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여중호걸(女中豪傑) (2)
청령선고의 시선이 바로 돌아왔다.
“사천으로 가는 여정? 무슨 일로? 마 장문인에게 들은 건, 장풍보 얘긴가?”
연달아 묻는 말. 성급해 보이지만, 해원기를 향하는 시선 속에는 관심이 가득하다.
오소민이 그런 청령선고를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런 대화라면 해원기 대신에 자신이 나서는 게 낫다. 그러나 조금 전에 바늘 끝처럼 찌르던 청령선고의 시선을 느낀 후, 어쩐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가 센 여인.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화산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듯, 연이은 대화 속에서 장문인인 마린을 닦아세우고, 비꼬는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는데도 말리는 이가 없다.
우물 안 개구리 중에서 가장 콧대가 높을 좌우 장로조차 못 들은 척만 하고 있으니.
여장부다.
물론 대가 센 여장부라고 오소민이 기죽을 리는 없을 터. 팔선 중에 암묵적인 우두머리는 언제나 유일한 여자인 하선고(何仙姑)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몰골로도 기어이 여자 중의 여자라고 강조하는 남채화(藍采和)를 사부로 모신 판에.
하지만.
‘똑같이 선고(仙姑)라는 이름을 써서 그런가?’
어쩐지 하선고를 따라 배울 때처럼 껄끄럽다.
해원기가 힐끗 오소민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
“사천은 아미산에 확인할 일이 있어섭니다. 혹시 공동산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가는 김에 당문도 들러볼 생각이고. 음, 장풍보에 관해서는 어제 마 장문인에게 간략히 얘기했습니다만.”
청령선고의 눈썹이 꿈틀꿈틀.
아미산, 공동산, 사천당문. 어느 하나 가벼운 이름이 아닌 탓.
자신이 거론되자 마린이 겨우 말할 기회를 찾았다.
“아, 간밤에 자세한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해 대협과 오 장로는 복잡한 사건으로 상당히 바쁜 여정 중에 들렀고, 그 가운데 장풍무명 진자현과 관계된 부분이 있었답니다.”
마린도 기껏 오소민의 짧은 설명만 들었을 뿐. 해원기와의 비검을 치른 후에는 다른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껏 벙어리 흉내를 내던 좌우 장로가 마린이 입을 열자마자 때를 만난 것처럼 번갈아 끼어든다.
“궁중의 비보를 훔친 도둑들. 딱히 연관 지을 필요는 없지요.”
“조정에서 처리할 일입니다. 상세한 내막을 아직 모르는 판에 괜한 빌미만 주지 않을지?”
종남파의 장문인이 함께 한 자리라고 꽤 예의를 차리지만, 역시 탐탁지 않은 태도.
해원기의 신분을 확인했고, 간밤의 비검을 통해 충격을 받긴 했으나.
화산파가 엉뚱한 일에 휘말릴 기미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전욱이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마린을 쳐다본다.
“장문인, 오 장로의 말에 의하면 동창이 깊이 관계된 사건이외다. 장풍보가 남하한다는 소식도 아직 확실하지 않고, 남하한다고 해도 무슨 이유인지 모릅니다. 설사 장풍보가 진짜 도둑질에 끼었다 해도…….”
“흥!”
신중하게 이어가던 전욱의 말은 얼음 같은 냉소에 끊겼다.
청령선고의 치켜뜬 눈이 좌중을 훑고,
“화산파가 나설 일이 아니다? 겁이 난다는 말로 들리는구먼.”
내뱉듯 차가운 조롱.
탕.
전욱이 당장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보시오, 당 장문인! 말이 과하잖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무리 드센 여장부라도 남의 문파에 와서 이런 조롱까지 하다니. 외부 손님 앞에서.
참는 것도 한도가 있다.
청령선고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파란 도복 탓에 더 하얗게 보이는 손 하나를 팔선탁 위에 얹으며,
“출가한 후에는 속성을 쓰지 않는다고 했죠. 더구나 당(唐)은 내 모친 쪽 성, 제대로 따지면 내 성은 나(羅)일 거예요. 대, 화산파, 단심원주, 전 장로, 님.”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을 주어 전욱을 부르는데.
드드드.
팔선탁이 경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바닥에서 먼지까지 일어난다.
눈빛도 처음 그대로, 도복의 옷자락 하나 흔들리지 않건만, 내경(內勁)이 탁자 전체를 가루로 만들 듯.
마린이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탁자를 짚었다.
“후, 손님 앞에서 이 무슨. 이웃끼리 화기(和氣)를 상해서는 안 되지요.”
스윽.
