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55화 (156/410)

제39장 화산검협(華山劍俠) (3)

수백 년간 강호의 일각을 지탱해온 전통의 명문, 중원무림의 전설로 전해지는 오악검의 하나.

화산검파(華山劍派).

이 화산의 주인은 그 산을 닮았다.

머리에는 우뚝하게 솟은 표건(飄巾)을 쓰고, 오래된 바위처럼 단단한 얼굴에 풍상이 새겨놓은 이목구비, 희끗해지기 시작한 수염은 가슴까지 드리웠다. 떡 벌어진 어깨에 길게 늘어진 두 팔은 산봉우리와 폭포 같고, 꼿꼿하게 선 자세는 깎아지른 절벽 같다.

사십 대 끝 무렵의 나이건만,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세월을 담은 듯한 풍모.

신광을 갈무리한 눈은 침착하고, 허리 좌우에 걸린 쌍검에 각기 붉고 푸른 수실을 차분하게 드리운 채.

금쇄관 앞의 공터, 가장 앞에 선 이야말로.

화산파의 당대 장문인, 화산검협 마린이었다.

때는 자정(子正)인데도 예닐곱이나 되는 인원을 대동하고 직접 마중을 나온 마린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에도 한밤중까지 깨어있는 터라 화음현에서 부리나케 전해진 소식을 바로 받을 수 있었지만,

새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손수 접대를 지시하며 서둘렀다.

찾아온 두 사람의 이름.

이름만 들었던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라도 장문인이 직접 금쇄관까지 내려와 마중하는 건 파격(破格).

그러나 또 하나의 이름에 도저히 가만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장로 두 명과 제자들을 불러 모아 득달같이 달려왔기에,

땀범벅으로 헐떡거리는 곽위가 소개하러 나서려는 모습은 눈에도 들지 않았다.

준수한 외모의 귀공자, 허름한 차림새의 더벅머리 청년.

듣던 대로 유룡개는 같은 사내가 봐도 반하게 생겼구나.

그리고.

조용히 그 곁에 선 청년.

시선이 절로 향한다.

구름처럼 가볍게 나타난 유룡개와 달리, 느긋하게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걸음. 이 가파른 금쇄관에 처음부터 서 있었던 착각까지 일으키는 청년.

묶지 않은 더벅머리와 어디 시골 농가에서 빌려 입은 듯한 옷차림엔 아무 관심도 없다.

마린의 시선이 훑는 곳은 그 얼굴.

그중에서도 짙고 굵은 눈썹과 그 밑에 깊게 파인 눈매였다.

그 사람이 맞다.

가늘어졌던 마린의 눈이 점차 커지고,

“장문인께 고합니다. 이쪽 분이 개방에서 오신…….”

소매를 털며 치켜드는 두 팔이 곽위의 말을 끊었으며,

“개방 순행장로가 삼가 화산 장문인께.”

손을 모아 인사하려던 오소민도 눈을 껌뻑이며 멈칫거려야만 했다.

마린은 곽위의 말을 그치려 팔을 든 게 아니요, 오소민과 인사를 나누려 손을 모은 게 아니었다.

아니, 무인이 흔히 취하는 포권조차 아니다.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당겼다가 쭉 내밀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예.

지극한 존경을 표하는 국궁(鞠躬)의 배례.

“화산의 마린이 회주의 광림(光臨)을 기쁘게 맞이합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는 금쇄관뿐 아니라 화산 전체를 울리니.

금쇄관 앞이 순간 얼어붙었다.

마린과 같이 온 이들은 언제나 장문인을 보필할 책무를 진 좌우 장로 둘, 일대제자 셋. 그리고 금쇄관을 지키는 이대제자 둘이 따로 횃불을 들었다.

그들이 아는 평소의 장문인은 언제나 진중하고 근엄한 사람.

검도의 아득한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수백 리 주변을 몸소 돌아다니며 밤낮없이 협의를 행하여 화산파의 중흥을 이룬 거목이다.

엄청난 재산을 지닌 부호든, 높은 벼슬에 오른 고관이든, 대단한 명성과 실력을 지닌 고수든.

누구를 만나도 절대 꺾이지 않는 허리.

실로 화산여립, 불가최절 그 자체인 장문인이.

허리를 꺾었다.

“자, 장문인?”

그나마 더듬거리며 입을 연 건 장로뿐. 제자들은 대경실색, 어쩔 줄을 모르고.

손님을 안내한 곽위는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나,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어?”

