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56화 (157/410)

제39장 화산검협(華山劍俠) (4)

일대제자들은 아예 넋이 빠진 상황이라.

장문인이 몸소 일어나 쓰러진 의자를 바로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 장로 두 사람을 앉히며 가만히 건네는 음성.

“감히 밝히기 어려운 이름이지요.”

무엇을?

설사 마린의 말을 들었다고 해도 어떤 이름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려운데.

인사를 마친 해원기도 묵묵히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화산의 고인 두 분’은 홉뜬 눈매에 붉으락푸르락하는 안색이 마치 화라도 난 것 같고, 그러면서도 선뜻 입을 떼지 못한다.

마린이 어두워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고쳤다.

“자, 인사는 대충 이렇게 마치고. 음, 위아의 보고를 받고 놀랐지요. 야심한 시각에 두 분이 화산을 찾았다니,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오소민에게는 이미 말을 놓기로 했으나, 일파의 장문인으로서 공식적인 자리.

정중하게 묻는 말에 궁금함이 묻어났다.

의외의 반가움은 잠시 접어둘 때다. 대체 어떤 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이 함께 화산을 찾았을까.

오소민이 슬쩍 해원기의 얼굴을 보곤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으나, 살짝 굳은 듯한 해원기의 얼굴.

“우선 이렇게 불쑥 찾아온 실례에 사과를 드리는 게 먼저겠지요. 화산의 여러 동도께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에, 어떻게 말씀드리면 좋을지. 복잡한 사건에 촉박한 여정, 그래도 섬서에 들어와 장문인을 뵙지 않을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게 된 겁니다.”

실례, 사과, 죄송.

오소민이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를 거듭하면서.

나름 간결하게 정리해 내놓은 답변에 좌중의 분위기가 겨우 바뀌었다.

안색을 고치고 옷자락을 바로 하는 장로 둘은 심중의 격동을 가라앉히려는 모습이고, 허리를 펴고 시선을 모으는 제자들은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다.

해원기의 신분이 어떻던, 지금 대화를 시작한 오소민은 개방의 순행장로.

기생오라비 같은 애송이로 보여도 천하제일대방의 당당한 장로이다.

개방의 순행장로가 직접 뛰어다녀야 할 복잡한 사건은 무엇이고, 어찌해서 촉박한 여정인가.

그러면서 화산을 굳이 찾은 건 단순히 인사를 나누기 위함만은 아닐 터.

마린이 희끗희끗한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 장로는 주로 산동에 머문다고 들었고, 귀 방의 총단은 하남의 개봉. 여기 섬서에 발을 들인 건 확실히 특별한 이유가 있겠군. 촉박한 여정이라도 굳이 본 파를 찾은 건 혹시 그 복잡한 사건과 얽힌 부분이 있어서일까?”

어색해진 좌중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오소민과 얘기를 진행하는 게 나았다.

마린이 말투를 편하게 바꾸면서 오소민에게 눈길을 던졌다.

“마침 오 장로의 사형과 연락을 취해볼 생각이었던 참에.”

오소민의 멋지게 뻗은 눈썹이 움직였다.

취개 단삼육과 연락한다라.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 장로만이 아니지. 풍진삼우 세 분이 다 필요할지도. 얼마 전에 섬북(陝北) 쪽에서 묘한 소식이 들어왔다네. 장풍보가 많은 인마를 거느리고 남하하는 것 같다고.”

“장풍보라면?”

“맞아. 이전에 단 장로와 내가 한번 더듬어봤던 곳. 상당히 수상한 집단이지만, 근 십 년에 이르도록 섬북 황릉에 처박혀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기에 그냥 놔두기로 했었지. 그런데 지금 무슨 목적으로 내려오는 걸까? 보주인 장풍무명 진자현이 직접 수백의 무리를 대동하고서.”

“네?”

오소민이 반문하며 절로 해원기를 쳐다보게 되었다.

자신과 해원기가 화산파를 찾은 이유를 대기 전에, 화제가 조금 어긋났지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장풍무명 진자현은 분명히 해원기에게 제압되었고, 태원의 관아로 압송되다가 중독되어 죽었다고 증명단에게 들었거늘.

해원기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기이한 파문이 일었다.

해원기가 머리를 슬쩍 젓는 뜻을 금방 알아챈 오소민.

여기서 해원기가 나서면 대화가 복잡해질 수 있다.

오소민이 계속 화제를 이끌어야 한다.

