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3화 (164/410)

제41장 정사분별(正邪分別) (3)

새벽녘에 찾아온 뜻밖의 손님 덕에 밤을 꼴딱 새우게 생겼지만,

오소민이 인상을 쓴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시선을 해원기에게 둔 채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재빨리 상황을 헤아려본다.

“가만, 마 장문인이 대놓고 해 형의 신분을 발설했을 리 없지…….”

비록 ‘회주’니 ‘그분’이니 하며 어느 정도 실마리를 보이긴 했으나, 그것도 아는 이에게만 들릴 짧은 토막에 불과하다.

해원기를 만난 반가움, 어떻게든 화산파 문인들의 눈을 뜨이게 하려는 고심. 그래도 팔자의 언약을 완전히 저버리진 않았을 터.

오소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지원이 냉큼 입을 연다.

“장문인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좌우 장로 역시 입을 닫으셔서. 에, 다들 궁금해하더군요.”

해원기가 자신의 친인을 알아준 게 그리 기뻤나. 무엇이든 다 얘기하려는 의욕 넘치는 대답.

화산오봉에서 그 혼자 알아봤다는 거다.

오소민의 시선이 돌아오자,

“장문인이 처음 ‘회주’라고 했을 때부터 해 대협이 누군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수문대관의 포무백협까지, 다 할아버님께 들은 얘기였으니까요. 게다가 사부와 사모가 십여 년 전 일러주신 절세응양(絶世鷹揚)의 검왕에 관한 소문도.”

좌우 장로가 기겁해서 중얼대던 ‘풍화절세, 응양구천’도 귀담아 두었던 모양.

해원기의 표정이 어색해지든 말든 기운차게 대답하는 모습은 첫인상과는 매우 다르다.

오소민이 침상에서 바싹 다가앉았다.

“희 소협은 눈치가 빠르구먼. 그러면서 입도 무겁고. 동배들 모르게 혼자 찾아오느라 애먹었겠소.”

조양자는 사형, 주지화는 사저, 곽위는 사제, 임심미는 사매.

기명제자인 희지원이 중간에 끼인 것도 특이하다.

슬쩍 그 의미를 더듬어보려는 말에 희지원이 머리를 조금 흔들었다.

“아니, 그다지 애를 먹지는. 사형과 사매는 장문인을 모시고 옥녀봉으로, 사저와 사제는 장로를 따라 부용봉으로 갔으니까요.”

오소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장문인의 제자는 장문인과. 풍림당 출신의 제자는 장로와. 각각 따로 모이면서 가운데 낀 희지원에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나.

“어, 기명이라고 해도 희 소협 역시 장문인의 제자 아뇨.”

“아, 그렇기는 하지만.”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희지원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진다.

해원기가 그 모습을 보다가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닌 듯하오.”

대청으로 돌아간 마린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화산파 문인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오소민의 농담처럼 우물 안 개구리들이 비로소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알았을 테니까.

그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

가까운 이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느낀 바를 공유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인데,

홀로 떨어져 해원기를 찾아온 희지원. 큰 체구와 달리 마음씨는 여린 것 같다.

외톨이다.

희지원이 쭈뼛거리다가 겨우 하는 말.

“저, 제 검법이, 어, 어떻게 해야 할지. 해 대협이라면 알려주실 것 같아서…….”

검법이라.

홍조가 오르는 희지원의 얼굴을 보면서 해원기가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했다.

“말해보시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그 목소리에 용기를 얻었는지 희지원이 얼른 등에 묶은 검을 풀었다.

낡은 탁자 위에 올린 검은 일반적인 것보다 두터운 편.

“할아버님이 주신 검입니다. 저에게 어울리는, 에, 저는 본래 붕악(崩岳)을 익혔지요. 그러다 화산의 검을 익히라고 하셔서. 음.”

당황해서 말에 두서가 없다.

오소민이 조금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런 희지원을 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검객이 남 앞에서 함부로 검을 풀다니. 이런 철부지가 있나.

그래도 일단은 입을 다물고 보고만 있기로 했다.

가만히 희지원의 검을 쳐다보던 해원기가 묘한 소리를 시작했기에.

“붕악이 왜 네 번째 오는지 아시오?”

뭐의 네 번째인지. 희지원의 머리가 확 들렸다.

“네. 섬전의 빠름, 추풍의 변화, 탈혼의 궤이, 그리고서야 붕악의 굉력(轟力)입니다.”

