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여중호걸(女中豪傑) (3)
“그런 말이 있잖아요. 보물에는 다 주인이 있는 법이라고. 보물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꼭 남의 물건을 탐내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 놈들이 바로 도둑. 과거의 난세도 분에 넘치는 욕심으로 힘을 얻으려는 자들이 일으킨 분란이라, 결국은 또 하나의 도둑놈일 뿐이죠.”
차분하게 일러주는 말.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치듯 자분자분 이어나간다.
“그런 도둑놈들은 흔히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는데, 다 남의 눈을 속이려는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장풍보의 이번 남하에도 반드시 못된 목적이 있을걸요. 삼백이나 되는 인마가 섬북에서 출발했는데도 장안의 훌륭하신 분들은 모른 체하고 있으니까요.”
해원기와 오소민뿐 아니라 마린의 표정도 변했다.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당세의 강호는 평온한 편. 세속의 권력이 비록 관례에 따라 무림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척하지만, 그래도 삼백의 무인이 공개적으로 몰려오는 걸 모른 척할 리 없다.
더구나 장안은 대도(大都). 고관대작과 명문세가에 부호거족(富戶巨族)이 즐비한 큰 고을이다.
장풍보는 섬서 북쪽에서 장성 부근까지를 세력권으로 하는 집단. 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무리를 지어 내려올 수 있나.
마린이 굳어진 얼굴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삼백. 그렇게 많은 인마가 거침없이 내려온다니. 확실한 정보입니까?”
“흥, 빈도가 허튼소리나 하려고 새벽 댓바람에 산을 떠난 줄 아오? 아, 실은 이 소식을 서둘러 화산에 전하려다가 해 공자가 와 있다는 얘길 들었지요. 워낙 공교로워서 내가 아예 직접 달려온 거고.”
마린에게는 코웃음과 빈도라는 자칭.
해원기에게는 다정하게 공자라 부르며 나라고 한다.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태도지만, 청령선고의 말에는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의미가 담겼다.
삼백이라는 인원, 장안의 관부가 묵인한 남하.
청령선고의 말이 빨라졌다.
“이미 동천(銅川)을 지나서 오늘내일이면 위남(渭南)에 도착할 것 같답디다. 그, 지원이를 산으로 불러놓고 마 장문인이 대신 나가보면 뭐 하나? 엉뚱한 곳에만 신경을 쓰면서. 에잉!”
해원기와 마린을 번갈아 보던 얼굴을 아예 뒤로 돌리며 불편한 소리를 내니.
마린의 굳은 표정 위로 그늘이 내렸다.
뭔가 내막이 있는 듯.
대화가 뚝 끊기려는데,
“위, 위남?”
“왜 이쪽으로…….”
조사령으로 봉한 입도 참을 수 없는지 좌우 장로가 놀라서 중얼거리고.
섬서에 처음 들어와 지형을 모르는 해원기와 오소민의 귓가에 불쑥 빠른 목소리가 속삭이다가.
“위남을 넘으면 바로 화산 경내에요.”
탁.
“아이코.”
코를 움켜쥐는 소녀.
청령선고가 코를 때리고서 나직이 꾸짖는다.
“요 계집애가. 어디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느냐? 버릇없이.”
코를 움켜쥔 이는 아교라고 불린 소녀. 불쑥 끼어들었다가 대뜸 콧잔등을 맞았지만, 덕분에 말할 기회를 얻었다.
삼백 명이 관부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화산 바로 앞의 위남까지 온다.
내용이 워낙 중대해서 잠깐 좌중이 조용해진 사이.
아교로선 비로소 입을 놀릴 틈을 얻은 셈이라.
“아, 사부님, 그냥 소식만 던져주고 떠난다고 하셨잖아요.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셔서. 어차피 위 대랑(大娘)이…….”
“고 주둥이!”
청령선고가 매섭게 외치며 손을 또 들어 올리는 통에 말이 멈추었지, 아니었으면 숨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을 터.
어찌나 말이 빠른지 처음 들으면 말이 뒤섞여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정도.
청령선고가 들었던 손을 내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에휴, 요 입빠른 계집이.”
생각나는 대로 참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걸 입빠르다고 하지만, 아교라는 소녀는 진짜 입이 빠르다.
속삭임 덕에 위남의 위치를 알게 된 해원기와 오소민이 비로소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아교는 이미 콧잔등에서 손을 떼고 새침을 떨고 있으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청령선고 혼자서 괜히 소란을 떨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양쪽으로 말아 올린 머리칼에 암팡진 용모, 삐죽 내민 조그만 입에 불만을 가득 담은 채.
아교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홱 젖힌다.
오소민이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 덕분이랄까, 청령선고에게서 느꼈던 거북함이 싹 가셨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인사를 못했군요. 이 소선녀(小仙女)는?”
