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8화 (169/410)

제42장 여중호걸(女中豪傑) (4)

“화산이 떨치고 일어서는데 종남의 장문인이라는 자가 뒤꽁무니를 뺄 수야 없지.”

청령선고가 당연하다는 듯 일어섰고,

“표물을 겁탈한 도적이요, 그 장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났답니다. 게다가 철기의 잔당이라는 혐의까지. 이건 강호에서 빌어먹고 사는 거지라도 당장 나서야 할 일이로군요. 어때, 해 형?”

오소민도 개방 장로라는 신분에 걸맞은 이유를 대자,

해원기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마린이 잠깐 난감한 표정으로 해원기를 보긴 했지만,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나.

한 사람은 종남파의 장문인, 한 사람은 개방의 장로, 또 한 사람은…….

오히려 든든한 동료가 불어났으니 기뻐할 처지.

“그럼 지원이를 붙여 길을 안내하도록 하겠으니. 제가 도착하기 전에는 멀리서 살펴보는 거로. 선고께 부탁드립니다.”

화산파 전체에 소집령을 내린 참이다. 장문인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그저 청령선고에게 은근한 당부를 남기고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원궁 안의 모임이 파하고,

급히 불려온 희지원을 앞세워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앞에는 희지원과 아교, 그다음에는 해원기와 청령선고, 그리고 어쩐 일인지 몇 걸음 처져서 혼자 뒤를 따라오는 오소민.

굳이 후미를 경계할 필요가 없는 화산 경내요, 산길의 폭이 그리 좁지도 않건만.

“그럼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따르르. 아교의 빠른 말이 나오자 희지원이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오운봉 아래로 돌아 서차(西岔)로 빠지면 꽤 넓은 들판이 나옵니다. 무가평(武家坪)이라는 곳인데 소화산(少華山)과 연화사(蓮花寺) 사이에 있지요. 위남에서 화산으로 오는 도중에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라.”

미리 마린에게 지시를 받은 장소. 화산파 전체가 남봉에 모이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일행은 그들보다 먼저 길목을 지켜 상대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는 척후인 셈. 희지원은 산을 빠르게 빠져나갈 지름길을 잘 아는 듯하다.

“어차피 화산 주위는 대부분 화음현에 속하는데. 그냥 길목에 눈 밝은 사람 몇 뿌려놓고 남봉에서 내려다보면 될 일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교의 종알대는 입이 꽤 튀어나왔다.

화산과 종남이 꽤 멀리 떨어졌어도 같은 섬서이니 아교 역시 어느 정도 지리를 알 터.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새벽 댓바람에 사부에게 끌려 화산까지 올라왔는데, 이제는 도로 서둘러 내려가야 할 판이니.

“고 주둥아리!”

당장 청령선고의 꾸중이 날아들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목을 긁는 아교의 뒷모습을 흘겨보다가, 옆의 해원기를 의식해서인지 한숨을 내쉬고,

“후, 남의 흉보려다가 내 눈곱 붙은 거 모른다더니. 딱 그 모양이네. 해 공자에게 민망해서, 원.”

속담을 들먹이며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화산파 앞에서는 장문인이고 장로고 꼼짝 못 하게 쪼아대더니만.

“대강 이런 꼴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사부님도, 나도 질색하며 꾸짖는 게 일상이었지만, 산에 틀어박혀 살면 아무래도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겠지요. 이걸 사부님은 자신기산(自神其山)이라고 싫어하시는데.”

자기가 거처하는 산만을 신령하다고 여긴다는 말.

오직 자기만 존대하게 여기고 그 틀에 박혀서 남이나 산 밖의 세상은 무시하려는 경향을 한탄하는 의미다.

화산파만이 아니다.

나이 어린 아교의 불만 섞인 종알거림이었지만, 거기에는 똑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청령선고의 변명 같은 말에 해원기가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진인(眞人)께서는 강녕하십니까?”

“아, 그럼요. 기력이야 많이 쇠하셔서 문밖출입은 삼가시지만, 제자들 꾸짖으실 때는 뇌성벽력이 치는 듯하지요. 해 공자를 만나면 아마 대단히…….”

사부 얘기에 얼른 미소로 답하던 청령선고가 말을 흐리더니 얼핏 앞에 있는 희지원을 본다.

자신이 사부를 언급해서 해원기가 물었다기보다는, 그 질문의 어감이 조금 무거웠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미소가 고소로 바뀌고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원이가 벌써 해 공자에게 알렸겠군요. 해 공자는 화산 사람이 아니니까.”

본래 영민한 여인이다.

해원기가 불쑥 자기의 사부인 영락검선의 안부를 묻는 배경을 단숨에 유추해낸다.

해원기가 뒤에서 따라오는 오소민을 돌아보곤 고개를 숙였다.

