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정사분별(正邪分別) (4)
술잔조차 없는 방.
오소민이 한 모금 마시고 건네준 호리병을 그대로 입에 댄 해원기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시 묵념을 취한 오소민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짓고,
희지원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탁자 위에 풀어놓은 자신의 검을 본다.
붉어지는 눈시울.
보통 것보다 두터워 단홍검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검.
이 검을 건네준 공손무원의 얼굴이 그 위에 어른거리는 듯.
붕악을 전수하고, 화산에 입문시킨 할아버지.
비로소 자신이 많은 복을 받았음을 깨달았지만,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체구에 비해 여린 심성. 그간 얼마나 원망하고 억울하게 여겼던가.
그러나 지금 이 투박한 검 한 자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검왕 해원기와 개방 장로 오소민이 삼가 추도를 표할 만큼 귀한 검.
해원기와 오소민이 호리병을 주고받으며 추도하는 것도 모르다가,
정신이 든 듯 고개를 쳐들고 급히 손을 모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자의 입장에서 추도에 답례하는 태도.
눈을 부릅떠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짓는 건 자칫 부끄러운 꼴을 보일까 봐.
기쁘면서 죄스럽고, 속이 확 뚫리는 듯한데도 안타까운. 그런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호리병을 도로 받던 오소민이 히죽 웃는 얼굴을 들이밀고.
“어이, 희 소협은 살짝 오해한 모양일세.”
“네?”
희지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쳐다보자 손에 든 호리병으로 해원기를 가리켰다.
“저 친구 말은 그 검이 아니라고.”
희지원이 호리병을 쫓아 해원기에게 고개를 돌리지만, 더욱 어리둥절.
할아버지가 남긴 검은 여기에 이 한 자루뿐이거늘.
해원기가 고소를 짓는다.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검을 향했으되,
“제가 말한 검은 바로 희 소협이지요.”
조용히 건네는 말에,
희지원의 어깨가 부르르 떨었다.
‘공손 노사가 남기신 검이 여기 있으니.’라는 일종의 추도사. 그건 떠난 사람을 애도하며 동시에 뜻이 이어짐을 경하하는 말이었구나.
황연히 깨달았지만, 온몸에 전율이 일 수밖에 없었다.
천주마검 공손무원이 세상에 남긴 검, 평생을 검도에 바친 일대의 노검객의 뜻을 이어받을 사람이 바로 자신.
해원기의 손이 살며시 탁자 위로 올라왔다.
“그밖에도 공손 노사가 희 소협을 화산에 입문시킨 까닭은. 음, 사람을 죽이는 열여덟 자루의 마검 중에 사람을 살리는 검을 지닌 이는 오직 서악제일검뿐이라고 하시면서, 마 장문인의 사부를 최후에 가장 정중히 모신 사람이 공손 노사라고 들었기에. 인연이란 게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훤히 아실 분이었을 테니, 그런 까닭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전에 들은 얘기를 되새기자마자,
“저도 드, 들었습니다. 장문인을 살리려고…….”
머리를 정신없이 끄덕거리는 희지원.
해원기의 손이 탁자를 가볍게 미는 듯.
“굳이 제가 덧붙일 말이 아니었군요. 자, 그럼.”
몇 번이나 놀랐는지 이젠 헤아릴 수도 없지만.
검이 탁자에서 밀려오자 희지원이 그야말로 펄쩍 뛰듯이 일어났다.
스윽.
자신의 투박한 검이 낡은 탁자 위를 미끄러져 앞으로 다가온다.
손도 대지 않고.
아니, 손을 일부러 대려고 하지 않는다.
희지원 역시 어려서부터 검을 쥐었던 사람. 그 뜻을 읽지 못할 수가 없고,
서둘러 자신의 검을 챙겨 넙죽 절을 올리는 얼굴이 시뻘겋다.
“죄, 죄송. 아니, 그럼, 쉬십시오. 물러가겠습니다.”
설사 사부의 앞이라도 가벼이 풀어놓을 수 없는 것이 검.
뒤늦은 창피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쥐구멍이라도 찾는 심정이라 제대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물러 나와야 했다.
큰 체구가 어쩔 줄 몰라 내빼는 모습이 어지간히 우스꽝스러워서.
“하하하하.”
닫히는 방문 안에서 오소민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해원기가 찡그리며 눈짓을 보내는 건 희지원이 뻔히 들을 테니까.
그래도 오소민은 여전히 히죽거린다.
“하하, 그 친구 생긴 것과 달리 귀여운 구석이 있잖아. 처음에는 상당히 어둡더니만. 어, 그러고 보니.”
흔드는 손에 들린 호리병.
“병째로 술을 뺏은 셈이 되었네. 흐흐.”
