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장 화산검협(華山劍俠) (2)
해원기를 마주 보며 히죽 웃어 보인 오소민.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묻는 그쪽은 누구시오?”
밤중에 등롱 불빛이 강하지도 않건만, 일부러 손을 눈 위에 올려 살피는 시늉.
마상의 젊은이가 다시 한번 오소민과 해원기를 번갈아 쳐다보고 가슴을 활짝 편다.
“나는 화산검문(華山劍門)의 이대제자(二代弟子)인 곽위(郭威)라 하오. 두 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누구요?”
곽위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
서슴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두 분’이라고 경칭을 쓰긴 했으나.
계속 말에 올라타 내려다본 채요, 상대의 여정을 묻는 말투도 은근히 고압적이다.
오소민이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이대제자면 장문인 바로 아래의 준재시군. 듣자 하니 화산의 미래를 짊어진 젊은 검객 다섯을 화산오봉(華山五峰)이라 부른다던데 그쪽이 혹시?”
눈이 부셔서 옆으로 본다는 자세여서.
곽위가 당연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일단 말은 받는다.
“내가 바로 그중의 남봉(南峰)이요. 귀하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소이다.”
딱딱해진 말투.
오소민이 얼른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저었다.
“아아, 이거 실례했구려. 오밤중에 들판에서 마주친 상황이라 잔뜩 겁을 먹었었거든. 생각해보시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객잔에서 저녁 한 끼 때우며 주변 사정이나 좀 알아보려 했건만. 그걸 어떻게 알고서 귀신같이 길을 막고 나서는 사람들이, 전부 검을 지닌 이라니. 가진 것 없이 떠도는 가난뱅이로서는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뭔 심산인지.
오소민이 넉살 좋게 말을 늘어놓자 곽위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의심스러운 자들. 감히 화산의 그늘에 들어와 이렇게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역시 불측한 뜻을 지녔을 터.
휘릭.
백의 경장을 휘날리며 가볍게 말에서 내려섰다.
땅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경쾌한 동작, 오소민을 쏘아보며 매섭게 호통을 치려는데.
“쯧, 말이 길었구먼. 나는 개방에서 왔소.”
오소민이 내젓던 손을 거두며 선뜻 건네는 말에 그만 엉거주춤해졌다.
곽위뿐 아니라 함께 나타난 네 명의 장한 역시 움찔하는 모습.
개방이라고?
곽위와 함께 네 쌍의 눈이 오소민와 해원기를 바쁘게 오간다. 강호에서 다른 방파를 사칭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또 그럴 이유도 없는 상황이지만.
영 믿음이 가질 않아서다.
앞에 나선 이는 눈이 번쩍 뜨일 미남자에 백삼 장포를 멋들어지게 걸친 귀공자요, 뒤에 있는 이는 비록 허름한 행색이긴 해도 전혀 거지로 보이진 않는다.
얼핏 거짓말로 둘러댄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고 많은 명문정파를 놔두고 개방이라.
거지를 자처할 사람이 어디 있나.
“어, 귀하가 정말…….”
곽위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다가 또 금방 닫혀버렸다.
“개방의 순행장로를 맡은 유룡개라고 하오. 과연 화산은 대단하군.”
오소민이 손을 모으며 씩 웃는 통에.
화산파의 이대제자. 화산의 미래를 짊어진 다섯 준재.
그 이름에 걸맞게 곽위가 급히 다가와 포권의 예를 취했다.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화산의 곽위가 개방의 오 장로를 뵙습니다.”
나무는 그늘이요, 사람은 이름이라던가.
아직 얼떨떨한 장한들과는 달리 곽위가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오소민이 웃는 낯을 살짝 찡그렸다.
“거지에게 무슨. 한데 곽 형은 내 이름을 아나 보오?”
오소민은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 유룡개란 외호를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건만.
곽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전에 귀 방의 취개 단 대협이 화산에 오셨을 때 모신 적이 있었기에. 곽형이란 호칭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취개 단삼육에게서 들었다는 뜻. 아울러 깍듯하게 말투를 올려붙이는 모습에서.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기품도 엿보인다.
강호에서 배분(輩分)은 중요하고, 그걸 특히 심하게 따지는 게 구주정문의 전통.
화산과 개방이 다르지만, 화산의 이대제자는 장문인의 제자뻘이요, 개방의 장로는 방주와 동배(同輩)가 된다. 화산의 이대제자가 개방의 장로에게 ‘형’으로 불릴 수는 없는 노릇. 설사 나이가 비슷하더라도.
그제야 오소민이 모았던 손을 풀었다.
“이거 참. 그럼 곽 소협이라 합시다. 당당한 화산오봉의 남봉을 만나서 기쁘오.”
장난기가 많은 오소민도 이쯤에선 의젓한 소리를 해야 한다.
처음엔 곽위의 고압적인 태도에 놀려줄 생각이었지만, 신분을 밝힌 후에야 개방의 체면까지 모른척할 수 있나.
