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2화 (163/410)

제41장 정사분별(正邪分別) (2)

사실 심중의 격동을 감추려고 얼른 둘러댄 화제였지만.

오소민의 말대로 화산 제자들의 태도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강호에 알려진 소문이나 해원기와 오소민이 직접 상락에서 겪은 바로는 마린은 화산검협이라는 외호에 걸맞게 훌륭한 인품과 무공을 겸비한 인물.

문파의 제자들이 존경과 추앙을 더하는 장문인이어야 어울릴 텐데.

해원기가 잠깐 생각하다가 머리를 저었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네. 풍림당과의 사연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해. 그저 이번 비검이 마 장문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음.”

남의 집안 문제다.

아무리 과거의 인연이 있다고 해도 해원기에게 화산파 내부 사정에 끼어들 자격이나 권한 따위는 없고.

자칫 커다란 실례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얽혀 이룬 복잡한 사정. 왜 사부가 무림의 방회문파(幇會門派)와는 거리를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사부의 말을 전해주었던 건 무슨 이유일까.

한숨이 나올 것 같은데.

“하여간 대단한 비검이었어. 마 장문인의 어검강은 참으로 무섭더구먼.”

오소민이 화제를 바꾸며 새삼스레 감탄한다.

다른 문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금기쯤은 당연히 아는 개방의 장로. 해원기의 말이 아니어도 화산파 얘기를 더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해원기가 불쑥 들려준 ‘그분’의 말씀.

오소민이 받은 충격은 마린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가볍지 않아서, 마음속의 파문이 쉬 가라앉지 않는다.

혹시 해원기에게 그런 심사가 드러날까 자꾸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

화제가 비검이 되자 해원기의 표정도 바로 바뀌었다.

“무섭지. 무림사에서 검강과 어검을 그렇게 쓰는 이는 지금껏 없었을 걸세. 더구나 마지막의 혼원일검. 쌍검을 하나로 엮으면서 혼원지세(混元之勢)를 구현한 건 정말.”

탄복하는 표정.

하여간 무공 얘기가 되면 딴사람이 된다니까.

오소민이 삐죽거리려던 입 모양을 혀를 차며 가렸다.

“칫, 혼원지세는 또 뭐야? 다 자네랑 같은 경지에 든 게 아니니까 좀 쉽게 말하라고. 검왕 나, 으, 리.”

그래도 놀리는 소리가 붙자 해원기가 두 손을 들었다.

“아아. 내 잘못했네. 자세히 설명할 테니 그 나으리라는 소린 좀.”

차라리 바부탱이나 고구마 대장이 낫다.

해원기가 꼼짝없이 승복하자 오소민이 또 말을 바꾼다.

“그나저나 자넨 멀쩡한가? 아무리 그래도 꽤 격한 싸움이었을 텐데. 피곤하지 않아?”

비검을 설명하라더니 이번엔 고생했다고 걱정해주는 건가.

헷갈리게 하는 친구.

그래도 해원기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돌아왔다.

침상에 드러눕는 것보다 친구와 이런저런 나누는 얘기가 더 피곤을 풀어주니까.

“나도 배운 게 적지 않네. 그러지 않아도 내 공부를 다시 점검하던 중이어서.”

“호오, 그러니까 마 장문인은 결국 검어강(劍御罡)이라는 경지로 나아간단 말이지. 글자 하나 자리를 바꾸었을 뿐인데도 의미가 확실히 달라지는군. 그럼 검중강(劍中罡)이나 검위강(劍爲罡)과는 얼마나 차이가 나?”

해원기가 슬쩍 자기 얘기로 빠지려는 걸 가차 없이 끊는 오소민.

한 시진이 다 되어간다.

비검을 끝내고 대청에서 보낸 시간, 이 방에 와서 마린에게 들은 화산파 사정, 그리고 오소민에게 하는 비검의 설명.

친구와 두런두런 나누는 얘기가 좋긴 해도 슬슬 지칠 때.

해원기가 자그마한 덧창을 가리켰다.

“이러다가 해 뜨겠네. 그래도 잠깐 눈은 붙여야 하지 않나.”

거센 돌풍이 부는 낙안봉 높은 곳의 건물이라 창문도 작고 단단하게 덧문까지 닫혔지만, 틈새가 조금 밝아진 느낌.

인시쯤 되었을 것이요, 산꼭대기의 아침은 일찍 밝는 법이다.