흐뭇한 표정에 해원기도 결국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긴 건 전설의 미남자 반악(潘岳) 뺨치게 잘났으면서, 어찌 그리 개방도의 본분은 잊지 않는지.
장난스러운 친구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해원기가 등을 가리켰다.
“이러다 늦잠 자면 실례라고. 불 끄네.”
남의 문파, 그것도 제자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곳에서 늘어지게 잘 수야 없는 노릇.
오소민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른 호리병을 입에 대는 걸 못 본 체하면서,
슥.
해원기가 등을 꺼버렸다.
캄캄해진 방안. 덧창 틈새로 기어드는 희미한 빛이 오히려 또렷해지는데.
해원기가 침상에 가부좌를 틀면서 눈을 감았다.
이미 잠을 자기는 틀렸고, 본래 잠을 청할 마음도 없었다. 오소민이 괜히 자기 때문에 꼬박 밤을 새울까 봐 불을 껐고,
또한, 혼자서 생각해야 할 게 있어서였다.
마린과의 비검.
남들이 보기보다 훨씬 소모가 많아서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운공으로 회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내리감은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양손을 향한다.
‘오형이 꼼수라고 닦달해준 덕에 말머리를 찾았고, 임심미라는 소녀가 검기를 언급한 걸 핑계로 대충 설명을 마쳤지만.’
그게 승부의 중점은 아니었다.
화악검결에 의한 혼원일검. 마린이 마지막에 펼친 검은 참으로 대단한 위력을 지녀서, 천손검법을 펼쳐야 막을 정도.
혼원검세는 놀랍게도 천손검법 제일초 홍몽무변과 상당히 닮은꼴이었기에. 그 전까지 어근버근 평수를 유지했던 국면이 단번에 뒤집혀 혼원일검이 공간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해원기의 양손이 뜻보다 먼저 취한 건 검왕수의 네 번째.
‘유리와 본연의 검상이 저절로 군림과 추상으로 바뀌었지.’
군림어검대법이야말로 검왕오형의 기본.
천지만상을 휘젓는 혼원지세가 구현되었으니 어검(馭劍)을 어검(御劍)으로 맞이하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그 혼원의 상이 지극한 검강성상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상검이 아예 그 뿌리를 으깨려고 출현하다니.
그것도 서로 자리를 바꿔 가는 형이 아니라 아예 한 자루 검의 양면이 되어서.
‘그건 내가 배웠던 역상정위가 아니야. 그건.’
사부에게 검왕오형을 배울 때 역상정위는 검상이 좌우로 번갈아 바뀌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마린의 혼원일검에 응해서 나온 것은,
감은 채로 눈꺼풀이 바르르 떤다.
마지막 순간에 해원기가 다급하게 검왕수를 해제하지 않았다면 불굴검 한 자루가 바닥에 떨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검의 불굴검과 검강의 불요검을 모조리 깨부수고 마린까지 베어버렸을 테니까.
억지로 오행의 상생과 상극으로 끼워 맞춰 설명했지만, 그 실체는.
‘고천무쌍진(孤天無雙陣) 제일결(第一訣) 뇌전금강(雷電金剛)의 변형이었어.’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는다.
‘사부님은 대체 무슨 뜻으로……?’
두 번째다.
오른손에 오행상생, 왼손에 오행상극.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을 한꺼번에 운용한 상태로 상대의 완맥을 쥐면 검기핍인으로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걸 구란와자 때 알았거늘.
이번엔 검왕오형. 공간을 장악할 정도의 공격을 받으면 공전절후의 진결(陣訣)이 자연히 발동해버린다.
조화부인과 ‘독자성진’이니 ‘일인성진’이니 말장난을 했지만.
진짜로 혼자서 합벽(合璧)의 진세를 이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
합벽이란 말 자체가 단수가 아닌 복수를 의미하잖은가.
고천무쌍진.
사부와 탁 소숙이 창안하고 구현한, 오직 두 사람만이 가능한 진.
두 사람 모두 심도경(心道境)에 이르고, 생사여일(生死如一)의 동심합벽(同心合璧)이란 진체(眞諦)를 체득했을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린 해원기는 흥분을 금치 못해서 치기 어린 이름을 제멋대로 붙였고,
사부는 껄껄 웃으며 그 이름을 그대로 진결에 썼었다.
그 첫 번째는 뇌전금강, 두 번째는 쌍왕분노(雙王忿怒).
이를 펼치려면 일단 탁 소숙의 팔엽만다라(八葉曼茶羅)와 양천팔괘심형극(量天八卦心形戟)을 깨우쳐야 하고.
무엇보다 사부가 자신의 몸에 받아들인 귀왕검(鬼王劍)의 흉살지기(凶殺之氣)가 있어야만 하거늘.
이걸 설마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에 심어놓았을 줄이야.
해원기가 모르게.
