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5화 (166/410)

제42장 여중호걸(女中豪傑) (1)

대부분의 무림 문파에선 이른 새벽부터 연공이 시작된다.

단심원은 화산파 제자들이 무공을 익히는 곳. 새벽이 훤히 밝아오는 때, 침상에 누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해원기와 오소민이 그냥 앉은 채 기다려야 했다.

손님 처지에 멋대로 나와 돌아다니기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배가 고프군.”

오소민이 호리병을 거꾸로 흔들며 꺼낸 소리에,

해원기가 픽 웃었다.

결국은 눈도 붙이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셈. 그나마 오소민은 희지원에게서 받은 작은 술병 하나를 홀짝거리기라도 했지, 해원기는 공손무원을 추도하는 한 모금 외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술만 갖고는 부족했나?”

“응? 이거 절반도 없었어. 맛도 영. 알잖아? 게다가 술만 먹고 사나?”

기다렸다는 듯 툭툭 반문이 날아온다.

잠깐 보여주었던 애잔한 분위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완연한 평소의 개방 장로.

“가난한 화산파라지만, 흔한 죽 한 그릇은 줘야 할 거 아냐. 간밤에 놀라운 검학을 시연해주신 검왕 나으리께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허기가 마침내 불평으로 쏟아지자 해원기가 이마를 짚었다.

저놈의 ‘나으리’. 머리가 아파져 오는데.

다다다.

급하게 달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히 문 쪽으로 향했다.

몰래 찾아왔던 희지원은 조심스러웠던 만큼 그 기척을 미리 느꼈으나,

이렇게 뛰어오는 소리라니.

화산파가 늦잠을 잤나.

벌컥 문이 열리고 헐떡거리는 한 청년.

“어, 일어나셨습니까?”

해원기와 오소민을 보며 땀을 훔치는 청년은 화음현에 들어왔을 때 곽위와 함께 있던 제자.

무례함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해서 오소민이 눈을 깜빡였다.

당당한 명문정파의 제자가 자파를 찾은 손님 앞에서 보일 모습이 아니다.

마린에게 화산파 내부의 문제를 들어서인지 이런 허술함도 더 눈에 뜨인다.

해원기가 앉았던 침상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시오.”

평범한 인사에 청년이 비로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는 게 그나마 다행.

그래도 말소리에는 황망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자, 장문인께서 두 분을 빨리, 괜찮으시면, 모시라고.”

괜찮으시면?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정중히 모시라고 했을 텐데.

오소민이 한심해서 얼른 말을 받았다.

“네, 네. 무슨 일로, 어디로 모시랍디까?”

“저, 조원궁으로. 괜찮으시면. 손님이 찾아오셔, 아, 일단 가시면 아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말도 더듬지만.

그래도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엄명은 받았는지. 나오려던 소리를 억지로 참는 게 가상하기까지.

오소민이 기어이 한숨을 내쉬며 해원기를 보았다.

“후, 괜찮다고, 괜찮아요. 그러니까, 에, 갑시다.”

고구마대장 나으리께서는 무례하든 황당하든 이미 나설 준비를 하고 계시다.

명문정파의 제자가 취해야 할 예의 같은 건 본래 관심도 없을 친구.

화산파에 뭔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건 분명하고,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 예. 그럼.”

화산파 제자가 옆으로 비켜서자 성큼 나선다.

“조원궁이라면 여기 오기 전에 들렀던 곳이지. 오형, 서두르세.”

거꾸로 화산파 제자를 끌고 달릴 기세여서 오소민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이래야 우리 검왕이지.

야밤에 달렸던 길도 훤해지니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었다.

기별을 전했던 화산파 제자는 아예 따라오기를 포기했을 정도의 속도. 중봉인 운대봉과 연결된 오운봉의 절묘한 경치를 구경할 새도 없이.

유일하게 평탄한 조원궁에 가까워지자 오소민이 먼저 몸을 세웠다.

“해형, 잠깐.”

멀리 평지 끝에 보이는 조그만 조원궁. 밖에는 대여섯 개의 인영이 모여있는 게 보인다.

해원기가 옆으로 다가오자 오소민이 뺨을 긁었다.

“화산은 큰 산봉 다섯이 연꽃 모양으로 펼쳐진 큰 산이지만, 화산파를 찾는 사람은 대개 금쇄관을 통해 오를 거야. 즉, 조원궁이 일종의 접빈청(接賓廳)이겠지.”

화산파라고 화산을 다 점유할 수는 없다.