“에, 에에.”

바보처럼 입이 벌어져 애먼 소리만 토하는 자들.

당당한 명문거파의 주인이 자파의 인물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이렇게 지극한 예를 갖출 줄이야.

당혹한 그들의 심정이 흔들리는 횃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펄쩍.

가파른 산길도 평지처럼 걸어온 해원기가 엄청난 속도로 뛰었다.

그 역시 마린의 배례에 놀라 잠시 몸이 굳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고, 맞부딪치는 것처럼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팍.

재빨리 마린의 두 팔을 제압하듯 움켜쥐어 풀고, 힘껏 그 상체를 들어 올리는 통에.

그만 딱 붙어서서 엉긴 자세가 되었다.

씨름이라도 하듯이.

“마 대협! 이러시면 안 됩니다.”

“회주,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뵙는군요. 하하하하.”

자연히 마주 팔을 벌리게 되자 마린이 해원기를 끌어안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그리움, 기쁨.

오래된 바위에 거칠게 새겨진 풍상이 눈 녹듯 풀어지고,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 솟은 거목이 아늑하게 품어준다.

커다란 웃음과 끌어안는 팔에서 전해지는 진하고 뜨거운 감정.

해원기도 어쩐지 울컥하는 느낌에 마린을 얼싸안았다.

사부의 명을 받아 연검지회에 참석했던 어린 소년은 더벅머리 청년이 되었고, 진지하게 검도를 묻던 청년은 이제 중년을 넘긴 일파의 장문인이 되었다.

지난 세월이 껴안은 두 사람 사이에 물처럼 흘러내린다.

한바탕 웃음으로 정리가 되었는지.

마린이 해원기를 놓아주면서 비로소 오소민에게 머리를 돌렸다.

“이거 실례, 실례했네. 초면에 못 볼 꼴을 보였구먼.”

오소민이 얼른 고개를 젓고는. 미소가 맺힌 환한 얼굴로 다시 포권을 취했다.

“아닙니다. 사형에게 이미 장문인의 호탕함을 익히 들어왔지요. 오소민입니다.”

마린도 제대로 두 손을 모아 쥐고.

“마린일세. 우리끼리 배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으니 그냥 편하게 대해도 되겠지?”

활달한 음성에 오소민이 미소를 히죽 웃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럼요. 요 친구도 있잖습니까.”

포권을 풀어 어정쩡하게 선 해원기를 가리키자,

마린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끝까지 배분을 따지면 내가 제일 불리하니까. 하하.”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놀랐던 심정을 가라앉히고 쳐다보는 이들. 좌우 장로는 인상을 찡그리고, 제자들은 오소민과 해원기를 번갈아 살피느라 바쁘다.

“다들 희한한 꿈이라도 꾼 얼굴이로구나. 자, 야밤에 귀한 손님들을 바깥에 세워두어서야 화산의 면목이 서겠느냐. 일단 안으로 모셔야지.”

중후한 목소리와 늠름한 자세.

마린이 평소의 장문인으로 돌아가자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와 분분히 예를 표하며 금쇄관 양쪽으로 벌려 서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일단 조원궁(朝元宮)으로 갑시다.”

앞장서서 금쇄관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마린.

행선지는 인상을 찡그린 좌우 장로에게 건넨 말이었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얼핏 시선을 교환한 후에 바로 마린의 뒤를 따랐다.

과하다 싶은 인사와 거침없이 드러낸 감정.

그만큼 반가움이 앞섰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다.

금쇄관을 지나자 평탄한 길이 나오고 그 끝에 오도카니 자리한 작은 도관(道觀). 조원궁이란 거창한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게 단출한 세 칸짜리 건물이다.

모시는 신상이나 그림 한 장 붙지 않은 허름한 중청(中廳)에 불을 밝히고,

낡은 팔선탁 주위로 주객을 나누어 앉았다.

과일과 간단한 주전부리 몇 접시, 뜨거운 차와 커다란 술 항아리가 전부지만.

자정이 넘은 시각이니 훌륭한 대접.

자리가 갖추어지자 마린이 자신의 양옆을 번갈아 보았다.

해원기의 옆에는 키 크고 마른 몸매에 화의(華衣)를 걸친 노인, 오소민의 옆에는 머리에 동곳을 꽂고 청포 장삼을 걸친 노인. 둘 다 육십 정도 되어 보인다.

