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장 서악비검(西岳比劍) (3)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있다가 없어지면 시야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쇠기둥의 불빛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돌풍과 흙먼지가 사방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관전하던 이들은 절로 눈을 껌뻑일 수밖에 없었던.
그 잠깐의 시간.
마린은 바로 앞에 다가온 해원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새 집어 들었는가.
해원기가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내미는 두 손 위에,
가지런히 누운 불굴검.
“무례를 범했습니다.”
표정만큼 딱딱한 해원기의 음성. 마린이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저린 왼손을 천천히 들었다.
왼손만이 아니다.
오른손이 쥔 불요검의 감각까지 잘 느껴지지 않으니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후.”
가만히 숨을 내쉬자 비로소 체내의 진기가 제 길을 찾는다.
얼른 불요검을 거꾸로 쥐고, 불굴검을 받아들었다.
신체가 전하는 것보다 더한 마음의 충격을 다스리며,
쌍불검을 거꾸로 쥔 두 손을 모았다.
“검을 맞대주신 데에 감사드립니다.”
무거운 목소리에는 아직 심중의 격동이 남아있지만, 정중한 예의.
해원기도 마주 포권의 예를 올린다.
“양보를 받았을 뿐입니다.”
이 또한 침중하기 그지없는 대답.
두 사람이 마주 예를 차리는 동안 돌풍과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양보를 받는다는 승양(承讓)은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하는 겸양의 인사말이다.
낙안봉 단심원의 연무장 앞. 이른바 참관이라는 형태로 비검을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을 잊었다.
비검의 마지막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어진 격돌의 여파에 잠깐 초점을 잃었던 탓에.
겨우 시야를 회복했을 때 들은 게 해원기의 겸손한 대답.
졌다.
당대 화산파 장문인인 화산검협 마린이.
철컥, 철컥.
마린이 쌍불검을 수납하고 해원기와 서로 손을 맞잡는 모습이 이어지고서야,
“사, 사부가 졌다고?”
“음.”
“장문인이? 어, 어떻게.”
화산오봉 다섯이 제각각 당황스레 말을 꺼냈지만, 그들보다 더 놀란 이는 좌우 장로였다.
눈자위가 찢어질 듯 크게 뜬 눈에 벌어진 입. 전욱의 얼굴은 경련이 그치지 않고, 풍엽도장의 낯빛은 허옇게 질려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단속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는 마린과 해원기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화산파를 지탱하는 두 장로라는 소개대로 그들은 그래도 비검의 경과를 놓치지 않아서,
불요불굴의 장대한 일격이 부러지듯이 깨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화산제일검(華山第一劍)이 졌다.
검강과 어검을 합일한 절대의 일격이 한 쌍의 맨손에 무너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마지막에 펼친 혼원일검(混元一劍)에 그런 약점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단심원 안.
자리에 앉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마린의 신색은 이미 평소와 같았다.
본래 화산파 제자들이 무공을 익히는 곳이라 단심원의 대청은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조.
대청 안쪽에 협탁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큰 의자 두 개, 양쪽에는 벽을 따라 두 줄로 의자가 놓였을 뿐이다.
마린이 앉은 쪽에는 화산오봉이 차례대로 옆자리를 차지했고, 해원기가 앉은 쪽은 오소민과 화산의 좌우 장로.
따뜻한 차 한 잔 나오지 않았지만, 마린은 꽤 홀가분한 표정이어서.
대조적으로 굳은 얼굴의 해원기가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아니, 어검을 검강으로 귀납하는 그 혼원일검에는, 저도 크게 놀랐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모여든다.
어검을 검강으로 귀납한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말.
마린이 미소를 지으며 화산오봉을 훑어보고,
“몇 년 전에 사부가 따로 검도를 강론했던 걸 기억하느냐? 검강과 어검에 관해.”
묻는 말에 조양자가 대표로 답한다.
“네. 검강과 어검의 분기, 검강이 검상으로, 기어검이 신어검으로 나아가는 층차를 설명해주셨지요.”
마린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해원기를 향했다.
“예전에 그분께 들었던 걸 전해주었지요. 그러면서 처음으로 어검강이란 걸, 제가 지향하는 길도 밝혔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
불쑥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를 설명하더니 시선이 슬쩍 자신의 허리춤을 본다.
“그때 새로 이 두 자루 검을 만들고 불요와 불굴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선대로부터 받은 쌍산검(雙山劍)을 뛰어넘겠다는 생각으로. 하하, 민망하군요.”
