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53화 (154/410)

제39장 화산검협(華山劍俠) (1)

해원기가 저물어가는 서쪽 하늘을 보았다.

“하루쯤 머물러도 큰 차질은 없을 텐데.”

진평현에서 상락까지 꽤 빠르게 이동한 편이요, 오랜만에 객잔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으니 방에서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건만.

오소민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뜸 화산에 오르자고 팔을 잡아끌었다.

객잔에 방이 작은 것 하나만 남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돌연 주인장이 해준 얘기에 버썩 흥미가 일었다나.

도차수 장팔을 다시 불러다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고는,

밤길을 도와서라도 가보자고 성화.

“에잇, 아까 얘기했잖아. 일단 북쪽 화산으로 가면 사천까지는 다시 이 상락으로 돌아오거나 장안을 거쳐야 한다고. 우리가 유람 나온 것도 아니고. 만날 사람은 빨리빨리 만나는 게 좋지. 더구나.”

오소민이 해원기를 보며 히죽 웃었다.

“마 장문인이 자네를 만나는 장면이 정말 기대되거든. 당대에 검법으로는 누구나 첫손꼽는 화산검협이 검왕과 마주한다라. 흐흥.”

뭘 생각하는지 짓궂은 표정.

해원기가 이 속 모를 친구의 말에 어깨를 으쓱 올렸다.

오소민이 자주 바부탱이라고 놀려대지만, 지금 오소민의 말이 일종의 핑계라는 걸 알아챌 눈치 정도는 있다.

여정이 더 길어진다면 더 서둘러 움직이면 될 일이요, 해원기와 화산검협 마린이 딱히 낯설고 어색할 사이인 것도 아니다.

십이 년 전, 태산에서 사부의 명을 받들어 연검지회(練劍之會)에 참석했을 때 만났었고.

그때도 누구보다 더 진지하고 정중했었던 사람.

오소민이 짓궂게 상상하는 검왕이니 당대의 검협이니 하는 소리는 별 의미도 없을 터.

“뭘 기대하기에 그렇게 웃나? 만나면 반갑고, 또 훌륭한 장문인을 뵙는 것 외에 또 무슨. 오히려 때 아닌 시간에 불쑥 찾아가 폐를 끼치는 게 영 내키지 않아.”

밤을 도와 화산까지 내달리면 새벽녘에는 닿을 거리.

비록 과거의 인연이 있다고 해도 미리 통보도 하지 않고서.

당당한 화산파 장문인에게 실례다.

그러나 오소민은 웃는 낯 그대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글쎄. 불쑥 일지 아닐지는 좀 두고 보자고. 섬서는 처음 와보지만, 화산파가 주변 고을을 상당히 돌봐서 든든하게 기반을 닦았다는 소문은 일찍부터 들었지. 아까 객잔 주인이나 도차수 양반도 전혀 거리낌 없이 말하잖던가.”

해원기의 어정쩡하던 표정이 바뀌었다.

도차수 장팔이 과거에 강호인이었던 걸 알아봤다고 넌지시 드러내자마자 객잔 주인이 ‘무림고수’라 했었다.

무림인을 대하면서 서슴없이 털어놓은 미담. 나중에 오소민에게 다시 불려온 장팔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었다.

해원기와 오소민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믿음직한 배경이 있다는 자신감. 그게 오소민이 말한 ‘든든히 기반을 닦은’ 화산파이리라.

산을 골라 문파를 열었다고 먹고살 길이 열리지는 않는다.

소림이나 무당처럼 부처와 신을 받드는 출가인이라면 신도들의 시주에 기대겠으나, 별다른 산업이 없고서야 어찌 문파를 유지하겠나.

신체를 단련하고 내공을 닦으며 병기를 휘두르는 무공 역시 사람이 선택하는 하나의 길. 그 길을 흔들리지 않고 걸으려면 곧은 심지가 있어야만 한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는 법.

제자를 받아 문파의 규모가 커지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중간에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경우도 적지 않아 마침내는 흑도(黑道)에 빠지게 된다.

얽히고설킨 세상만사, 분란과 갈등이 상존하는 강호.

무(武)가 도(道)를 잃고 힘(力)에 휘둘려선 안 된다.

명문정파란 바로 그런 힘에 휘둘린 자들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무도의 구현이니.

