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장 서악비검(西岳比劍) (4)
좌중에서 비검의 경과를 완전히 체감한 이는 당사자인 마린 혼자. 그다음이 설명으로나마 이해한 오소민일 텐데.
이 두 사람도 검상 두 가지가 한 자루 검으로 화했다는 해원기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좌우 장로와 화산오봉은 아예 아찔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마린이 풀어서 얘기해줄 때는 그래도 궁금한 걸 물을 수도 있었고, 버릇없이 의문을 표할 수도 있었지만.
해원기의 답은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다.
해원기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벌어졌던 입들이 간신히 움직인다.
“검환이 매개…….”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조양자가 중얼거리고,
“어자결을 왜 담는?”
주지화와 곽위가 시선을 마주쳤다가 서로 모른다는 걸 확인했으며,
“어검과 검강을 동시에 전부 막는다는 게.”
막내 임심미는 물을 데를 찾지 못해 머리만 이리저리 돌려댄다.
그 가운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이는 희지원 하나뿐.
당최 모르겠다.
어검과 검강의 합일이라면 마린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어검을 검강으로 귀납했다고 분명히 밝혔거늘.
같은 합일인데 뭐가 부족해서?
저절로 해원기가 거론한 부분을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대신 풀어주는 것처럼,
오소민이 혀를 차며 목소리를 높였고, 좌우 장로와 화산오봉은 홀린 것처럼 시선을 모아야 했다.
“칫, 좀 알아듣게 말하면 혀가 꼬이나? 마 장문인의 어검강이 왜 검환을 매개로 하는지, 그래서 자네가 어떤 곤경에 처했는지, 궁여지책으로 무슨 꼼수를 썼는지 샅샅이 털어놓으라고. 이 친구야.”
머리라도 쥐어박을 기세.
당장이라도 ‘바부탱이’니 ‘고구마대장’이니 부르며 성질을 낼 것처럼 인상을 쓰지만,
해원기는 이게 일부러 하는 연극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공박하는 말투면서도 마린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으니까.
해원기의 굳어지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사람들의 기미를 읽고, 좌중의 분위기를 헤아리는 데는 오소민을 따를 수가 없다.
새삼스럽게 그 우정을 느끼면서,
말을 가다듬었다.
“음, 검환은 강주, 즉 원융무애(圓融無碍)의 형상. 하늘을 자유롭게 누비는 어검을 땅처럼 굳건한 검강에 귀납하는데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치를 써서. 그래야 양극음생(陽極陰生)이 되니까 일검에 천지만상의 변화를 품을 수 있고. 아, 장문인. 혹시 제가 함부로 넘겨짚은 게 아닌지?”
“하하, 맞습니다. 계속하십시오, 덕분에 제 수고가 확 줄어들었답니다.”
주제넘게 떠드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는 마린의 환하게 웃는 얼굴에 사라졌다.
그 또한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는 눈치.
해원기가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며 붙였던 두 손을 뗐다.
“어검의 어(馭)야말로 그 변화의 극을 이끌 비결일세. 그래서 마지막의 일검은 이미 일검이 아닌 천지만상. 머리를 노릴지, 가슴을 뚫을지, 허리를 벨지, 다리를 꿸지. 심지어 근육을 끊는지, 뼈를 꺾는지, 경맥과 내장을 흔드는 건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네. 순서와 위력이 헤아리기 어렵게 뒤섞였거든.”
일단 무공 얘기, 그중에서도 검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자 굳었던 입이 술술 풀린다.
본래 그런 습관이 있지만, 역시 오소민과 대화하는 방식이 가장 편해서일지도.
그런데 말과 함께 더하려던 손짓이 언뜻 멈추었다.
“아! 혼원일검이라는 명칭이 바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 그건 골똘히 궁리에 빠졌던 희지원이 황연한 깨달음을 참지 못해 터뜨린 탄성이었고.
해원기가 그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딱 맞는 이름이지요. 꽃 같은 검강을 산으로 삼고, 산 같은 어검을 꽃으로 피웠기에 건곤천지(乾坤天地)가 둘로 나누어지기 전으로 모여드니까요. 대처할 방법이 없소.”
희지원에게 하는 말이라 어투를 조금 높이는데,
오소민이 얼른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지. 곤경이었잖아. 그래서? 뭔 꼼수를 썼어?”
자칫 화제가 빗나갈까 봐, 성급하게 결론을 재촉하는 모습.
이 또한 바로 곁에서 전해지는 기척 때문에 하는 연극이다.
해원기의 특이한 비유에 화산의 장로 둘이 오한이 든 것처럼 부르르 떨며 헐떡거리니.
오소민은 이미 화산파의 기묘한 분위기를 파악했고, 되도록 빨리 해원기를 이 분위기에서 빼내고 싶었기에 다그친 것이지만.