“장풍무명 진자현은 이미 죽었습니다. 산동까지 와서 도적질을 하다가 여기 해 형에게 혼이 났고, 태원 관아로 압송하던 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중독되어 죽었다고 들었지요.”

일단 간략하게 설명을 보태자 좌중이 술렁였다.

마린이 미간을 좁혔다가 원탁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원아, 이 소식은 네가 수집한 정보였지?”

큰 덩치에 우울한 표정을 지닌 운대검 희지원. 화산오봉에서 북봉을 맡은 청년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네. 이미 재삼(再三) 확인한 소식. 확실히 장풍무명 진자현이라고.”

“재삼? 누가 확인했기에? 어흠.”

그런데.

겨우 신색을 회복한 전욱이 먼저 인상을 쓰며 헛기침을 하고,

풍엽도장도 불편하게 머리를 외로 꼬는 통에 대화가 잠깐 멈추었다.

장로라고 해도 장문인이 얘기하는 중에 이렇게 끼어들다니.

해원기와 오소민이 저절로 좌중을 둘러보게 되었고, 둘러앉은 일대제자 넷이 다 어색한 표정을 떠올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양자와 옥녀검 임심미는 찡그린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곽위는 장로들처럼 의심스러운 듯 흘끔거리고.

희지원의 얼굴은 더 우울해졌다.

“본 장문인이 부탁한 일이요. 음, 그렇다면 확실할 텐데. 역시 장풍보는 귀신 소굴이 맞는 것 같군. 그러나 시기가 지나치게 공교로우니…….”

좌중의 분위기를 모른 척.

마린이 말을 끌면서 해원기와 오소민을 번갈아 보았다.

죽었다는 장풍보의 보주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는 이유. 그리고 야밤에 불쑥 찾아온 손님.

우연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우연으로 위장한 필연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 바로 강호. 그걸 젊은 시절에 절실하게 체험한 마린이다.

복잡한 사건과 촉박한 여정에 자신을 찾아온 이 두 명의 젊은 고수에게 실마리가 있을 듯.

처음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간의 사정을 전부 다 밝힐 수는 없다.

아직 모호한 부분도 있고,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추측하기 어려운 점도 많고.

오소민이 머리를 굴려 사건의 대강만을 간략히 추려내자,

좌중이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황궁 태감의 낙향, 상보감에 간직했던 아홉 개의 상자, 그 상자를 탈취한 아홉 무리의 도적. 그중의 하나가 진자현이었고, 이에 동창이 관련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니다.

마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얼굴이 되는데,

이번에도 전욱이 먼저 입을 연다.

“궁중의 비보를 훔친 도적이라. 동창이 나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럼 그 도적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는 말씀이요? 딱히 조정의 일에 끼어들 필요까지야.”

풍엽도장 역시 떨떠름한 기색.

“동창이 꽤 설친다는 소문이야 진즉 들었으나. 그렇다고 강호에 함부로 끼어들 수 있을까? 흑도(黑道) 패류(敗類)의 도적질이라도 일단은 각지의 명문정파에 문의하는 게 도리에 맞지. 우물물과 강물은 서로 침범하지 않는 법이잖소.”

막 얘기를 마치고 마린의 말을 기다리던 오소민이 눈을 깜빡였다.

이 무슨 소리? 얼른 손으로 입가를 가리지 않았으면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날 뻔했다.

한심한 심정이 담긴 채로 해원기를 보자,

해원기의 깊은 눈에도 이채가 스치고.

가만히 일대제자들의 반응을 살핀다.

조금 전에 각자 다른 표정을 보였던 넷. 그러나 이번에는 비슷하게 의아함만 떠오른 얼굴들.

비록 오소민이 상당히 외형만 추려서 말했어도, 사안의 심각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도리어 이 겁표 사건이 장풍보의 남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헷갈리는 듯.

해원기의 눈매가 무거워졌다.

이런 상황을 얼마 전에 한 번 겪어보았다.

개봉의 응방원에서 낙양세가의 이가주 엄정원이라는 자를 만났을 때.

풍진삼우와 달리 그는 그저 낙양세가에 관계된 부분에만 신경을 썼었다.

이들도 마찬가지. 어떻게 이렇게 사안을 다루는 시각이 다를 수 있는가.

상락현의 객잔에서 마린의 협행을 듣고 부풀었던 기대가 꺼지는 기분이다.

오소민이 손을 내리며 말없이 생각에 잠긴 마린을 바라보았다.

취개 단삼육뿐 아니라 풍진삼우 모두에게 여러 번 그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출도 했으며, 당시에는 절정검(絶情劍)이란 별호가 붙은 후기지수의 하나로 난세에 일찍부터 정도를 걸었다고.