해원기가 비로소 오소민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도차수 장팔에게 갱생의 기회까지 만들어준 화산파의 당대 장문인은 어떻게 주변 고을을 지키는 걸까.

역시 이 준수하고 영민한 친구에겐 당할 재간이 없구나.

오소민이 해원기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어럽쇼. 새삼스럽게 쳐다보기는. 내가 누군지 잊었나? 개방이잖아, 개방. 강호에서 유일하게 구걸로 버티는 방파. 쯧.”

막상 말해놓고 나니 신비의 순행장로도 좀 민망했는지 가볍게 혀를 차고.

“십오 년이 넘도록 무림의 안정을 위해 구주정문이 가장 고생했던 게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나. 사천당가처럼 대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세가(世家)와는 또 다른 상황이지. 멸문당한 문파를 중건하는 건 새로 문파를 창설하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들 테니까.”

맞는 말.

구주정문의 태반이 터전을 잃은 시간은 무려 백 년이다.

산을 잃었던 문파가 다시 산을 찾는다고 누가 ‘어서 옵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할까.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게 훨씬 낫다.

오소민이 북쪽을 보며 짧은 한숨까지 더했다.

“후, 더구나 이 서쪽은 더 골치 아팠을 거야. 해형, 자네도 알잖아, 당전각궁(堂殿閣宮)의 사대검계(四大劍界) 시절을.”

해원기가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고개를 북쪽으로 돌렸다.

낙조(落照)가 사그라지는 시각.

상락보다 점차 높아지는 북쪽 지대는 도리어 선명하게 그 윤곽을 보인다.

난세에 무너진 문파의 명맥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서로 힘을 합했었던 구주정문의 네 개 문파.

이제는 다 잊힌 이름이지만 중원의 서쪽에 위치한 사영산(四靈山)을 터전으로 삼았던 문파들이 한데 모였던 시절이 있었다.

화산, 종남, 아미, 청성.

산을 이름으로 쓰지 못하여 화산은 풍림당(楓林堂), 종남은 은한전(銀漢殿), 아미는 천불각(千佛閣), 청성은 천연궁(天然宮)이라 하며 뭉뚱그려 지냈던 사대검계.

“장문인이 생겼다고 전부 반겨준다? 흥, 세상인심이 그리 좋던가. 에, 그래서 마 대협이 더 대단한 거지만.”

문파도 집안과 마찬가지다. 집안이 풍비박산 날 때는 누구든 살아남아 명맥을 잇는 게 중요하지만, 다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고 나면 누가 진짜 주인인지 따지기 마련.

채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주변 고을의 지지를 얻는 건 손꼽히는 검법의 대가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을 터.

해원기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자네는 신비의 순행장로구먼. 이대로 화음현까지 가면서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해주게.”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졌고,

많은 걸 배우고 싶어졌다.

화산검협 마린에게.

의욕이 생긴 덕에 두 시진도 되지 않아 화음현 경내로 들어섰고.

“그러면 제자들을 상당히 엄격하게 고르는 듯한데. 마 대협 혼자서 꾸려나가기엔 일이 지나치게 많아질…….”

“아이고, 좀 쉬었다 가세.”

오소민이 질색하며 몸을 홱 틀어 내려섰다.

꽤 지친 표정으로 그럴듯한 바위 하나를 찾아 털썩 주저앉는다.

“야, 이 친구야. 그렇게 쉬지 않고 얘기하는 게 얼마나 힘든. 쳇, 자네 정말 진평현에서 퍼져있었던 사람 맞아?”

공중을 휘돌아 따라 내려오는 해원기를 쏘아보는 볼이 잔뜩 부었다.

오는 내내 묻고 답하고. 뭐가 그리 궁금한지.

경공을 펼치면서 계속 말을 하느라 공력 소모가 막심했다.

경공과 함께 말하는 건 내공이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한 일. 물론 오소민은 이미 경지에 이른 고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상락까지 오는 동안에는 혼절했던 해원기를 나름 신경 써 주었는데.

이 바부탱이는 어째 갈수록 힘이 더 나는가.

멀쩡한 얼굴로 내려선 해원기가 얄밉기까지 하다.

“이런. 미안하네. 그만 얘기에 팔려서.”

머쓱하게 더벅머리를 긁는 해원기를 한 번 더 노려봐주고.