오소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해줘야 할 자신이 도리어 더 피곤하게 만든 셈.

냉큼 침상에 다리를 올리면서도 입맛을 다시며,

“영 입안이 팍팍해서. 잠이 올라나 모르겠구먼. 자네랑 처음 밤을 새울 때는 그래도 닭고기와 좋은 술이 있었건만. 쩝.”

한참 떠들었더니 배가 고픈가 보다.

덕주 부둣가의 오두막에서 덕주배계와 고패춘 한 병을 나누며 새우잠을 잤던 추억.

아주 예전 일처럼 얘기하는 오소민을 보며 해원기가 빙긋 웃었다.

그 또한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처음 방문한 화산파에게, 분위기도 그다지 좋지 않은 판에 술을 내라 할 수는 없잖나.

단념하고 침상에 오르려는데.

해원기의 얼굴이 홱 돌아가고, 오소민이 누우려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느낀 기척.

닫힌 문을 향해 해원기가 물었다.

“누구시오?”

마린이 다시 돌아온 건 아니다. 그러면 먼저 헛기침이라도 했을 터.

과연 나직한 음성이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들어온다.

“이런 시각에 죄송합니다만, 괜찮으시면 잠시 뵈어도 되겠습니까?”

해원기가 오소민을 보며 미간을 좁혔고, 오소민이 손가락 세 개를 세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오봉의 세 번째라는 운대검 희지원.

항상 주눅이 든 것 같은 그의 음성이었다.

문이 열리고, 하나 있는 의자에 옹송그리며 앉은 희지원.

해원기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이십 대 초반일 듯, 바로 아래인 낙안검 곽위와 별로 차이가 나 보이지 않지만.

곽위와는 정반대로 자신 없이 내리는 눈길과 어두운 표정. 화산오봉 중에서 가장 체구가 크면서도 존재감이 희미한 편이다.

그런 희지원이 무슨 일로 찾아왔을지. 그것도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처럼 혼자서.

오소민이 일부러 티를 내며 희지원을 훑어본다.

“운대검이라는 명호의 희 소협이었지요?”

“아, 네. 소협이란 호칭은 과분해서…….”

“허, 거지한테는 다 소협이고 대협이지. 그런데 뭘 좀 가져왔소? 그러지 않아도 목이 컬컬하던 차라. 장문인이 보내셨나?”

넉살 좋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상대의 말문을 열려는 뜻.

희지원이 침상에 앉은 두 사람을 힐끗거리더니 슬그머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면서.

“이거라도. 근방의 싸구려 토주(土酒)입니다만. 제가 두 분을 찾은 걸 장문인께서는 모르십니다.”

오소민이 묻는 대로 다 꺼내고 답한다.

오소민이 히죽 웃었다.

대뜸 희지원이 꺼낸 호리병을 낚아채 해원기를 가리켰다.

“두 분은 무슨. 나는 희 소협과 아무 인연도 없는 처지, 아마 이 친구에게 볼일이 있겠지. 난 이거면 됐소.”

마린에게 고하지 않고 찾아왔다. 남몰래 왔다는 소리.

뭔가 내막이 있는 걸 직감해서 술병에만 관심을 두는 척, 대화 자리를 마련해주는데.

희지원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귀 방의 취개 단 장로님과도 면식은 있다고 하셨, 다만 저번에는 전혀 뵐 틈이 없어서. 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에, 해 대협께 따로 인사는 드려야겠기에.”

개방의 순행장로가 모른 척해주는 게 미안했나.

돌아앉으려던 오소민이 눈을 껌뻑이며 묘한 소리를 하는 희지원을 보았다.

희지원은 이미 해원기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하는 중.

“검주의 뒤를 이으신 검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절하듯 커다란 체구를 숙이는 희지원을 보며 해원기 역시 의아한 심정이었다.

취개 단삼육과 면식이 있다고 한 사람은 누굴까.

왜 남몰래 찾아와 해원기에게 따로 이런 정중한 예를 취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이 희지원이란 친구의 사부가 누구더라?

해원기가 얼른 두 손으로 희지원을 일으켰다.

“무슨 영문인지 알려주겠소?”

희지원이 머쓱한 듯 어두운 얼굴에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아, 네. 제가 워낙 서툴러서…….”

겨우 말머리를 찾는다.

“제 할아버님, 사실은 사조(師祖)가 되십니다만. 제 선친과 사모(師母)가 모두 할아버님의 제자라서. 할아버님의 유명(遺命)에 검왕을 뵙게 되면 반드시 인사를 올려야 한다고. 그래서, 네.”

