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61화 (162/410)

제41장 정사분별(正邪分別) (1)

백여 년에 걸친 난세가 끝났다.

간신히 되찾은 안정, 다시 생명을 얻은 강호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잃었던 땅을 되찾고, 무너진 집을 고치는 이들.

무림을 떠받치던 전통의 명문들이 하나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일어섰고, 그중의 하나가 화산파였다.

다른 구주정문(九州正門)보다 먼저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건 역시 마린이라는 절정의 고수가 있기 때문이었지만.

문파란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행히 마린과 같이 화산의 맥을 잇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화산 풍림당.

그 오랜 난세 속에서 무수한 명문정파가 몰락했지만, 중원의 서쪽에 위치한 네 개의 검파(劍派)는 서로 힘을 합해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화산, 종남, 아미, 청성이 각각 풍림당, 은한전, 천불각, 천연궁이란 이름으로 뭉친 사대검계(四大劍界).

오욕의 세월은 지나갔고, 각기 본산을 되찾은 바에야 굳이 사대검계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같은 전통을 계승한 마린과 풍림당이 힘을 합쳐 화산파를 재건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문파란 같은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당시 사대검계를 맡던 분들은 대의(大義)를 좇아 맹(盟)에 참가했지만, 자파(自派)에 대한 고려도 잊지 않았다네. 그래서 사대검계의 태반은 그대로 파중(巴中) 땅에 머물렀고, 나중에야 난세가 끝났음을 알았지. 당연히 황산결전(黃山決戰)도 보지 못한 채. 대강의 얘기도 전부 풍림당주처럼 맹에 참가한 분들을 통해서만 들었고.”

황산결전.

난세에 종지부를 찍은 그 처절한 싸움.

마린의 얘기에 오소민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직접 참가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당세에 누가 그 사정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더구나 팔자(八字)의 언약(言約)이…….”

마린의 심정을 알기에 대화 상대를 맡았지만, 입에서 나오던 말이 흐려지며 절로 해원기를 쳐다보게 되고.

마린 역시 해원기를 의식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오 장로는 조금 다르지. 귀 사부이신 팔선(八仙) 어르신들은 그 언약과 상관없는 분들, 또한 개방은 전력을 기울였잖은가. 자네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과 진배없네. 팔자의 언약을 아는 것만으로도.”

옆에서 듣는 처지가 되었던 해원기가 궁금해졌다.

다른 얘기야 들으면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팔자의 언약이란 게, 뭡니까?”

질문은 마린에게 해도, 답은 오소민에게서 나온다.

“나 참, 당사자라고 해야 할 사람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나중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니까. 그분의 부탁이었잖아, 맹의 모든 이들에게 한 부탁. 고협(古俠)의 율법이라는 그거, 공을 세웠다고 내세우지 말 것이며, 그 능력을 자랑하는 걸 부끄러워하라는. 그래서 세상에서 잊히고자 모든 공로를 맹에 돌리셨으니. 쯧.”

막상 말하다 보니 스스로 언약을 어긴 셈이라.

오소민이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 세게 혀를 차는데,

“아.”

해원기가 짧게 탄성을 내며 눈을 감았다.

불긍기공(不矜其功), 수벌기덕(羞伐其能).

사부가 자주 입에 올리던 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말로써 약속을 맺어 그 뜻을 기리고자 했었구나.

고검협 묵세휘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고자 부탁했던 여덟 글자, 그게 바로 팔자의 언약이었다.

홀로 난세를 바로 잡고 사마를 멸한 거인의 단호한 의지.

해원기는 순간 자신이 황산 천결대의 무너진 폐허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참혹한 상처를 입은 채 홀로 선 사부의 곁에.

잠깐의 침묵은 아련한 추억 때문.

마린이 안타까움을 삼키고 다시 오소민을 향했다.

“팔자의 언약은 그분의 뜻을 받드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과거를 제대로 모르고 제멋대로 상상하게 했다네. 참으로 무지한 노릇, 그러나 그 무지가 오해를 부르고, 오해가 자만을 낳았다고 할까. 남의 공을 자신이 한 양 내세우고, 알량한 능력을 자랑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우리 화산이 그랬지. 후우.”