아무리 영민한 오소민이라도 해원기가 희지원에게 덧붙인 비유가 설마 화악검결의 핵심구절이란 건 짐작할 수 없었다.
태화(太華)는 태화(泰花)라, 붉은 꽃이 화산이요. 서악(西岳)은 서하(西霞)라, 노을 걸린 하늘일세.
검강과 어검을 합일하려는 화악검결의 구절.
장문인에게 그 비결을 직접 들은 이라곤 장로 둘뿐이다. 대화산파의 영광을 약속하는 이 비결을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전욱과 풍엽도장은 잠깐 새에 중병이라도 앓은 것처럼 핼쑥해졌지만,
해원기는 ‘꼼수’를 밝히느라 꽤 애를 먹는 중이었다.
“본래 유리와 본연의 두 가지 검상으로 장문인의 불요불굴에 맞섰지. 검강과 어검의 어검강에는 역시 보이는 검과 보이지 않는 검, 은현(隱現)의 쌍검이어야 했으니까. 그래도 단홍검법으로는 장문인의 상대가 되질 않아서 이것저것 끼워 넣어야만 했다네. 그랬더니 초식은 견뎌도 공력이 딸려서, 에, 검기(劍氣)가 역류할 지경이랄까. 이것도 정확한 말은 아니고.”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말이 자꾸 끊긴다.
굳이 검왕수를 밝힐 필요는 없다. 마린과 오소민은 이미 해원기의 맨손이 능히 진검(眞劍)과 같음을 알지만.
오행어검(五行御劍)을 여기서 설명하긴 곤란했다.
검강과 어검의 분기가 다시 합치는 경지, 그건 검강성상과 신어검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마린의 태화검강은 이미 검상을 구현하는 곳까지 이르렀지만, 서악어검은 아직 기어검의 수준. 그래서 어검을 검강에 귀납하는 층차를 거칠 수밖에 없다. 즉, 엄밀히 말해서 혼원일검은 검강성상에 속한다.
설사 서악어검이 신어검에 이르렀다 해도 어검(馭劍)은 어검(御劍)이 아니다. 그러나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해원기 자신도 아직 완벽히 장악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중원의 무리(武理)로는 고죽의 신왕공을 이해할 수 없다.
사부에게 배운 것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라서 어지러울 정도라, 해원기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한숨이 나올 지경.
그때, 가장 답답해하던 임심미가 기어이 불만을 토로했고,
“아니, 검강과 어검을 얘기하다가 난데없이 검기는 뭐람?”
해원기는 도리어 순간적인 영기가 움직였다.
“그렇군. 검강과 어검도 바탕은 기의 발현이지. 응축하여 강기고, 신장하여 어검이니. 장문인의 혼원검세(混元劍勢)는 음양의 역전을 바탕으로 삼았기에.”
비로소 자신의 양손이 제멋대로 검상을 변환한 이유를 깨닫자,
마린이 탄성을 올렸다.
“허, 그것까지 알아보셨습니까?”
양강(陽剛)의 태화검강에 음유(陰柔)의 서악어검을 귀속해야 일검에 혼원지태(混元之態)를 담을 수 있다.
그러면 왜 오행제림과 오귀전륜이 강화되었나. 상생과 상극이 음양의 역전을 저절로 느끼고 거부했기 때문.
해원기의 말이 빨라졌다.
“네. 부리는 검과 부려지는 검이 순간적으로 극명하게 분리되더군요. 그래서 천지만상을 단 하나의 변화로 진압하고 근원을 음양순조(陰陽順調)로 되돌리는 역상정위(易象正位)의 형이 혼원일검의 약점을 찾았던 겁니다. 하지만, 장문인의 검력(劍力)이 워낙 강해서 제 손을 알맞게 다스리지 못했으니. 후우,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한숨과 함께 두 손을 무겁게 모아 예를 취하지만,
그 한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하마터면 마린의 검을 부러뜨릴 뻔했던 과격함에 대한 사과, 어떻든 원만하게 설명을 마쳤다는 안도.
그리고 검왕오형의 네 번째, 역상정위가 어떻게 저절로 발동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복잡한 심경까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린은 심중의 격동을 표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오랫동안 궁구했던 문제를 풀 단서. 깨달음은 봄날 우레처럼 문득 닥치는 법이런가.
“오오, 면강(勉强)의 어자결이 아니라 알맞게 다스리는 어(御)여야 하는 것을! 억지로 부림은 자연스러운 다스림이 아니다! 이렇게 우매할 수가.”
눈앞이 훤해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
마린이 해원기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홍소를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회주의 가르침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협이라는 호칭이 도로 회주가 되었지만,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커다란 웃음으로 단심원의 대청을 울리는 돈오(頓悟)의 열락(悅樂). 그 속에는 패배한 아쉬움 따위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아서.