어지간히 말주변이 없는 건 잔뜩 긴장해서다.

그러나 해원기와 오소민은 그 말주변보다 내용에 더 얼떨떨해졌다.

할아버지가 사조. 아버지의 사부니까 사조이고 가까운 사이라면 아예 할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와 사모라. 사모는 또 누구기에?

그리고 그 사조의 유명이 검왕을 뵙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란다.

해원기가 희지원의 어색해진 얼굴을 보며 물었고,

대답에 깜짝 놀랐다.

“희 소협의 사조, 할아버님은 누구시오?”

“예. 성은 공손(公孫)이란 복성이고, 함자는 무원(無願)을 쓰시는.”

“에?”

오소민도 놀란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든 술병은 아직 열지도 못했다.

천주마검(天誅魔劍) 공손무원.

한 갑자 전, 종횡강호십팔마검 중에서 가장 강했던 검객. 천하를 어지럽힌 죄로 봉검(封劍)의 약속을 사십 년이나 지켰고, 해원기의 사부를 만나 마침내 천하를 위한 한 자루 검이 되었던 전설의 고수.

숱한 검객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연검지회(練劍之會)의 발기인이기도 한 노강호는,

오 년 전에 그 파란만장한 삶을 끝냈다고 한다.

오소민이 처음 듣는 소식에 멍했다가 길게 탄식했다.

“하아, 오 년이나 되었다고? 그럴 수가. 어째서 부고를 알리지 않았소?”

희지원이 품을 여미며 머리를 숙였다.

“굳이 여기저기 알려 번거로움을 끼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전에 단 장로께는 귀띔을 해드려야 했는데. 나중에 사모께 꾸중을 들었습지요.”

공손무원의 또 다른 유명. 그래도 취개에게는 알려야 했는데 희지원이 시기를 놓쳤다는 건가.

그렇게 알아들으려는데,

“단 장로께 알리면 장문인도 알게 된다고. 혼이 났었습니다.”

마린이 알면 안 된다? 이 무슨 소리.

해원기가 숙연히 내렸던 시선을 다시 들었다.

“희 소협의 선친과 사모도 누구신지 알려주겠소?”

“네. 선친은 계옥(季玉)이란 함자, 사모는 위(魏)씨 성에 욱경(郁瓊)이라는 함자입니다.”

희계옥과 위욱경.

해원기가 머릿속으로 과거에 들었던 이름들을 뒤지는 동안, 오소민은 더 궁금해졌는지 제쳐 질문을 던졌다.

“아니, 희 소협은 누구의 제자인데?”

계면쩍은 듯 목덜미를 긁는 희지원.

“저는 장문인의 기명제자(記名弟子)지요. 이것도 할아버님의 뜻이라 사모도 할 수 없이…….”

기명제자는 말 그대로 이름만 올린 제자. 정식 제자 취급을 받지 못해, 사문의 절학도 함부로 배울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화산오봉의 셋째인 운대검이 기껏 기명제자라니. 그러나 그것보다 오소민은 다른 의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 장문인의 부인이.”

마린이 사부면 사모라는 위욱경이 바로 마린의 부인이란 뜻.

선뜻 잇지 못하는 오소민의 말끝을 뜻밖에 해원기가 받는다.

“당대 비마방(飛魔幇)의 주인, 예홍쌍잠(霓虹雙簪)이셨군요. 희 소협의 선친은 과거에 금마당(金魔堂)을 맡으셨던 분이고.”

희지원의 어두웠던 얼굴이 확 펴졌다.

“기억하시는군요. 네, 맞습니다. 선친의 외호가 금마, 오숙모(五叔母)는 젊어서 옥마(玉魔)라는 외호를 썼다고. 오숙모가 사모가 되었지요.”

해원기가 자신의 선친과 사모를 다 알아주는 게 참으로 기쁜 눈치.

그러나 오소민은 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처음 듣는 사실. 개방 순행장로인 자신이 처음 들으니 강호에는 소문도 나지 않았을 터.

섬서의 명문정파 화산파의 장문인과 산서의 오래된 흑도방파 비마방의 방주가,

부부였다니.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의 입에서 나왔다면 아예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오소민의 둥그레진 눈이 바로 해원기를 향했다.

숙모가 사모가 된 희지원이 어째서 기명제자일까.

왜 공손무원의 부고를 마린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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