알면 알수록 더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부에게서 배운 모든 것. 그 속에 해원기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사부가 왜 그렇게 했을까.
이제는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그 이유를 찾는 수밖에 없나.
해원기가 호흡을 다스려 잠심침령으로 들어가려는데,
“후.”
해원기가 뱉고 싶었던 한숨이 오소민에게서 나왔다.
그도 술병만 기울이던 건 아니었던지.
해원기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열렸다.
“안 자나?”
“아, 쓸데없이 잡생각이 자꾸 나서. 그러는 자네는.”
등불이 없어도 피차 시야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고수들.
어쩐지 맥 빠진 듯한 대답을 듣자 눈을 떠 맞은편 침상을 보게 되었고, 침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덧창을 올려다보는 오소민의 옆모습이 그린 듯 눈에 들어왔다.
세운 한쪽 무릎 위에 걸친 호로병, 머리를 벤 한쪽 팔. 상념에 젖은 눈은 아련하고, 하얀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파리해서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모습.
해원기가 기이한 느낌에 자신의 답답함도 순간 잊었다.
“무슨 생각인데?”
속삭이듯 말소리가 작아지는 건 그만큼 오소민이 생경하게 보여서.
이 장난스러운 친구가 얼른 입을 열지도 않는다.
그렇게 잠시 덧창만 보더니.
꿀꺽.
호로병을 당겨 한 모금 들이키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희지원이란 친구 말이야. 괜찮겠지?”
“음?”
설마 희지원을 생각했을까. 해원기가 눈을 껌뻑거리자 오소민이 호리병을 흔들었다.
“평소에도 술병을 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아서. 이거 손때가 반들반들하거든. 운대봉에 혼자 있는 외톨이니까 속상한 김에 술이나 마시자, 뭐 그런 거. 후후.”
허튼 웃음을 덧붙이다가,
“깜빡 잊고 묻지 않은 게 있어. 자네 아까 오악검은 존의요, 절세오검은 불의라고 했지. 그럼 평오검은 뭔가? 나도 검법 한 가지는 배운 처지잖아.”
또 질문이 엉뚱한 곳으로 뛴다.
해원기의 시선이 다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헛소리만 늘어놓을 친구가 아니다.
“평오검은 심의(心意)라고 배웠네. 팔선 중 여 노사의 순양검법(純陽劍法)이라면 개의(介意)라고 해야 할까.”
정도 오악검은 바탕의 이치를 끝까지 부여잡기에 존의. 마도 절세오검은 뜻하지 않아야 이루기에 불의. 평오검은 그 오의를 구하는 틀에서 벗어나는 심의.
오소민이 배운 한 가지 검법은 여동빈에게서 나왔을 테니.
“그렇군. 그 콧대 높은 영감은 의외로 신경 쓰는 게 많았거든. 크큭.”
기억을 떠올리니까 웃음이 나오나.
종잡을 수 없는 화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형, 왜 그분, 자네 사부님의 말씀을 마 장문인에게 해줬어?”
키득거리던 끝에 다시 묻는 말에.
해원기는 문득 이게 오소민이 진짜 하려던 말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해원기도 아직 그 이유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판에 오소민이 먼저 답을 내놓는다.
“의상(意想)을 넘어서야 심검(心劍)의 경지에 든다고. 참 알다가도 모를 소리지. 여덟 사부 중에서 나를 가장 귀찮게 했다네. 어차피 다시 뿌리인 팔선중(八仙衆)으로 돌아가 개방과는, 세상과는 연을 끊을 걸 알면서도.”
해원기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사실 개방은 정도니 협의니 하는 말과 어울리지 않아. 거지 주제에 무슨. 개방은 그냥 의리(義理)지. 하찮은 삶끼리 서로 아껴주는 의리. 마 장문인도 그럴 거야. 재수 없는 장로에 우물 안 개구리들인 제자라도 품에 안아줄 수밖에 없잖아. 정도의 오악검? 구주정문? 흥, 그따위 좁은 시야로는 알 수가 없다고.”
꿀꺽.
마실수록 껄껄하던 입이 부드러워지나 보다.
“뭔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희지원은 공손 노사의 명을 받았고, 마 장문인의 부인이 데려왔겠지. 풍림당 따위는 비할 수도 없는 든든한 배경, 그런데도 기명제자에 내놓은 자식 취급. 가장(家長)은 다 그럴 수밖에 없나 봐. 자식이 다 예쁘지는 않아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게 없다잖아. 하핫.”
커지던 웃음을 멈추고.
“심검경에 드는 핵심이 정(情)이라. 그분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테지만. 너무 어렵네그려. 흐음.”
말이 뚝 끊기고.
다시 덧창을 향하는 시선.
그런 오소민을 보는 해원기도 말없이 시선을 훤해지는 덧창으로 돌렸다.
방안이 비로소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