“네. 전혀 몰랐습니다. 저도 오 형도.”

화산파 장문인인 마린에게도 알리지 않은 소식, 천주마검 공손무원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청령선고는 알고 있었다.

어두워진 해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청령선고가 슬쩍 소매를 당겼다.

앞에 선 희지원과 아교보다 늦추는 걸음, 뒤의 오소민에게 더 가까워졌고.

청령선고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음, 이쯤에서 미리 말하는 게 나을 듯하군요. 남의 집안 얘기를 입에 올리기는 싫지만. 공손 노사도, 사부님도 걱정하시는 일이니까. 하아.”

짧은 탄식도 앞에 있는 애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얼른 삼킨다.

지금의 중년인도 젊었던 때가 있었다.

강호 무림의 신성(新星)으로 주목받던 시절, 십삼수(十三秀)라고 일컬어졌던 후기지수(後起之秀)에 이름을 올린 두 사람.

한 사람은 어디 출신인지 알려지지 않은 채 거창한 검을 냉혹하게 휘둘러 절정검이란 외호를,

또 한 사람은 산서의 오래된 흑도 방파인 비마방 출신으로 준미한 외모에 날렵한 솜씨를 지녀 옥마란 외호가 붙었다.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절정검은 화산의 서악제일검과 종남의 영락검선을 공동사부로, 옥마는 천주마검을 사부로 두었으니.

똑같이 봉검(封劍)의 약속을 지켜 사십 년간 세상과 떨어져 산 종횡강호십팔마검의 검객들이었다. 과거를 회오(悔悟)하고 참된 검의 길, 아니, 참된 인생을 스스로 깨우친 이들.

그중 서악제일검이 주화입마에 든 제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살린 숭고한 최후에, 영락검선은 눈물을 뿌리며 공동제자인 절정검을 화산파에 양보하기로 했고, 천주마검은 절정검이 다시 깨어날 때까지 서악제일검의 시신을 품에 안고 지켜주었다.

그런 감동 때문이었을까.

주화입마를 극복하고 단숨에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 절정검을, 천주마검은 난세의 거듭된 격전 속에서도 돌봐주었고.

그렇게 절정검과 옥마는 자연스레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화산파나 비마방이란 배경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던 때다.

정사마(正邪魔)의 분별은 출신이나 무공이 아니라, 그 마음과 뜻이 정한다는 걸 누구나 알았기에.

그렇게 서로 의지하는 좋은 벗이 되었는데.

우연히 밝혀진 사실. 옥마는 본래 남장여인이었다. 위욱이란 가명으로 남자 행세를 하던 위욱경이란 소녀.

놀라운 일이었으나, 좋은 벗이 서로 아끼는 정려(情侶)로 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영웅과 미녀가 한 쌍의 부부가 되는 무림가화(武林佳話)가 모두의 축복 속에 탄생한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긋난 건지는 알 수 없지요. 마 장문인은 화산을 재건하느라, 위 방주는 비마방을 이어받느라 서로 바빴으니까요. 해 공자가 짐작했겠지만, 화산은 풍림당의 문제가, 비마방은 위 방주의 사형들이 연달아 사망하는 일이 생겨서. 지원이를 화산에 보낸 후로 위 방주가 아예 인연을 끊다시피 한 게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남녀의 정은 알기 어렵고, 부부 사이의 일은 당사자밖에 모른다.

같은 깨우침을 얻고 같은 길을 걷게 된 검객들을 사부로 모시고, 난세 속에서 서로 의지하는 벗으로 지냈으며,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부부의 연까지 맺었으나.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맞대지도 않는다.

오 년 전에 죽은 천주마검 공손무원의 부고를 아예 입막음해서 알려주지도 않을 정도로.

사랑(愛)한 만큼 미워(憎)한다던가.

해원기나 뒤에서 자연스레 듣게 된 오소민이나.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묵묵히 듣고만 있고.

청령선고가 또 짧게 한숨을 흘렸다.

“후, 사부님과 공손 노사 두 분 모두 항상 마 장문인 걱정을 많이 했지요. 서악제일검 대(戴) 노사를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그러다 위 방주와 혼인하자 마치 큰 짐을 놓은 듯이 기뻐하셨어요. 그러니 그분들께 안 좋은 얘기를 들려드릴 수는 없었답니다. 하물며 감히 정사흑백(正邪黑白)의 차이란 말은 차마.”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구주정문의 종남파든 산서 흑도의 비마방이든. 진정한 사마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노검객들에겐 그야말로 피로 맺은 형제와 같거늘. 지금 이 얘기를 하는 청령선고도 벽세의 주구에서 정도로 돌아선 사람이다.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정파니 마도니, 흑이니 백이니 하는 구분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걸 뼛속 깊이 느낀 이들.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한 쌍의 정려가 기어이 헤어지게 되었다는 걸 이제는 조용히 노후를 보내어야 할 웃어른들께 아뢸 수는 없을 것이다.