단숨에 조용히 가라앉는 팔선탁.
청령선고가 마린을 노려보더니 또 코웃음을 쳤고.
“흥, 혼원결(混元訣)을 이리 쉽게. 자하공을 자하단공까지 끌어올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마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과찬의 말씀을. 예전에 입은 은혜가 아니었다면 마 모가 어찌 선고의 청령진기(靑靈眞氣)를 감당하겠습니까? 전 장로도 일단 앉으시오.”
종남파의 진산신공인 청령진기는 무겁고 유장한 거로 유명하지만, 팔선탁 전체를 가루로 만들려면 대성지경(大成之境)이 아니면 어렵다.
청령선고가 한 손으로 가볍게 선보인 청령진기도 놀랍지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낸 마린의 실력. 본래 종남과 화산의 절학을 다 익혔기에 ‘은혜’라는 표현처럼 훨씬 더 청령진기를 알 수는 있어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장문인이 보인 실력에 기가 살았나.
마린의 말에도 전욱이 청령선고를 노한 눈으로 쏘아보자, 마린이 다른 손으로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었다.
“기어이 내가 이걸 꺼내게 하는구려.”
탁자 위에 올려놓은 건 자그마한 단풍잎 하나. 홍옥(紅玉)을 정교하게 조각해서 진짜 단풍잎처럼 보이는 물건이 드러나자,
전욱과 풍엽도장이 동시에 부르르 떨었다.
“집법(執法),”
“단풍령(丹楓令).”
신음하듯 영부(令符)의 이름을 외며 맥없이 주저앉는 전욱이나, 안색이 변한 풍엽도장 모두 잔뜩 움츠러든 모습.
마린이 인상을 쓰면서 외면한다.
“두 분 다 제가 허락하기 전에는 입을 열지 마시오.”
화산파의 최고 권위를 지닌 집법단풍령까지 꺼내야만 했던 마린으로선 소태를 삼킨 기분.
장문인의 권위는 둘째 치고, 남들 앞에서 이 무슨 꼴이람.
더구나,
“조사령(祖師令)을 꺼낼 거라면 진즉, 흥.”
청령선고가 거듭 냉랭하게 코웃음을 쳐대니.
참담한 심정이다.
그나마 더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건 해원기와 오소민이 얘기를 시작한 덕분.
한심스러운 집안 꼴은 보이는 쪽이나 보는 쪽이나 다 불편하다.
일단 말을 시작한 건 해원기였으나. 그래도 워낙 말재주가 없는 데다, 또 화제가 자칫 지나치게 확대될 우려에 오소민이 나서게 되었고.
오소민이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간의 사정을 엮어 가면, 해원기가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는 식.
참담함을 느끼던 마린도, 드세게 조롱하던 청령선고도 어느새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최 내막을 알기 어려운 겁표 사건. 동창의 발호와 그에 연결된 강호의 정세. 그리고 그 속에 깃든 난세의 흔적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내용이다.
“으음.”
진평현의 수차제까지 얘기가 끝나자 마린이 무거운 신음을 삼켰다.
“무림쟁패에 강호통일. 또 그런 헛된 망상을.”
무력은 결코 정복을 위한 힘이 아니다. 그걸 젊은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난세를 거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욕망.
그건 오직 힘에 휘둘릴 뿐, 진정한 무도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고.
아울러 무고한 이들이 해를 입는다.
겨우 되찾은 평온. 문파를 다시 세우고, 제자를 키우며, 스스로 도야하는 데 아직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았거늘.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드는가.
안타까움과 허망함에 말투가 영탄조가 되는데.
옆에 앉은 청령선고는 마린과 전혀 달랐다.
“조화부인이라고, 그년과 수하들이 쓰는 무공이 어떻게 보였나요?”
대뜸 묻는 차가운 음성에 해원기가 오소민과 잠깐 마주 보다가 짧게 혀를 찼고.
“쯧, 처음 접하는 기예가 대부분이었지만, 근원을 추측해보면 사신마왕(邪神魔王)에 닿았다고 여겨집니다. 제가 배운 것과는 위력에 차이가 있고, 대신에 형태가 많이 변형되어서. 다만, 조화부인의 수법은 분명히.”
입에 담기 싫은 말.
오소민이 흉내 내듯 마찬가지로 혀를 차며 뒤를 이었다.
“쯧. 마종본맥(魔宗本脈) 오마도(五魔道) 중 심왕(心王)의 곤혹도(困惑道)라더군요.”
헉.
조사령으로 입이 봉해진 좌우 장로가 기겁하든 말든.
청령선고는 차가운 눈빛 그대로 곧장 말을 받는다.