언젠가 이런 경험이 있나 보다. 주르르 답이 나오는데,

“섬(閃), 화(化), 이(異), 굉(轟)까지만 배웠소?”

“네? 넷.”

“그럼 섬화이굉이 무엇으로 이어지오?”

“이어진다고요? 그건…….”

“붕악의 요결을 굉이라고 하는 까닭은?”

“아, 그거야 그야말로 가장 무거운 힘을 쓰니까.”

“그럼 중(重)이 더 맞을 터.”

“……!”

해원기의 거침없이 던지는 질문에.

마침내 희지원이 눈을 껌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얼떨떨해하면서도 뭔가 깨닫는 듯한 기색.

해원기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탁자 위에 올려 진 희지원의 검을 가리켰다.

“공손 노사가 왜 이 검을 희 소협에게 주었는지, 왜 화산에 입문시켰는지 알겠구려.”

여전히 차분하지만,

부드럽기보다는 엄격하게 들리는 말투에,

오소민이 새삼스럽게 해원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무공 얘기를 시작하면 인상이 변하는구나, 하고 내심 감탄하면서.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지는 얘기.

정도에 오악검법이 있다면 마도에는 절세오검이 있다.

“이는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정오검(正五劍)과 마오검(魔五劍) 외에 평오검(平五劍)이란 것도 있다오.”

희지원의 기색을 살피며 해원기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고.

“정도 오악검파의 검법이라고 정오검, 마도에서 절세적인 검법이라고 불러서 마오검이오만. 검에는 실상 정사의 구분이 없지요. 대략 한 갑자 이전에 이 정사십검(正邪十劍)이 의미 없는 구분이라는 걸 밝히려고 했던 분이 있었고, 그분은 무림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초식을 엮어 다섯 가지 검초를 구상했소. 그 이름이 흑백연주오절검(黑白聯珠五絶劍), 바로 평오검이고.”

희지원이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걸 확인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초식이라기보다는 뜻을 담은 검이지요. 상승의 검법은 다 그 오의(奧義)를 깨닫는 방편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평오검이라는 흑백연주오절검의 명칭도 처음 듣지만,

희지원뿐 아니라 오소민까지 귀를 기울였다.

해원기가 무공, 특히 검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 절로 독특한 기세가 일어난다.

“희 소협의 사조이신 공손 노사는 절세오검의 네 가지를 완벽히 터득한 후에 스스로 천주검도를 창안하신 분. 그렇다고 절세오검의 마지막 하나를 모르는 분은 아니요. 흠.”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잠시 숨을 고르고,

“절세오검의 마지막 하나만을 익힌 사람은 교 노사라는 분. 그러나 교 노사 또한 절세오검의 다른 네 가지를 모르지 않았으니. 그래서 내가 요결을 물었던 것이니 이해하시오.”

희지원의 검을 가리켰던 손을 가만히 가슴에 댔다.

교 노사.

사부의 노복을 자처하며 언제나 어린 해원기를 감싸주던 파면(疤面)의 노인. 그 또한 종횡강호십팔마검의 한 사람이었다.

아련한 기억을 지우면서 희지원의 또렷한 눈을 본다.

“섬전은 빠르지만 쾌(快)가 아니고, 추풍은 복잡하지만 변(變)이 아니며, 탈혼은 기괴하지만 궤(詭)가 아니고, 붕악은 무겁기 그지없어도 중(重)이 아니다. 이 요결을 공손 노사와 교 노사 모두 알기 때문이었지요. 희 소협이 방금 한 대답 중에 ‘그리고서야’가 바로 붕악이 네 번째 오는 이유. 이를 잘 헤아리면 비천경혼음마검(飛天驚魂陰魔劍)도 자연히 이르는 법이라.”

절세오검의 마지막 한 가지.

다른 네 가지 검법의 이름은 전부 두 글자, 오직 이것만이 참으로 긴 이름을 지녔다.

붕악 하나만을 익혔다는 희지원에게 뭐하러 절세오검을 다 풀이해주는가.

해원기가 말을 잠시 멈추자마자 오소민이 불쑥 탄성을 토한다.

“허! 절세오검이 사실은 하나였구나.”

같은 얘기를 들어도 깨달음은 다른 법.

곁에서 듣던 오소민은 이미 해원기의 이야기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냈다.

희지원의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듣기는 해도, 단박에 그 의미를 깨닫기 어려웠는데.

오소민의 탄성에 머릿속에 번갯불이 치는 것 같다.