“이쪽은 화산 제자들을 가르치는 단심원(丹心院)의 전(展) 원주, 이쪽은 화산의 기율을 맡는 수진원(修眞院)의 풍엽(楓葉) 도장. 화산을 받치는 두 기둥이신 좌우 장로이시네.”

키 크고 마른 몸매의 화의노인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욱(展昱)이외다.”

짤막하게 인사하자, 풍엽이라는 도사도 그저 눈길만 보낼 뿐.

두 장로 모두 장문인처럼 반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러든 말든 마린은 잇따라 젊은이 셋을 하나씩 일으켜 세운다.

“위아와는 이미 만났고, 도사 차림을 한 아이가 내가 처음 제자로 들인 조양자(朝陽子), 시큰둥한 표정이 운대검이란 별호를 쓰는 희지원(希志遠), 여자애는 막내인 임심미(林心湄)라고 하지. 정중히 인사 올리거라.”

조양자는 서른 줄의 의젓한 도사, 희지원은 꽤 큰 체구에 우울한 인상의 청년, 임심미는 방년의 귀여운 소녀.

셋이 불린 대로 인사를 마치자마자,

“장문인, 제대로 소개를 해야지요. 개방에서도 신비하다고 불리는 순행장로를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난데없이. 어흠.”

전욱이 딱딱하게 말을 던지다가 크게 헛기침을 하고.

풍엽도인도 바로 말을 이어받는다.

“당당한 대화산의 장문인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취한 게 아닐까? 다들 그렇게 의아한 심정이외다.”

말이야 완곡하지만.

마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

개방의 순행장로라 해봤자 갓 이십 대 중반의 기생오라비 같은 애송이다. 기껏해야 운대검 희지원이나 낙안검 곽위와 비슷한 나이.

한밤중에 남의 문파를 방문하는 무식한 거지를 장문인이 직접 나와 마중하는 것부터 어불성설인데.

그 옆의 허름한 녀석은 또 뭐냐. 해원기라는 이름 석 자만 달랑 알려주더니, 그 앞에서 허리 숙여 절까지 하는 꼬락서니.

기가 찰 노릇.

불쾌하다 못해 희롱당한 듯한 분까지 일어날 판이다.

오밤중에 대체 무슨 귀신놀음을 하자는 건가.

일대제자들도 뭐가 뭔지 몰라 시키는 대로 인사는 하지만, 어리둥절하잖나.

그래도 손님 앞이라 한껏 장문인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중이다.

마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흠. 확실히 제 불찰이로군요. 제가 참으로 오래 기다렸던 분이라. 두 분 장로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대로 소개를 해야지요.”

오소민을 향해 한 손을 펼치고,

“위아나 지원이 정도의 나이겠습니다만, 오 장로가 개방의 신비라 불리는 건 개방의 뿌리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후대이기 때문입니다. 선사(先師)를 비롯해 돌아가신 풍림당주(楓林堂主)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면 참으로 반가워하셨겠지요.”

움찔.

전욱과 풍엽도인의 안색이 변했다.

마린의 죽은 스승은 둘째 치고, 풍림당주라는 이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오 장로가.”

“팔선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을 맺기도 전에.

마린은 바로 또 한 손을 해원기 쪽으로 펼쳤다.

“두 분 장로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수검대관(守劍大關)의 포무백협(布武百俠)이라고. 여기 계신 해, 음, 해 대협은 그분의 직계가 되십니다.”

말을 마치고 오소민과 해원기를 차례로 보는 얼굴에,

미안하고 안타까운 기색이 가득한데.

화산의 일대제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수검대관, 포무백협.

검을 지키는 커다란 관문에서 백 명의 협사에게 무도를 베푼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의 무공 수련을 혹독히 시키고, 추호라도 허튼짓을 하면 무서운 벌을 내리는 두 장로가 벌떡 일어섰으니.

콰당.

의자가 넘어지는 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서, 설마 검주(劍主)의…….”

전욱의 입이 저렇게 벌벌 떨리는 걸 처음 보았고, 그보다 언제나 불호령을 내리던 풍엽도인의 목이 잠긴 소리를 내는 게 더 희한했다.

“그, 그렇다면. 풍화절세, 응양구천이라는.”

해원기가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해원기가 화산의 고인 두 분께 인사드립니다.”

고인(高人). 누구에게나 그렇게 불리는 데 익숙해진 두 장로가 오늘따라 몸서리치듯 전신을 떨었다.

‘그분’의 직계에게 직접 인사를 받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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