장로답게 인사를 마치려는데. 곽위는 여전히 포권을 취한 채 시선을 돌렸다.
“그럼 오 장로와 같이 오신 분은.”
조용히 오소민 곁에 이른 해원기. 이 귀공자 차림의 순행장로보다는 개방에 더 어울릴 듯한 용모이니 같이 온 장로급이 아닐까.
화산의 이대제자는 예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지가 높이 올린 포권에서 엿보이고.
해원기가 마주 손을 맞잡았다.
“해원기라고 합니다.”
“아, 내 친구요. 마침 섬서를 지나가는 길이라 귀 파의 장문인께 인사나 드리려고요. 화산검협을 뵙겠다고 어찌나 성화던지 이렇게 밤길을 도와. 어흠.”
오소민이 재빨리 해원기를 흘기곤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언제 어디서나 이름만 날름 밝히고 마는 저 버릇. 결국 설명은 남이 떠맡게 되니 오소민이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화산검협 마린을 만나자고 성화를 부린 건 오소민 자신이었지만.
곽위가 눈에 잠깐 힘을 주었으나 아무 표정 없이 예를 취하는 해원기에게 그저 손을 같이 흔들어줄 수밖에.
예를 마친 곽위가 옆으로 물러섰다.
“그럼 미리 연통해주셨으면 좋았겠습니다. 장문인께서는 며칠 전에 출타하셔서, 흠, 돌아오셨을 수도 있겠군요. 우선 제자들을 보내 연락을 취하고 두 분은 제가 모시도록 하지요.”
날카로운 인상만큼 행동도 기민한 듯.
오소민에게 말을 건네자마자 장한 넷에게 뛰어가 뭔가 지시를 내리곤 빠르게 돌아온다.
“일단 화음으로 모시겠습니다.”
오소민이 해원기를 힐끗 보곤 미소를 지었다.
“괜한 예의는 거북하구려. 그냥 화산으로 달려갔으면 좋겠소만, 또 지주(地主)의 뜻을 거스르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곽 소협을 따르겠소.”
개방이 어떻게 미리 연통을 넣는다는 건지, 마린은 무슨 일로 출타했는지.
서로 밝히기 어려운 내용도 있을 것이요, 이렇게 한밤중 길바닥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도 옳지 않다.
개방의 순행장로로서 곽위의 청을 거부하기도 그렇고.
평소 같지 않은 예의를 갖추면서 오소민과 해원기가 화산파 제자들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타지 않은 말 한 필이 고삐를 잡힌 대로 한가롭게 뒤를 따른다.
“우리가 오는 걸 어찌 알았소?”
“화산 주위의 고을에는 본 파를 지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을이나 촌락끼리 연락하는 방법도 다양해서 새를 날리거나 말을 달리는 경우는 아주 빠르게 소식을 알 수 있지요. 상락은 꽤 큰 고을, 곧장 화음현까지 연락이 닿았고 제가 화음에 내려와 있었기에 바로 말을 빌려 상락으로 향한 겁니다. 화음현을 벗어나자마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쯧, 우리가 많이 서둘렀으니. 그나저나 참 대단하오. 화산파가 이렇게 주위의 민심을 얻었을 줄은 미처 몰랐거든. 구주정문에서 과거의 성세를 제일 먼저 되찾은 곳은 화산 일게요.”
“과한 칭찬이십니다. 본 파는 오직 참된 무도를 닦고 민생의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일념일 뿐입니다. 본 파의 어른들께서도 항상 그 점을 강조하시고요.”
“아, 그러고 보니 화산오봉은 원래 화산의 다섯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이라던데.”
“네, 맞습니다. 본 파에서 저희 다섯에게 봉우리 이름을 따서 명호를 지어주신 덕에. 동서남북중의 조양(朝陽), 부용(芙蓉), 낙안(落雁), 운대(雲臺), 옥녀(玉女)가 명호가 됩니다.”
“그럼 곽 소협은 낙안검(落雁劍)?”
“그렇지요.”
“멋진 명호구려. 에, 그런데 부용이나 옥녀는 남자에게 붙이기 좀.”
“부용검은 제 사저(師姐)이고, 옥녀검도 여자이니 문제가 없습니다.”
끄덕끄덕.
연방 고개를 끄덕인 오소민이 차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시각은 이미 해시를 넘겨서 현성에는 오가는 이도 없었고, 곽위가 아는 이 작은 소야점(宵夜店)만이 문을 열었을 뿐.
소야점은 야식거리를 파는 조그만 가게다. 날이 이미 더워지기 시작할 때라 야식거리를 찾는 이도 있을 법한데 화음현은 상당히 조용한 편이었고.
삼대제자(三代弟子)라는 장한 넷은 각기 곽위의 지시를 받아 자리를 뜬 지 꽤 되었다.
빌렸던 말을 돌려주고, 본산에 연락을 취하고, 본래 맡았던 번을 서야 하고.