남 앞에서 자파의 치부를 밝히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장문인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으나.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꺼낸 이상 끝까지 해야만 한다.

“그래도 풍림당주께서 계실 때는 워낙 엄하게 제자들을 다스려서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가. 흠, 모든 것이 내가 장문인으로서 부족하기 때문일세. 본산을 되찾고 잃었던 검법 몇 가지가 돌아오니 세상을 전부 눈 아래로 두듯이. 아집이 지나치게 강해져 바른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오소민이 힘주어 입가를 당겼다.

마린이 대청에서 마지막으로 던진 좌정관천이란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당세의 무인들에게는 그런 면이 엿보인다. 평온한 일상, 그저 한 지역에서 얻은 명성에 취해 단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팔선 사부들에게 배우지 않았다면 오소민도 그 나이 또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 눈에 거슬리던 화산오봉의 언행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린은 당당한 장문인 아닌가.

뛰어난 무공과 인품을 지니고 화산을 관장하는 장문인이 이렇게 무기력할 수 있나.

무례한 질문이 나올까 애써 참는 표정이다.

해원기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래서 비무를 원했습니까? 정파성세(正派盛世)가 되풀이될까 염려해서.”

불쑥 건네는 질문.

남의 문파의 내밀한 얘기를 듣는 게 영 불편하고, 아울러 마린이 이렇게 속을 털어놓는 동기가 문득 가슴에 와 닿아서.

고사(故事) 하나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정파성세.

백여 년 전에 구주정문을 비롯한 무림의 정도문파가 갖가지 신공절학을 되찾아 무수한 고수를 배출했던 국면.

천하를 정도가 장악했으나, 이 성세가 바로 사마의 겁란을 부르는 시작이었고.

정도라는 이름 아래 패도(覇道)에 빠져 백여 년의 난세를 지속하게 했던 한 원인이었다.

탐욕과 질시, 그리고 어리석음.

유수한 명문정파가 그 구렁텅이에 빠져 뿌리째 흔들렸다.

마린도 익히 아는 역사. 눈가에 그늘이 진다.

“정파성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맞습니다. 제가 팔자의 언약을 알면서도 감히 회주께 실례를 범한 이유지요. 흐음.”

변변한 침상조차 갖추지 못한 가난한 살림. 재건한 일개 화산파로 정파성세와 비교하는 건 무리.

그러나 그 근본은 마찬가지다.

마린으로선 자존망대(自尊妄大)하는 문파의 기풍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

오소민이 그런 마린을 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사욕(邪慾)과 마심(魔心)을 어찌 외부에서만 찾으랴, 거지조차 헛된 꿈을 꾸게 하느니. 삼가고 또 삼가서 깊이 경계할지어다.”

“옳은 말.”

마린이 눈을 크게 뜨고 보는 바람에 오소민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여자라고 우기던 무시무시한 사부가 해준 말이지요. 본 방에도 미친 거지들이 있어서 장문 사형이 큰 곤욕을 치렀다니까.”

“훌륭한 계언(戒言)일세. 나도 잊지 않도록 하지.”

거듭 고개를 끄덕이는 마린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나마 오소민의 말에 조금 위로를 받은 듯.

남채화(藍采和)를 비롯한 개방의 팔선이 전부 나섰는데도 하마터면 개방 전체가 뒤집힐 뻔했던 사건. 그 사건 또한 헛된 야망에 물든 호법 장로들이 일으켰다. 당대의 개방이 사람을 가려서 받게 된 시초가 그 사건임을 잘 아는 마린이다.

자세를 바로 하고 해원기에게 무겁게 머리를 숙였다.

“이유야 어떻든 회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더는 오소민을 대화상대로 하지 않는다.

할 얘기를 마쳤다는 뜻.