“쾌변궤중이 아닌 섬화이…굉. 번쩍하다 사라지면 전혀 다르니, 산악을 무너뜨리는 힘은 바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오검이 존의(存意)라면 마오검은 불의(不意)랄까. 그리고 아까 마 장문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에게는 타고난 기질이란 게 있소. 공손 노사는 희 소협에겐 붕악이 어울린다고 보신 거지요.”

깨달음을 전해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 계기를 만들어줄 뿐.

떡을 손에 쥐여 줄 수는 있어도, 씹어 삼킬지 뜯어 먹을지는 오로지 개인의 의지에 달렸다.

어쩌면 해원기의 말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은 건 오소민일지도.

그쯤에서 말을 멈추려는데,

희지원이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그, 그럼 왜 저를 화산에. 저, 저는 자하공을 익히고, 단홍검법을 배우느라, 아니, 붕악을 아는 티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비마방 출신이라서.”

치켜뜬 눈, 붉어진 얼굴.

뭔가를 깨달으려던 조금 전의 표정 대신에, 억눌린 감정이 와르르 터져 나왔고.

“흐음.”

감탄하던 오소민이 팔짱을 끼며 시선을 내렸다.

처음부터 희지원의 방문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었기에.

이 돌연한 감정의 표현을 알만했다.

장문인의 기명제자. 마린이 가르쳐준 화산파의 무공을 혼자서만 익혀야 했겠지. 기존에 배웠던 걸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른 채.

화산오봉 중의 외톨이일 수밖에 없다.

해원기 역시 표정이 조금 변했으나, 말을 멈추려던 생각은 되레 사라져서.

희지원의 하소연을 못 들은 것처럼 말을 이어간다.

“그래도 절세오검은 한 사람이 창안했지만, 오악검법은 각기 전혀 다른 도리와 전통을 배경으로 하지요. 동악은 보일 듯 말 듯 아득한 바다를, 남악은 구름을 뚫고 솟구친 칠십이봉을, 다른 삼악(三岳)은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중악은 소림사의 수미전단검법, 당연히 불가의 이치요. 북악은 항산파의 복룡검식, 만물의 시초를 음으로 삼으며. 서악은 화산파의 단홍검법, 자연의 변화를 담는 도리다.

이미 주인이 있는 세 가지 검법을 함부로 논할 필요는 없다.

울컥했던 희지원이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이 초점을 모아야 했다.

가르침.

이 시각에 굳이 찾아온 이유요,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검왕이잖나.

할아버지와 사모가 늘 말씀하시던 ‘그분’의 유일한 제자다.

오랜 울분이 왈칵 치밀긴 했어도, 참으로 얻기 어려운 기회라는 걸 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기에.

낡은 탁자를 부여잡고 억지로 감정을 다스린다.

해원기의 말은 계속된다.

“그렇게 따지면 무당파의 검도 오악검에 절대 뒤지지 않소. 여기 화산과 가까운 종남의 검도 마찬가지. 강호의 호사가들이 흔히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검법이 있다고 하는데. 흠, 그저 과장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많은 검법 중에 자신과 맞는 걸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런 점에서 희 소협은 복이 많다고 해야겠지요.”

울분에 싸인 희지원이 복이 많단다.

어이없는 얘기지만, 희지원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해원기가 바로 질문을 던지는 통에.

“상상해봅시다. 만약 공손 노사가 정파의 검법만을 익혔다면 천주검도의 기초를 어디서 시작했겠소?”

“……?”

희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세오검의 네 가지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그 위에 자신만의 천주검도를 정립한 할아버지가 정파의 검법만을 익힌다?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홀린 것처럼 해원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깊으면서도 맑은 눈.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멍한 모습.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비추었던 또 다른 눈.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머금고 유리알처럼 반짝이던 공손무원의 눈.

굉력의 붕악을 제대로 펼치려면 섬전, 추풍, 탈혼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방금 배웠잖아. 섬화이굉이라고. 빠르게 번쩍이고, 바뀌다 사라지며, 같은 듯 다르다.

저절로 해원기와 비무를 펼치던 마린의 모습이 그려진다.

홍화만산, 좌애만풍. 요자번신에 백화요란…….

“아!”

바보처럼 벌어지는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해원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소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손 노사가 남기신 검이 여기 있으니. 술 한 잔으로 추도(追悼)한다고 욕하시진 않을 걸세. 자.”

다른 생각을 하던 오소민이 퍼뜩 머리를 쳐들다가.

비로소 자신이 호리병을 들었다는 걸 기억했다.

처음에 희지원에게서 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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