해원기가 미리 알아보았듯이 아교는 전형적인 여도사, 여관의 복색. 일부러 잔뜩 추어올리는 칭호를 쓰면서 평소의 말투를 되찾는다.
좌중을 휘어잡던 여장부도 어쩔 도리가 없는 듯, 청령선고가 혀를 차며 고갯짓을 했다.
“빈도의 제자요. 아직 도명(道名)을 받지 못해 아교라고 부르지요. 쯧, 해 공자와 오 장로께 정중하게 인사 올리거라.”
사부와 제자.
아교가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모으며 머리를 까딱거린다.
“종남의 말학이 삼가 해 공자와 개방의 순행장로께 인사드립니다.”
자세야 그럴듯해도, 또 따르르 쏟아지는 말. 참새가 지저귀고 벌떼가 나는 것처럼 귀청을 쏘아대지만, 뻔한 인사말이라서.
마주 포권을 취하는 해원기와 오소민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두 사람에게 인사하면서도 눈은 자꾸 오소민에게 쏠리는 걸 감추지 못하니.
눈치도 없는 바부탱이로 하여금 친구의 얼굴에 뭐가 묻었나 살펴보게 한다.
오소민이 쓴웃음과 함께 해원기를 팔꿈치로 툭 치곤,
“이거, 선고의 말씀대로 아주 공교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화산에 오르자마자 벌어진 일, 괜히 골칫거리를 끌어온 게 아닌가 해서 불안하군요.”
예의를 갖추어 말머리를 잡았다.
화산파의 뜨뜻미지근한 분위기는 이미 인지한 상태. 다만 청령선고를 만나고서 몇 가지 내막이 있다는 걸 짐작했다.
과거의 인연으로 현재의 화산파와 종남파는 꽤 가까이 지내는 편. 그래도 문파라는 울타리를 친 이상, 함부로 간섭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그런데도 청령선고는 굳이 이렇게 이른 시각에 화산파를 찾아왔다. 물론 해원기의 소재를 알게 된 기쁨이 크겠으나, 어쩐지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은 듯.
해원기를 만나고, 해원기에게서 지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교 말대로 장풍보의 정보만 건네주는 거로 끝났을지도.
그 정보도 상세하고 정확하다. 화산보다 더 남쪽에 있는 종남인데 어찌 된 노릇인가.
오소민은 아교의 입에서 나온 ‘위 대랑’이란 단어를 유념해두었다. 새벽에 찾아온 희지원의 사모와 같은 성.
정보의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여기 해 형은 이미 장풍보와 악연을 맺었기에, 이들이 과연 무슨 의도로 남하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선 겁표한 도적 떼들의 단서를 새로 얻을 수 있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의 사적인 일로 화산과 종남에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완곡한 표현을 거듭하면서,
화산파나 종남파가 굳이 말려들 이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화산파 내부의 문제, 마린과 그 부인의 관계, 이걸 거의 다 아는 듯한 청령선고, 그러면서도 화산까지 달려와 알려준 이유.
복잡한 사정이 얽혀서 자칫하면 이런 식의 어색한 분위기만 이어지다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다.
오소민이 머리를 써서 화제를 바짝 당겼고.
이제는 마린과 청령선고의 반응을 기다릴 참인데.
“오 형의 말이 맞습니다.”
엉뚱하게 해원기가 바로 맞장구를 친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를 둘러보면서,
“화산에 오른 건 마 장문인을 뵙고자. 소중한 인연을 잊지 않고 환대해주셨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게다가 뜻밖에 종남의 선고까지 뵈었으니 저한테는 배의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장풍보의 소식을 들은 건 놓칠 수 없는 기회. 일단 죽었다는 그 보주가 어떻게 멀쩡한지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당장 주먹을 말아 쥐고 작별을 고할 기세다.
마린이 벌떡 일어나고, 청령선고도 당황한 눈치.
오소민이 억지로 이를 악물어서 나오려던 고함을 참았다.
하마터면 ‘이 바보 멍청이가!’라고 진짜 욕을 할 뻔했다. 삼백이나 되는 무리를 끌고 오는 장풍보를 혼자서 감당할 셈이잖나.
진짜 눈치 없다.
“아니. 이건, 잠깐.”
성급히 말리려고 나오던 말을 얼른 삼킨 마린이,
돌연 탁자를 짚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해 대협은 역시. 장풍보 전체를 혼자서, 아니, 오 장로와 둘이. 하하하.”
왜 웃나.
다들 이 뜻밖의 웃음에 눈이 둥그레져 쳐다보지만, 그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 아니란 걸 금방 알았다.
왜냐하면, 당황해서 엉거주춤하던 청령선고 또한 고개를 크게 끄덕이다가 해원기에게 활짝 웃는 낯을 보였으니.
“과연. 어쩜 그리 닮았을꼬.”