아직 무공 수준이 높지는 않아 보여도, 곽위의 지시에 따르는 움직임이 제법이다. 나름 체계가 잡힌 모습.
다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곽위에게서 특이한 점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장문인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당대에 손꼽히는 검객, 화산검협 마린.
화산파가 이렇게 구주정문으로서의 성세를 회복한 것은 거의 그의 힘이라고 일컬어지거늘.
‘본 파’를 강조하고 예의를 잃지 않지만, ‘장문인’을 내세우지 않는다.
더구나 마지막에 화산오봉에 속한 여자 둘을 소개하면서도 한 명은 사저라면서 또 한 명은 대충 넘어갔으니.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해원기 역시 묘하게 여겼는지.
인사를 나눈 이후 처음으로 입을 뗀다.
“화산오봉 다섯 분은 모두 장문인의 제자입니까?”
곽위가 미간을 조금 오므렸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조양과 옥녀만이 장문인의 제자지요.”
간단하게 대답하곤 시선을 돌려버리니.
뭔가 설명이 많이 부족하다.
오소민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눈을 가늘게 떴다.
조양과 옥녀만이 장문인의 제자면, 이 곽위와 곽위가 사저라고 소개한 부용은 누구를 스승으로 모셨는가. 게다가 운대는 아예 이름도 들먹이지 않는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역력하고,
해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오소민의 체면을 봐 대답해준 듯.
상당히 냉랭한 태도지만, 해원기는 역시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바부탱이.
자주 그렇게 놀려대는 오소민이지만, 이번에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맺혔다.
해원기가 괜히 물어본 게 아니란 걸 알기에.
타고난 성격은 순하고 차분하다. 어렸을 때는 곤궁하게 살았고, 일족을 위해 팔려나간 처지라 그늘이 지긴 했으나.
사부를 모신 후에는 쾌활하고 명랑해져서 말도 많아졌다.
사부는 참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해원기에게는 언제나 대화를 아끼지 않았기에.
해원기도 자연히 말을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가까운 이, 좋은 벗과는 서슴없이 유치한 농담을 나눌 수 있고.
때와 장소가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입에 자물통을 채울 수 있다.
그런데 곽위에게선 때도 장소도 맞지 않는 느낌.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어울리는 언행이지만, 찾아온 손님을 대함에 어쩐지 거리를 두는 것 같다.
낯선 손님이니까 그렇다고, 아직 젊은 일대제자라 어색해한다고, 오밤중의 접대가 서툴다고 이해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해원기가 말을 아끼는 이유다.
한밤중에 산을 오르면 그저 목적지를 향해 오르막을 거듭할 뿐.
험준한 봉우리에서도 자신의 발밑만 살피게 되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담을 수 없다.
더구나 오악 중의 서악 화산은 그야말로 깎아지른 절벽과 다름없으니.
화산여립(華山如立), 불가최절(不可摧折).
화산은 우뚝 선 것 같아서 꺾을 수 없는 꼿꼿함이라고 고인이 읊은 게 거짓이 아니다.
아무리 화산을 본거지로 삼은 화산파 제자들이라도 오르내리는 데에 어지간히 시간이 걸리거늘.
중봉 부근 오운봉(五雲峰)의 금쇄관(金鎖關)까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도착한 곽위가 헐떡거리는 숨을 억지로 참으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커다란 횃불을 십여 개나 꽂은 금쇄관의 가파른 계단 아래 사람 그림자가 어지럽지만, 곽위는 바로 앞에 선 두 사람의 등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리는 판.
날카로운 눈매가 놀라서 크게 뜨였고, 딱 벌어진 입에선 선뜻 말이 나오질 않는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
화산파가 밤에 연락을 취하는 방법은 횃불. 일종의 봉화를 사용해 산 아래에 뜻을 전하는 모양이고, 곽위의 설명을 들은 손님들은 바로 그 횃불을 향해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마침 장문인이 돌아왔고, 직접 금쇄관으로 내려와 영접한다는 소식에.
전부 무공을 익힌 이들. 당연히 경공을 펼쳐 날 듯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개방 신비의 순행장로가 어떤 수준인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화산오봉의 남봉, 낙안검 곽위라는 자부심과 젊은이의 호승심이 자연히 평소보다 속도를 올리게 했었다.
그러나 채 일 각이 되지 않아 곽위는 향도가 아니라 뒤쫓는 처지로 바뀌었으니.
오소민은 마치 구름이라도 탄 것처럼 거침없이 험한 절벽을 날아올랐다.
참으로 절묘한 경공에 열심히 뒤를 따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다가,
해원기를 보곤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냥 걷, 는, 다.
평지를 걷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런데 구름을 탄 오소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숨소리 하나 내질 않는다.
이걸 경공이라고 해야 하나?
기가 막혀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뒤쫓아 온 곽위는,
금쇄관 앞에서 자신이 놀라 자빠질 줄은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