숭산의 소림사도 태실(太室)이 아닌 소실봉(少室峰)의 깊은 숲 한구석을 겨우 차지한 것처럼.

그러나 무림의 예의로 상대 문파를 찾을 때는 그 문파에서 정한 입구를 거치기 마련.

“아까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었잖아. 지금 조원궁 밖에 화산오봉이 다 나와 있는 걸 보면 꽤 지위가 있는 자겠군.”

화산파의 급한 사정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해원기가 오소민의 설명을 들으며 시선을 모았다.

“화산오봉만이 아닐세. 희 소협 옆에는 낯모르는 소녀 하나가 더 있군.”

한참 먼 거리.

오소민이 다시 눈에 힘을 주고서야 조원궁 밖의 인영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좌측에는 조양자, 임심미, 주지화, 곽위가 몰려있고. 우측에는 희지원이 따로 한 여자애의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광경.

임심미와 비슷한 나이일까. 양쪽으로 둥그렇게 말아 올린 머리 형태에 새파란 도복, 질끈 묶은 허리띠에는 단검 한 자루가 꽂혔고, 조그만 체구지만, 암팡진 이목구비를 잔뜩 찡그린 채 뭔가 투덜거리는 중이다.

“도복?”

주지화나 임심미는 비록 경장이라도 나름 짧은 경사(輕紗)를 덧붙인 여성스런 모양에 목이 긴 장화까지 신었거늘.

화려함이 유행하는 당세에 여자애가 아무 장식도 없는 도복만 입는 건 드문 경우.

해원기가 오소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관(女冠)의 복색으로 보이는군. 가보세.”

여관은 여자 도사의 존칭이다. 화산에 올라서 본 도사라곤 조양자 하나뿐.

찾아온 손님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해 대협, 오 장로.”

조양자가 대표로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하고, 모두가 손을 모아 예를 취하는데.

그래도 어젯밤의 비검이 상당한 충격을 준 듯, 인사를 올리는 화산오봉의 표정이 꽤 정중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훑어보던 도복의 소녀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가벼운 코웃음을 쳤지만,

곧바로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안색을 고쳤다.

“화산오봉은 조원궁 주위에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마린의 중후한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끼어들어서.

“아교(阿嬌)는 그만 놀고 들어와라.”

차갑고 높은 여자 목소리.

막 장문인이 명을 받들려던 화산오봉까지 움찔할 정도로 냉랭한 느낌이고, 도복의 소녀가 냉큼 해원기와 오소민 뒤에 따라붙는다.

어제 들른 조양궁의 중청은 낡은 팔선탁 하나만 놓인 공간.

마린과 좌우 장로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는데,

마린의 바로 곁, 처음 보는 여인의 시선이 곧장 날아들었다.

높이 틀어 올린 머리를 작은 도관(道冠)으로 고정했고, 역시 파란 도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십 대. 넓은 이마에 뾰족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젊었을 적에는 눈에 띄는 용모였을 터, 그러나 굵은 눈썹과 길게 파인 눈꼬리가 전부 위로 솟구쳐서 성깔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도복의 소녀가 쪼르르 달려오는 건 본 척도 않고서,

시선이 준수한 오소민의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가 바로 해원기에게 꽂혔다.

마린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좀 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귀찮게 해드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만.”

인사를 건네는 동안에도 중년 여도사는 꼼짝도 하지 않고서 해원기만을 쳐다본다.

“꼭 만나야 할 분이,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흥,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화산에 못 오나?”

역시 마린의 말을 자른 건 이 중년 여도사.

화산파 안에서 화산파 장문인에게 코웃음을 치더니,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꼭 만나야 할 분이라.

정중하게 모은 두 손, 날카로운 눈매를 다시 오소민에게 돌리고,

“개방의 유룡개 오 장로라고. 이렇게 보게 되는구먼.”

차가운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게 목례인가.

낯선 중년 여도사의 냉랭한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오소민이 어정쩡하게 보든 말든, 여도사의 정중하게 모은 두 손은 바로 해원기를 향했다.

“해 공자(公子), 드디어 만났군요. 종남을 맡은 청령(靑靈)이라오.”

귀한 집안의 자제를 높여 부르는 공자라는 호칭. 무림에서도 명문 세가의 후손을 그렇게 부르긴 하지만, 그것도 그럴듯하게 외모를 꾸민 이들에게나 쓸 뿐.