두 사람 다 해원기에게서 다른 사람을 연상한 듯.
말을 마친 해원기가 되레 어정쩡해졌고, 바부탱이 친구를 둔 덕에 부아가 확 치밀어 오르려던 오소민까지 어리둥절.
마린이 웃음을 갈무리하면서 탁자를 짚었던 손으로 내놓았던 조사령을 쥐었다.
“자, 해 대협, 일단 앉읍시다. 내가 할 얘기도, 해야 할 말도 아직 남았지요. 본 파를 잘못 이끌었다고 조사들이 꾸짖는 듯해서 이 조사령은 그만 거두겠습니다.”
다른 손을 내밀어 청하니 해원기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무겁고 침중했던 조금 전과 달리 진지하면서도 처음에 만났을 때의 명랑함을 되찾은 마린.
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아 좌중을 둘러보며 바로 말을 잇는다.
“화산 경내니 뭐니. 허, 본 파가 그저 산 하나 지키며 먹고 사는 처지가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그랬다가는 산적이나 다를 게 없고, 아아, 함부로 산적을 사칭했다간 또 야단을 맞겠구먼. 하여간 본 파는 오악의 하나, 아니, 무림의 숱한 문파 중의 하나. 음, 차라리 강호의 한구석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하는 게 옳겠군요. 열심히 무도를 닦아 밖으로는 협의를 행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도야하는 것뿐.”
말투는 경쾌해졌지만, 의지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른손에 쥔 조사령을 천천히 품에 넣고,
“장풍보에는 풀리지 않은 혐의가 있습니다. 이전에 개방의 단 장로, 술귀신과 함께 근처를 살폈던 건 바로 그 혐의 때문이지요. 그 일을 쉬 밝히지 못했던 이유는 혹여 선사의 벗들을 괜히 경동시킬까 저어해서. 음.”
“아따, 말도 참. 그게 뭐요?”
마린의 유장한 말투가 맘에 들지 않는 청령선고가 또 흘기지만,
장풍보의 혐의라는 말에 역시 궁금증이 크게 이는 듯.
재촉하는 물음에 마린이 미간을 좁혔다.
“몽고 철기(鐵騎)의 잔당입니다.”
좌중이 전부 움찔.
화산의 좌우 장로도 처음 듣는 듯하니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한 답이다.
마린이 시선을 내렸다가 청령선고를 보며 고소를 지었고.
“선고께도, 내 내자(內子)에게도 발설할 수가 없었소. 미안합니다.”
청령선고의 날카로운 눈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선사의 벗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즉각 깨달았다.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지내신 분들을 또 끌어들여서야. 이제 무림을 지킬 사명은 우리가 맡아야 한다고. 그걸 제일 먼저 자임한 이들이 바로 풍진삼우입니다. 남들은 자파를 벗어나 제멋대로 천하를 떠도는 그들의 기행(奇行)을 비웃을 뿐, 사실은 과거의 잔재를 찾는 고행(苦行)임을 모르지요. 뱀이 머리를 잃었다고 해도, 코끼리조차 삼킬 큰 파사(巴蛇)였고, 심지어 용을 가장해 곳곳에 발까지 달렸으니까.”
파사는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뱀. 벽세를 비유하는 표현이다.
“무너진 문파를 다시 세운다는 핑계로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약왕당의 단목 당주도 벌써 해괴한 흉물이나 못된 약물 따위를 찾아 없애는 중이었고. 그러다가 금장철기(錦帳鐵騎)로 의심되는 자들이 장풍보와 왕래하는 걸 발견했지요.”
금장철기는 과거 원(元)에서 최강의 무력을 자랑했던 무인집단. 전설의 대응왕(大鷹王)이 이 금장철기를 파괴하지 않았다면, 명(明)이 천하를 차지하는 게 수십 년은 더 늦어졌을 거라는 속설도 한때 유행했었다.
이제는 그저 아득한 옛날얘기로 치부되거늘.
“장풍보가 있는 황릉(黃陵)은 거주하는 이가 드물고, 그 이북으로는 장성을 낀 새북(塞北) 지역. 말을 기르는 목장을 크게 운영하면서 관부와도 관계가 좋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지만, 내부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까지는. 딱히 악행을 저지른 흔적도 없었고, 일이 새북을 넘어까지 확대될 우려도 있었기에, 거기서 조사를 마쳤던 겁니다.”
마린이 할 얘기는 장풍보의 혐의였다.
그럼 남은 건 해야 할 말.
마린이 수염을 힘주어 쓰다듬으며 좌우 장로를 보았다.
“본 파의 제자들을 전부 북봉에 소집하시오. 낡은 철기의 냄새가 나는 같잖은 것들이 감히 화산에 발을 들이려는 모양이오.”
목소리도, 말투도 변하지 않았건만.
좌우 장로가 그 위엄에 저절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문인의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