참으로 대협의 풍모.
해원기와 오소민이 절로 흔연해졌다.
“가르침은 과분한 말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고,”
“훌륭한 비무. 장문인께 감사와 축하를 드립니다.”
따뜻한 시선이 교차하면서 마린의 웃음이 잦아들고,
해원기의 손을 끌어 일으키더니 대청을 크게 훑어본다.
“내 욕심에 귀한 손님들께 너무 폐를 끼쳤소. 두 분이 잠시 쉬도록 내 직접 모실 터이니 좌우 장로와 화산오봉은 여기에 대기하도록. 우물에 앉아 보는 하늘과 진짜 하늘이 어찌 다른지 함께 논해봅시다.”
우물에 앉아 보는 하늘. 좌정관천(坐井觀天)은 우물 안 개구리를 뜻하는 성어.
근엄하게 건네는 말에.
두 명의 장로와 화산오봉 모두가 얼이 빠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백해진 안색에 흔들리는 눈동자, 마린의 신광 어린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더니,
마침내 전부 손을 올려 예를 취한다.
“삼가 장문인의 명을 받습니다!”
대청을 가득 채우는 정중한 인사말.
마린이 그대로 몸을 돌려 해원기와 오소민을 단심원의 안쪽으로 청했다.
화산파 장문인으로서의 당당한 권위요, 그만큼 극진한 대우다.
만난 이후로 처음 보이는.
양쪽 벽에 붙인 작은 침대와 가운데의 낡은 탁자가 전부인 방.
문을 닫고 돌아선 마린이 의자를 끌어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원주인 전 장로의 방을 제외하곤 침상이 있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화산은 가난하거든요.”
하나뿐인 의자를 마린이 차지했으니 해원기와 오소민은 각각 침상에 걸터앉을 수밖에.
낡은 건물의 소박한 방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명문정파는 화려한 외관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기에.
마린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바로 말을 이어간다.
“회주에겐 비무의 가르침을 받았고. 오 장로에게도 따로 감사를 표해야겠네. 가난한 살림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가려주더구먼. 창피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나, 회주와 오 장로가 방문했다는 소식에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어서. 후후.”
씁쓸한 웃음.
오소민이 그제야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쩝, 감히 나설 처지가 아닙니다만. 장문인의 생각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화산에 올라 마린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일련의 상황에는 특별한 의도가 깔려있다.
해원기의 시선도 조용히 전해지자 마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참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일. 그러나 회주와 오 장로에게 이미 죄를 지었으니 더는 숨길 수가 없지. 선사의 유지를 받들어 화산을 중흥하는 데 진력했으나,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더군. 혼자서 산에 올라 검을 높이 쳐든들 문파가 저절로 이루어지진 않으니. 그나마 풍림당주께서 살아계실 때는 미처 깨닫지도 못했었다네.”
오소민을 대화상대로 정한 건 속에 든 얘기를 꺼내기 편해서일 터.
조금 전 대청에서 위엄을 보였던 마린의 얼굴은 어느새 피곤함에 지쳐 보였다.
문파.
해원기가 마린의 지친 표정을 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무림의 어떤 세력과도 얽히지 않으려 했던 사부. 홀로 외로이 검 한 자루에 의지해 강호를 걸었기에 고검협(孤劍俠)이란 외호가 붙었었다.
물론 세상이란 사람이 어울려 사는 곳. 사부에게도 형제와 벗이, 사랑하는 이가 생겼지만.
한 문파를 이룬다는 건 어떤 일일지.
지금껏 생각해본 적이 없다.
방안에 마린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진다.
절령제십(節令第十) 하지(夏至)
여름의 네 번째 절기. 이날이 되면 땅에 빛을 내리쬐는 태양이 하늘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 처한다.
‘일장지지(日長之至), 일영단지(日影短至)’라니 해가 가장 길고, 그림자가 가장 짧은 날. 지(至)는 극(極)을 뜻하여, 그런 까닭에 하지(夏至)라 부른다.
태양이 가장 높이 뜬다고 해서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은 아니요, 하지를 지나면서부터 대지는 마침내 열을 품기 시작해서, 진정한 열은 삼복에 있게(熱在三伏) 된다.
하나 양극음생(陽極陰生)이라. 하지를 지나면서부터 낮은 하루하루 짧아지고, 온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비가 자주 내린다. 장강 중하류 지역에는 빈번히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기도 하고, 곳곳에서 불시에 뇌우가 퍼붓거나 아예 흐린 날과 장마가 연이어지기도 한다.
덥고, 습하고. 사물에는 곰팡이가 피고, 사람은 식욕을 잃고.
진짜 여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