교를 꾸짖던 종남의 훈계까지 아울러 입에 올리면서.
또 성큼 한 걸음.
오른손을 올리며 가볍게 혀를 찬다.
“쯧, 이번에도 손가락 하나면 맥 빠지는데.”
중얼중얼. 무슨 소린지 여기서 알아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검왕수의 기수식인 일지광한에 유리검을 꺼낸 것만으로 진자현을 단번에 제압했었던 과거.
그때와 달리 좌우에 두 명씩, 바로 뒤에는 열네 명의 도객, 그 뒤에는 백여 명의 대군이 몰린 상황이지만.
해원기에게는 호중객잔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