오소민이 허리에 찬 물주머니를 끌렀다.

꿀꺽꿀꺽.

정신없이 물을 마시는 오소민의 하얀 목이 불퉁한 심사를 고스란히 보여주어서.

해원기가 슬그머니 옆에 앉아 턱을 긁었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다른 건 다 잊는 버릇. 기껏 자신을 생각해 따라와 준 친구인데 너무 무심했었다.

“진평현의 수차제에서는 내가 너무 허술했었어. 그 반성이랄까, 바탕을 다지고 힘을 아끼는 방법을 이것저것 써보는 중이라. 쩝.”

미안한 심정이 엉뚱한 핑계를 찾게 한다.

“후, 시원하다. 뭐? 바탕을 다지고 힘을 아끼는 방법?”

오소민이 비로소 말을 받아주긴 하는데.

여전히 도끼눈에 물주머니를 건네줄 마음 따위는 없는 듯.

해원기가 턱을 긁던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음. 내기(內氣)와 외기(外氣)를 조화시키는 비결 말일세. 미앙(未央)의 보식(步息)이 조식을 대신하고, 팔풍(八風)의 흐름을 풍운결(風雲訣)이나 부동결(不動訣)에 실으면 공간을 간격의 연속으로 대하니까.”

“어이어이.”

퍽.

물주머니가 당장 머리로 날아든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오소민.

“뭐 좀 알만한 소릴 해. 내 사부 중 철괴리(鐵拐李)의 사실보허(瀉實補虛)랑 비슷한 소리긴 한데. 그렇게 마구 주워 삼킨다고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잠깐!”

목소리가 확 올라붙더니,

“나한테는 오만소리를 다 지껄이게 해놓고 자네는 무공 연습했다는 건가?”

도끼눈이 진짜 도끼로 화해 해원기를 찍어댈 것 같다.

해원기가 얼른 머리를 옆으로 틀면서 두 손을 들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 망할 친구. 에잇.”

들을수록 성이 나서,

오소민이 그대로 물주머니를 돌려 해원기의 얄미운 입을 때리려는데.

탁.

해원기가 고개를 돌리는 통에 귓가에 맞은 물주머니.

손에 힘이 들지 않은 장난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맞을 리 없다.

오소민도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해원기가 시선을 보내는 곳, 수십 장 떨어진 언덕 위로 몇 개의 불빛이 깜빡인다.

술시를 넘어 해시에 접어드는 늦은 시각이다.

밤길을 걸으려면 그만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

급하게 소식을 전달하거나, 때맞춰 물건을 건네주거나, 찾던 이의 소재를 알거나.

아니면 남의 눈을 피해서 묘한 짓을 하려는 경우.

해원기와 오소민이 바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갈래로 나뉘는 들길에서 불빛들이 방향을 바꾸지 않고 똑바로 다가온다.

오소민이 물주머니를 허리에 매달며 가볍게 혀를 찼다.

“칫, 별반 왕래하는 이도 없는 곳에 도적이 기다렸다는 듯 나올까?”

해원기도 쓴웃음을 지었다.

“마 대협 덕에 상락이 평안해졌는데, 화산 바로 밑의 화음현에 도적이 있을 리 없지.”

우연히 만난 불빛이 아니다.

다각다각.

가까워지면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다가오는 자들의 형상도 드러난다.

말 한 필. 그 위에 높이 앉은 이는 간편한 백의 경장을 걸친 젊은이. 이십 대 중반쯤 되었고, 날카로운 인상에 한쪽 어깨 위로 검병이 삐죽 솟았다.

이 젊은이를 호위하듯 앞뒤에서 걷는 네 명의 장한 역시 평범한 차림새지만 허리마다 매달린 장검.

네 명의 장한이 든 등롱만이 붉은 꽃잎이 잔뜩 그려진 화려한 모양이라 특이했다.

그들 또한 해원기와 오소민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말 위에 앉은 젊은이가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거기 오는 두 분. 상락에서 화산의 일을 캐묻던 무림인이 맞소?”

생긴 것처럼 날카로운 목소리.

해원기가 오소민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냥 밤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게 아니다. 게다가 정확히 해원기와 오소민을 찾아온 자들이니.

오소민이 밤길을 재촉하던 기대 중의 하나는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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