이런저런 옛 얘기를 꺼내는 게 쑥스러운지.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에 해원기가 남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릎 위에 얹은 두 손, 주먹을 쥐었던 손이 펴지고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마린이 옛 얘기를 꺼내고 웃는 게 다 해원기를 위해서라는 걸 충분히 느꼈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비검은 이루어졌고,
승패는 났다.
그 안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지만, 그건 해원기의 문제다. 지금은 패하고도 이렇게 활달한 마린의 뜻을 따라주는 게 옳다.
한 갑자 이전에 강호를 피로 물들였던 열여덟 명의 검객.
천하제일검을 노리고 천하를 혼란에 빠트렸던 종횡강호십팔마검. 그 가운데 가장 사이가 나빴던 두 사람, 종남파의 영락검선(永樂劍仙)과 화산파의 서악제일검 대숙륜(戴叔倫)을 동시에 사부로 모셨던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마린이다.
그래서 그가 처음에 지녔던 쌍검을 종남산과 화산의 검이라고 쌍산검이라고 했다던가.
어울리지 않는 두 문파의 무공을 지닌 탓에 주화입마에 들어 목숨을 잃을 차에, 서악제일검 대숙륜이 자신을 희생해 마린의 임독양맥을 타통시켰고.
그 후로 마린의 인생은 화산파를 위한 삶이었다.
그건 사람으로서의 의리. 그러나 또 한 가지, 한 개인으로서 그의 삶을 규정짓는 것은 바로 검객.
어떤 어려움에도 절대로 꺾이지 않겠다는 결심을 새로 만든 쌍불검에 담았으리.
해원기가 굳었던 얼굴을 바로 하며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겸손의 말씀. 사부님께서 일러주신 적이 있지요. 마 장문인이야말로 심검경(心劍境)에 닿을 사람이라고.”
심검경이란 말에 좌중이 또 놀라는 분위기.
마린이 모른 척 웃음 끝을 흐렸다.
“하, 과분한 칭찬을. 마 모의 낯이 뜨겁군요. 해 대협이 이미 보셨듯이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장문인은 이미 스스로 분기의 어느 쪽이 가까운지 알고 있잖습니까. 혼원일검이 바로 그 방증이지요.”
“말이 또 그렇게 되는군요. 하긴, 검강을 축으로 삼아 어검을 상으로 삼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기어검으로는 부족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귀납하지 않으니 아직은 무리랍니다.”
“그건…… 음, 사부님에게 배운 바로는 의상(意想)에 얽매인 탓이라고. 저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처지라서.”
해원기가 평소처럼 머리를 긁으며 말을 줄이자,
마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십이 년 만이다. 열여섯 홍안의 소년이 스물여덟 먹은 듬직한 청년이 되었고, 그 세월만큼 검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건만.
여전히 순수하고 다정하구나.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한다.
“단심원은 본 문의 연무장이니 잠시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줘야겠습니다. 곁에서 듣고 이해하기엔 아직 부족한 아이들이라.”
망연한 채 앉아있기만 하는 화산오봉을 가리켰다.
“전에 말한 대로 검도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검강과 어검이라는 분기를 만나게 된다. 이는 대개 타고난 기질에 따라 결정되는바, 나는 검강에 더 어울리지. 그렇다고 그 분기를 꼭 따라야 하는 법은 없기에 어검과 검강을 함께 펼치는 어검강을 구상하게 되었단다.”
여기까지는 배운 부분.
그래도 화산오봉 다섯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린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놀라운 비검을 본 직후라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할 터.
“검강, 즉 검기성강의 다음 경지는 검강성상. 어검, 즉 기어검의 다음 경지는 신어검. 똑같이 의상을 구현한다, 나는 본 문의 자하공을 대성하여 단공(丹功)에 접어들면서 어검강을 합일할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바로 검상을 어검으로 잡는 것이었지. 이를 위해서 불요검의 검강을 최대한 응축하여 강주로 만들었다. 이를 검환(劍丸)이라 한다. 혼원일검을 구사하기 위한 기초라고 할까.”
마린의 설명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듣다가,
말석에 앉은 소녀가 불쑥 손을 들었다.
“사부님, 검상을 어검으로 어떻게 잡아요? 불굴검이 아무리 어검이라도 불요검의 검환에 닿으면 도리어 깨지지 않나요?”
옥녀검 임심미.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귀여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 앞에 앉은 곽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전부 장문인의 자하단공이 깃들었으니까. 검환이나 어검이나.”
깨질 리 없다.
이어서 맨 앞에 앉은 조양자가 머리를 돌렸다.
“검강에 뜻을 두어 형상을 구현하는 검상이니 만상(萬象)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배웠잖아.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막내의 의문에 번갈아 답해주는 모습에,
마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어검을 검강으로 귀납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란다. 마침 나는 쌍검으로 어검강을 구사하는 검객, 어검을 검상으로 잡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귀납이 완전한 합일인가는 확신할 수 없었고.”