그간의 사정과 비무를 청할 수밖에 없었던 곡절을 다 털어놓았으나, 결국은 화산파를 위해 해원기를 이용한 셈이니.

오소민이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우물거리다가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일파의 장문인이라도, 당세에 손꼽히는 협객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사죄해야만 한다.

안타까우면서 화가 치민다.

그런데.

“허!”

해원기의 깊은 탄식에 마린이 눈을 들었다.

침상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어깨 아래로 떨어진 더벅머리는 사죄하던 마린보다 더 무거워 보인다.

“언젠가 사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천하를 위한 적이 없다고.”

마린의 숙였던 머리가 언뜻 들리고, 오소민이 돌렸던 고개를 급히 바로 하고.

놀랐기 때문이다.

도탄에 빠질 뻔했던 천하를 구한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천하를 위하고, 모든 이를 아끼는 건 성인(聖人)이나 가능한 일. 나는 그저 평범한 일개 무부에 불과하다. 내가 검을 익힌 건 나를 길러주신 사부를 위해서였고, 내가 버렸던 세상에 다시 나아간 건 나를 믿어준 아우를 위해서였으며, 내가 과거의 묵은 망령들을 제거한 것도 사랑하는 제자의 미래를 위해서였을 뿐.”

길러주신 사부를 위해, 믿어준 아우를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전부 사사로운 이유.

사부의 말을 전하는 해원기의 음성은 어느덧 사부처럼 땅속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이 되었다.

“그러니 남에게 내세울 공이 없으며, 자랑할 능력 또한 아니다. 제 부모를 위하고, 제 형제를 위하며, 제 자식을 위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다 보니 부모가 아끼던 걸 따라 아끼게 되었고, 형제가 바라는 걸 같이 바라게 되었으며, 자식이 나아갈 길을 조금 더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정(情)이란 한 글자, 그걸로 족하다……라고.”

우울하게 흐려지던 말끝이 다시 이어지면서,

해원기가 떨어뜨렸던 머리를 들었다.

평소의 덤덤한 표정 그대로. 오직 두 눈만이 참으로 깊고 맑게 마린을 향한다.

“하시더군요. 장문인은 옳은 일을 했는데, 어찌 사죄하십니까?”

음성 또한 평소대로 밝아졌다.

마린과 오소민이 멍하니 그런 해원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거기에는 마린과 오소민이 처음 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부서질 듯 퇴색해버린 머리칼이 짓이겨진 얼굴 절반을 가린 흉한 용모지만, 하나 남은 눈에서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정이 넘치는 얼굴.

두 사람 다 본 적이 없는 해원기의 사부,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해원기가 마린을 배웅하느라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 동안,

오소민은 그저 망연히 쳐다보기만 했다. 넋이 나간 듯,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아서 보기 드문 표정.

대청에서 기다리는 화산파 문인들을 생각해 마린을 돌려보내자고 눈짓을 했을 때도 알아채지 못했다.

“오 형, 괜찮나? 오 형.”

거푸 부르는 소리에 초점이 잡히더니,

“차별애(差別愛), 그래, 그거……에?”

묘한 소리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무슨 소리인가?”

“그분의 말씀이 바로 성현의 가르침과 같다는. 아, 마 장문인은 갔어? 그렇지, 화산파 개구리들을 우물에서 끄집어내야 하니까. 음, 음.”

두서없이 엉뚱한 소리를 떠드는 자신을 비로소 깨달았는지.

오소민이 표정을 고치고서 뺨을 긁었다.

“그런데 여전히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단 말이야. 풍림당 출신의 개구리들이 화산을 말아먹을 지경이라는 설명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장문인. 그것도 당대 무림에서 알아주는 검객에게 함부로 대한다? 특히 일대제자인 화산오봉이라는 것들이. 자네가 확실히 겪었잖아, 마 장문인의 경지를.”

얼른 화제를 바꾸자, 해원기도 자연히 눈을 껌벅이게 되었다.

집안에는 어른이요, 무림에는 무공이다.

간과했던 부분을 잡아내는 건 역시 오소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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