더벅머리에 싸구려 옷을 대강 걸쳐 남의 집 허드렛일이나 할 것 같은 해원기에게 어디 가당키나 한 호칭인가.

그런데 그렇게 예를 차리는 여도사의 눈빛과 음성이 갑자기 따뜻하게 변해서.

그녀가 스스로 밝힌 신분보다 더 놀라야 했다.

오소민만이 아니라 마린과 좌우 장로에 여도사의 뒤에 시립한 도복의 소녀까지.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언행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당대 종남파 장문인, 청령선고 당민지.

해원기는 오히려 짐작했던 것처럼 주먹을 감싸 올린다.

“해원기입니다. 사부님께 당 여협의 얘기를 들었지요. 아, 당 장문인.”

얼른 호칭을 고치자,

청령선고 당민지가 손을 풀어 입가를 가렸다.

“호호, 영 어색하군요. 속성(俗姓)은 출가하면서 버렸으니 그냥 선고(仙姑)라고 불러요. 호호호.”

마린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도복의 소녀가 바보처럼 입을 딱 벌리는 건.

당민지가 웃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

이젠 놀라는 걸 넘어서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섬서로 들어오면 종남을 먼저 찾을 것이지, 뭐하러 화산에. 음, 이건 오 장로 탓이겠네. 오 장로라기보다는 취개 단 장로가 그리 일러줬을 거야. 그래도 그렇지, 흥, 마 장문인. 너무한 거 아니에요? 상락이라면 나에게도 알릴 수 있거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평소에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툭 내뱉는 정도. 오죽하면 섬서 경내에서는 청령이 아니라 빙령(氷靈)이라고 수군댈까.

믿기 어려운 언행이 계속되는 탓에 자리에 앉고 나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다.

청령선고가 투정 부리듯 이 사람 저 사람을 따지다가 흘겨보자,

마린이 비로소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오햅니다. 우리 위아가 화음현에서 두 분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나는 마침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해 대협과 오 장로가 금쇄관에 오를 때쯤 알았으니, 언제 선고께 알릴 틈이 있었겠소이까? 그러지 않아도 오늘 중에 지원이를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에도,

“흥, 북봉에 있는 애를 왜. 걔는 그러지 않아도 바쁜 판이면서. 마 장문인도 그 일 핑계로 자주 산을 비웠잖아요. 됐습니다. 이렇게 해 공자를 만났으니까.”

연방 코웃음을 치다가 싹 고개를 돌려버린다.

화산의 조원궁에서 주인 노릇을 해야 할 마린으로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인데.

어제 해원기 앞에선 위신을 따지던 좌우 장로 역시 시선을 돌린 채 모르는 척.

완전히 청령선고의 기에 눌린 모습이다.

어지간히 대가 센 여인.

그런데도 해원기만 보면 방긋 미소를 띠니.

“그러지 않아도 해 공자를 조만간 만나러 갈 셈이었지요. 얼마 전에 약왕당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하남 쪽으로 사람까지 보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섬서로 왔을 줄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

오소민이 좌중의 기묘한 분위기에 입맛을 다시다 슬쩍 끼어들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더구나 선고께서 종남을 떠나시는 게.”

중건한 구주정문이 다 그렇지만, 일파의 장문인이 산을 떠나긴 어려운 일.

청령선고의 시선이 살짝 변한다.

“해 공자는 알 거야. 황보 세가의 아들 녀석이 잠깐 들렀었거든. 당령이라는 계집도 편지를 보냈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모른척하기도 그렇지. 그리고 나야, 뭐.”

오소민에게도 부드러운 편이나.

눈빛이 어째 바늘 끝으로 찔러대는 듯, 입술도 살짝 말려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른손을 가볍게 털며 의미심장하게 딴 곳을 쳐다본다.

“누구와는 달라서 은한삼자(銀漢三子)가 산을 든든히 지켜준다네.”

“어흠.”

“음.”

당장 전욱과 풍엽도장이 불편한 소리를 내는 걸 보면, 화산파를 빗대서 비꼰 듯.

종남파도 사대검계에 속했던 은한전(銀漢殿)이 산으로 돌아갔지만, 풍림당을 품느라 고생하는 마린과는 상황이 다른 모양이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에는 관심이 없는 해원기가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 했습니다. 어차피 사천으로 넘어갈 여정이라 종남을 들러야 하지요. 그런데 마 장문인께 듣기로 이쪽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셔서. 역시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도움을 주실 분이 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린과 청령선고 모두 과거의 난세를 겪은 사람. 해원기에게는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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