어느새 단심원의 대청이 열띤 논의의 장이 되었는데,
조양자의 옆에 앉은 여인, 부용검 주지화가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굳이 쌍검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검강성상으로 나아갈 것이라면.”
툭 내뱉는 소리.
혼잣말처럼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꽤 쌀쌀맞은 말투다.
그래도 마린은 미소를 잃지 않고,
“글쎄. 내 고집이겠다만. 네 말대로 낭비일 수도 있겠구나.”
선선히 그녀가 하려던 말을 알아준다.
검기성강에서 검강성상으로 나아가는 게 어울리는 기질. 그런데도 굳이 쌍검을 써서 어검을 덧붙이려 하는 건 쓸데없이 공력을 소모하는 일. 차라리 검 한 자루에 힘을 집중하는 게 옳다.
생각해볼 만한 얘기지만, 사부나 장문인이란 호칭도 없이 중얼대듯 떠드는 건 무례하지 않나.
탁탁.
오소민이 문득 허벅지를 두드리며 탄성을 토했다.
“호오! 아끼는 후대들을 위해 장문인이 직접 비검을 무릅쓰다니. 과연 화산파는 다르군요. 감복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오든 말든 마린과 두 장로를 번갈아 보면서,
“제가 워낙 무지해서 검은 잘 모릅니다만, 검강과 어검을 동시에 구사하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무공일도(武功一道)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검사가 지향해야 할 이상. 뭐, 그렇게 엄청난 얘길 하시던 사부가 한 분 계셨답니다. 그 얘길 들었을 때는 얼토당토않다고 여겼었는데, 장문인의 검을 보고서야 그 참뜻을 깨달았으니. 쯧쯧.”
자책하며 혀까지 찬다.
이제는 오소민의 사부가 누군지 아는 두 장로가 서로 마주 보다가 그저 마른 입맛만 다실 뿐.
개방의 팔선 중에 검을 쓰는 이는 단 하나. 진사구마(鎭邪驅魔)의 보검을 휘두르는 여동빈(呂洞賓)이 한 얘기라는 거다.
전설의 인물이 했다는 얘기를 빌어 마린을 극찬하는 표현.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비슷한 또래의 화산오봉에 비하면 참으로 다른 경지요, 그 의젓함 속에 은근히 풍자의 뜻도 담겨서.
전욱이 차마 오소민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급히 손을 내저었다.
“어리석은 것이 뭘 안다고. 조용히 장문인의 말씀을 듣지 못할까?”
벌컥 화를 내며 꾸짖는 시선에 주지화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데.
오소민이 일부러 손을 모아들며 말을 이었다.
“저로서는 그 비검의 내용을 좀 더 들었으면 합니다. 괜찮으시면 장문인께서는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뒤로 물리시지요.”
마린이 잠시 오소민을 보다가 빙긋 웃었다.
“흠, 개방 장로께서 나를 속 좁다 하시는구먼. 좋소, 그럼 해 대협께 답을 구해야지요.”
마린 자신도 몰랐던 혼원일검의 약점. 그걸 찾아내 깨뜨린 이가 해원기다.
대화의 핵심으로 다시 돌아가자, 해원기가 두 손을 들어 합장하듯 붙였다.
“삼 척의 불요검이 구현하는 검상이 삼 척 불굴검의 어검. 이를 위해 검강을 한계까지 응축한 검환이 매개가 되었지요. 그저 검강을 육 척으로 늘리는 게 아니라 어자결(馭字訣)을 담는. 실제로 장문인의 찔러오는 검이 어디를 노릴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찌르는지 베는지조차. 그래서 저도 검강과 어검을 동시에 막아야만 했습니다. 전부. 다만,”
화산오봉이 어리둥절해서 서로 쳐다보고, 좌우 장로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는 통에.
해원기가 잠깐 말을 끊었다.
말주변이 없어서 혹시 잘못 얘기한 게 있을까.
남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으리란 걸 모르고, 우선 끊었던 말을 맺어야 했다.
“오행상생의 금(金)이 오행상극의 수(水)와 바로 이어 붙을 줄은. 검상 두 가지가 한 자루의 양면으로 화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힘을 조절하지 못할 뻔. 음. 죄송합니다.”
다시 굳어지는 얼굴.
왜 해원기가 죄송하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좌중이 헷갈리는 중에도 전부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린이 했던 설명, 고심참담으로 궁구했던 어검과 검강의 합일. 바로 그걸로 혼원일검을 꺾었다는 말이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