“마종의 무공에다 선도(仙道)에 뿌리를 둔 진법. 개중에는 공동에서 흘러나온 법결도 있다라. 반룡령에선 동해삼사의 후대와 환문의 떨거지가 나왔다고 했지요? 그리고 하북팽가의 팽조린. 동창 내시들은 상당히 희귀한 공부를 익혔다고 해도. 흐흥.”
손을 꼽으며 중얼거리다가 버릇처럼 덧붙는 코웃음.
산동 제남에서 출현한 동창의 내시들. 반룡령의 소령주에 의한 기습. 소림사 밑에서 마주친 팽조린. 그리고 조화부인.
이야기 속에서 굵직한 부분만 추려내더니 마린을 돌아보는 눈이 가늘어진다.
“심왕의 마도도 신경 쓰이지만. 마 장문인, 어째 벽세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나름 목소리를 낮추었으나, 그래서 더욱 싸늘한 느낌.
마린의 미간이 깊이 파이고, 희끗한 수염이 철사처럼 뻣뻣해진다.
“선고께서 보신 게 정확하겠지요.”
큰 바위가 떨어지듯 무거워진 음성에,
“맞아요. 빈도(貧道)의 눈이 이런 쪽에는 정확하지요.”
청령선고가 바로 동의하지만, 이번에는 조금도 조롱하는 투가 없다.
벽세. 입이 더러워질까 봐 여간해선 말하지 않는 단어.
해원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마(邪魔)라는 두 글자로 대치하는 과거 난세의 두 원흉.
그걸 단번에 판단하는 청령선고와 그 판단에 동의하는 마린이 서로 마주 보았다.
바위처럼 딱딱한 얼굴과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
조원궁의 중청에 때 아닌 한기가 스며든다.
해원기가 오소민을 힐끗 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거침없는 성격의 이 친구도 청령선고를 만난 후에는 기가 많이 꺾인 듯. 대뜸 ‘벽세’를 운운하는 데에 꽤 놀란 모양이다.
처음부터 함께 한 사이요, 오는 내내 같이 상의했으니 총명한 친구가 과거의 난세가 재현될 기미를 이미 파악했겠지만.
확증과 내막을 제대로 밝히기 전에는 섣불리 공개할 수 없는 일이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하를 어지럽혔던 사마의 세력. 사는 벽세(僻世)요, 마는 지부(地府)다. 그 잔당이 아직 영광종과 오마왕전이란 이름으로 남아있으나, 그런 사실조차 굳이 회피하려는 당세의 상황.
자칫 강호를 위해, 무림을 위해, 천하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공을 헛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오소민이 남들에게는 골자만 추려서 설명했는데.
‘사부님의 벗, 표풍부운 나문의 따님. 자신의 신세도 모른 채 벽세의 수하가 되었고, 바른길을 찾은 후에도 자진해서 내부의 간세 역할을 했던 당찬 분이지.’
사부가 해원기에게 처음 소개한 말은 개사귀정(改邪歸正)이었다.
물론 깨우치게 된 동기는 사부와의 만남이었지만, 스스로 잘못을 고쳐 길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그러고도 벽세에 남아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의 비밀을 파헤친 여인.
사(邪)에 대해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 그녀가 바로 구주정문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이다.
청령선고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동창이라. 금의위를 주구로 삼아 별별 희한한 짓을 일삼는 게 진즉 마음에 들지 않았었지. 강호의 쓰레기들을 잘도 긁어모았나 본데. 감히 오랜 묵계를 무시하려 해? 흐흥, 재미있군, 재미있어.”
즐거운 듯 오소민을 보고 빙글거리는 얼굴엔 찬 서리가 내려서.
누구라도 그게 섬뜩한 살기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해원기를 볼 때는 살기를 투지로 바꾸고서.
“약왕당의 지자(智者)도 만났으니 이 문제는 조만간 답이 나올 거예요. 우선, 장풍보가 수상하군요. 이미 죽었다는 인간이 멀쩡하게 삼백이나 되는 인마를 끌고 장안으로 내려온다니.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것들은 반드시 구린 구석이 있답니다.”
빙글거리던 표정도 다독이는 미소로 변한다.
해원기가 그리 예쁜가.
하여간 화제가 당면한 문제로 바뀌어서 해원기가 감았던 눈을 떴고.
오소민도 바짝 정신을 차려 의자를 당겨 앉았다.
화제가 워낙 무거워서일까. 좌중이 모두 눈치채지 못했지만,
청령선고 뒤에 시립한 아교라는 소녀는 틈틈이 오소민의 준수한 얼굴을 훔쳐보느라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