종횡강호십팔마검이라 불렸던 전대의 검객들 중 가장 사이가 안 좋았던 종남과 화산 출신 고수의 공동제자가 된 기이한 운명. 그 때문에 주화입마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구한 역정. 화산 출신 고수의 희생으로 살아나면서 가공할 능력을 얻었기에 이후 사마와의 싸움에서 큰 힘을 발휘했고.

종남과 화산의 수십 년에 걸친 불화가 마침내 해결되어 화산파의 미래를 짊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당세에 내공과 검의 경지로 첫손가락을 꼽을만한 대단한 고수.

단 십여 년 만에 몰락했던 화산파를 다시 든든한 반석에 올려놓은, 실로 가장 구주정문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했는데.

장로라는 작자들이 설치는 꼬락서니나 일대제자라는 것들의 한심한 모습.

영 어울리지 않는다.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져서일까. 마린이 눈을 똑바로 뜨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복잡한 사건이란 말이 딱 맞는 듯. 조금 더 따져볼 필요가 있겠소이다. 자, 일단 얘기는 이쯤에서 멈추고.”

두루뭉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대화를 마치더니, 곽위에게 바로 시선을 돌린다.

“네 사저는 많이 늦는구나. 아예 낙안봉으로 오라고 하려무나. 여기서 조금 쉰 후에 손님들을 모시고 갈 생각이니.”

곽위가 잠깐 얼떨떨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아, 알겠습니다.”

장문인과 두 장로에게 서둘러 예를 올리고 서둘러 자리를 뜨니, 남은 이들도 조금 아리송한 듯 마린을 쳐다본다.

시각은 자시 끝 무렵. 화산 전체가 깊은 어둠 속에 잠겼을 때 또 낙안봉으로 이동할 이유가 뭔지.

전욱이 머리를 내밀며 갸웃거렸다.

“장문인, 단심원을 갈 생각이요? 야심하니 날이 밝은 후에 보여드리는 게.”

전욱은 화산 제자들이 수련하는 단심원을 맡은 장로라고 했다. 낙안봉에 그 수련장이 있는 모양.

풍엽도장 역시 뒷머리를 긁는다.

“지금은 순찰을 도는 수진원의 제자들 몇밖에 없을 텐데. 이왕이면 오봉의 제자들이 전부 모이는 인시 무렵까지 기다리는 게 낫잖소이까?”

문파의 위세를 보이는 첫 번째가 바로 당당한 제자들이 무공을 익히는 모습을 자랑하는 것.

마린의 의도를 그렇게 이해하고 의견을 낸 건데.

마린이 빙긋 웃었다.

“두 분과 화산오봉 다섯 아이면 충분합니다. 장문인의 추태를 굳이 두루 보일 것까지는 없지요.”

“음?”

전욱과 풍엽도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리에 남은 일대제자 셋도 절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장문인의 추태? 이 자리에선 알아듣지 못할 얘기가 참 많다.

오밤중에 장문인은 뭘 하려는 건가.

마린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곧장 몸을 틀어 해원기를 향한다.

“청이 있습니다.”

“으음?”

불쑥 건네는 말에 해원기의 눈썹이 절로 올라가지만, 마린의 웃는 낯에는 엷은 홍조까지 어렸다.

“십 년, 아니, 십이 년이 지났군요. 태산에서 마지막으로 행했던 논검(論劍)이 마치 어제 같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검을 닦는데 게으르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만, 아울러 선사의 심정도 깊이 이해했달까요. 과연 나는 검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가?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우쳤는가? 가슴속에 떠오르는 무수한 의문을 푸는 게 숙원이 되었답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열기를 띤 시선과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음성.

말과 함께 두 손을 맞잡아 높이 올리고,

“촉박한 여정이라 들었으니 이런 조급함도 이해하시길. 화산의 마린이 감히 회주의 인증(認證)을 청합니다.”

이번엔 오소민까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산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나치게 과한 예를 차리더니, 이렇게 이상한 일을 청할 줄이야.

도전.

열띤 목소리로 토로한 절절한 사정의 본뜻은 바로 도전이다.

화산파의 장문인이요, 당대 무림에서 검의 으뜸이라고 칭해지는 화산검협 마린이 정체도 불분명한 더벅머리 청년에게 도전이라.

그러나 해원기가 마주 예를 차리며 단정하게 받는 말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해원기가 삼가 장문인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서슴없이 도전을 받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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