“음.”

오소민이 입을 가리며 신음을 목으로 넘겼다.

청령선고의 얘기에 황연히 깨닫게 된 부분.

“공손 노사는 마 장문인의 옛 사부였던 진인을, 진인은 또 마 장문인의 악장(岳丈)이 되신 공손 노사를 믿으셨겠군요. 화산파는 아무 걱정이 없을 거라고.”

화산과 같이 섬서에 있는 종남산. 거리는 두 시진 남짓. 영락검선이 있는데 누가 정통성을 두고 시비를 걸겠나.

화산에서 산서로 넘어가 두세 시진만 달리면 닿는 비마방. 천주마검이 있으니 감히 신생 화산파를 건드릴 종자가 있을까.

그렇게 밖으로만 신경을 썼으리라.

청령선고가 새삼스럽게 고개를 돌려 오소민을 보다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오 장로는 아주 예민하구만. 맞아, 든든한 버팀목이 있으니 금방 과거의 위용을 회복할 거라고 여긴 거지. 밴댕이 소갈딱지들이 모여서 속이 곯을 줄은. 흠, 조금 전에 아교가 종알댄 소리도 딱 그거야. 에휴.”

이번에는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탄식한 듯.

앞에서 머리도 돌리지 못한 채 귀만 쫑긋 세우고 있던 아교의 등이 다시 움찔하자,

“요 계집애. 산(山)이 무슨 성(城)이더냐? 어찌 그리 생각이 꽉 막혔을꼬. 네 사조께서 세우신 십이훈조(十二訓條)의 두 번째!”

평소의 차가운 음성이 매몰차게 울리고, 당장 아교의 옴츠렸던 목덜미가 바짝 일어섰다.

“우선세찰(于先細察), 방기미연(防其未然)입니다.”

미리 자세히 살펴서, 일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막는다.

대답은 제꺽제꺽. 청령선고가 버릇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흥, 말은. 지원이랑 함께 속도를 올려라. 화산 구경할 생각 없다.”

“네.”

“넵.”

괜히 불똥을 맞은 격이 된 희지원의 대답이 더 크고, 두 사람 다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이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갈 상황은 아니다.

잠시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던 청령선고가 손을 들어 청하면서,

“그런데도 위 방주는 언제나 이쪽 상황을 마음에 두었던가 보죠. 지원이를 북봉에 앉히고서 의심스러운 소식이 있으면 연락을 취했답니다. 혹시나 지원이가 없으면 빈도를 통해서라도. 자, 우리도 서두르죠.”

다시 조그맣게 알려주는 말에.

해원기와 오소민이 저절로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이번 장풍보의 남하. 그 규모와 속도를 이렇게 미리 알 수 있었던 건 바로 비마방의 방주, 예홍쌍잠 위욱경 덕분이었다.

부부의 연을 끊다시피 했다면서.

차(岔)라는 글자는 산과 산이 갈라지는 곳을 나타낸다.

계곡이 아니라 높은 산봉우리가 겹쳤다가 나뉘는 지점, 크고 깊은 산중에서 이 지점을 잘 이용하면 산을 돌거나 넘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르게 원하는 곳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다.

오운봉을 돌아나갈 때는 희지원의 안내를 받아야 했지만, 일단 요령을 파악한 후에야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경공을 최대한 펼칠 수 있기에.

아교는 청령선고가 손목을 잡고, 희지원은 해원기가 어깨를 붙들어서.

한 시진도 되지 않아 평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좌우로 이삼십 리쯤 되는 넓이. 남쪽으로 꽤 높은 산이 막아서고, 북쪽으로도 지대가 높아져서 상당히 우묵해 보이는 벌판이다.

때가 때인지라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바람결에 출렁거려서 얼핏 녹색 강으로 착각할 이곳이 무가평.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희지원이 더 숨을 몰아쉬면서,

“헉, 저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연화사가. 그곳이 멀리 조망하기엔 더 적합…….”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데.

막 희지원의 어깨를 놓던 해원기가 돌연 앞으로 튀어나간다.

“오 형!”

솨아아아아.

희지원을 맡긴다는 말에 답하기도 전에,

해원기의 신형이 힘껏 내던진 비검(飛劍)처럼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무가평의 아득한 풀밭이 정녕 칼로 내리친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오소민이 황급히 청각을 높여 아련한 쇳소리를 찾는 사이.

청령선고가 아교를 바짝 끌어당기며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초상비(草上飛)에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

그녀는 해원기의 능력을 처음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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