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왕춘추-152화 (153/410)

제38장 조인자조(助人自助) (4)

식탁마다 놓인 찻주전자가 지나치게 작아서 해원기와 오소민이 한 잔씩 따르자 거의 비어버렸다.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찻주전자는 수집의 취미에나 적당할 듯.

온갖 손님들이 먹고 마시는 객잔의 식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밋밋한 색에 다 식은 찻물.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손이 가지 않았을 터.

따로 차를 시키도록 하는 상술인가 싶어 오소민이 요리를 가져온 점소이에게 인상을 쓰려는데.

“저거로군.”

해원기의 말에 절로 시선이 돌아가고, 기민한 점소이는 그새 다른 찻잔을 대령하면서,

“이건 제가 치웁지요.”

조그만 찻주전자와 식은 찻잔을 가져가든 말든. 오소민은 처음 보는 희한한 물건에 정신이 팔렸다.

이 객잔은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점소이가 셋이나 있었다. 그중 가장 키가 작은 점소이가 커다란 통 하나를 손에 들었고, 이 커다란 통에는 이 척 가까운 길이의 좁다란 주둥이가 달렸다.

화원에서 쓰는 물뿌리개인가 싶지만, 이렇게 긴 주둥이에 이렇게 끝이 좁은 모양은 처음.

그게 또 전부 구리로 만들었으니 무게는 또 얼마나 나갈지.

“섬서의 명물인 장취차호(長嘴茶壺)라고 들었네. 보는 건 나도 처음이고.”

해원기의 설명도 그저 귓가를 스칠 뿐이다.

신기한 물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키 작은 점소이가 어깨와 팔을 교묘하게 뒤틀어 이 커다란 통을 공중에서 한 번 돌리는 게 마치 관운장이 청룡도 휘두르듯.

그리고선 오소민의 머리 위까지 주둥이를 내밀고선 거기서 찻물이 주욱 뻗어 내린다.

“허어!”

찻물이 공중에서 정확하게 찻잔으로 떨어지자,

오소민이 마침내 탄성을 내질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찻물, 통의 크기가 대여섯 되(升)는 돼 보이고 전부 구리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뜨거울까. 키 작은 점소이만이 한쪽 어깨와 가슴에 두꺼운 천과 가죽을 덧댄 게 이해가 간다.

이렇게 무겁고 뜨거운 차 단지를 한쪽 손으로만 움직여 사람 머리 위에서 따르고, 찻물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다.

오소민이 자신에 이어서 해원기의 찻잔을 채우는 또 한 번의 묘기를 감상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건 기예구먼, 기예야.”

신기하고 재미있다.

“장안을 중심으로 인근에서만 볼 수 있다던데, 여기 상락에도 있구먼. 아까 들어올 때 저 친구의 옷차림을 보고 기대했었지. 듣기에는 상당히 고된 수련을 쌓아야 하고, 그 수련 정도에 따라서 장취차호의 길이나 무게가 천차만별이라. 진짜 고수는 오 척 길이의 주둥이로 오 척 높이에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따른다더군.”

“호오, 그 정도면 차를 따르는 게 아니라 무공, 무공 중에서도 절학이라고 해야겠는걸.”

“동감일세. 저 크기에 구리로 만들었으면 족히 한 말 중량, 이 척 길이에 이 척 높이도 예사 솜씨가 아니야.”

무인의 눈에는 자연히 이 묘기의 바탕이 드러나는 법.

무거운 물건을 드는 근력(筋力)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차를 따르기 위해서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할 터.

살이 데일 뜨거운 구리 주전자, 한 말이나 되는 무게를 한 손으로 버텨 흘리지 않고 차를 따르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할까.

오소민이 해원기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런 재주를 익혔으면 돈을 더 받겠구먼.”

당장 수입부터 따지는 소리에 해원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이. 차 따르는 이, 도차수(倒茶手)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오직 그 일만 하니까 다른 점소이보다 좀 편하다고 여기는지, 또 혹여 차를 잘못 따르는 사고의 위험을 담보하는 건지. 주인이 주는 돈은 별 차이가 없다고 들었어.”

기대와 다른 대답.

오소민이 그 준수한 얼굴을 묘하게 찡그렸다.

객잔에서 처음 보는 묘기에 즐거웠지만, 세상이 어떻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고된 수련과 오랜 노력으로 재주를 익혀봤자 그저 잠시 즐기는 오락일 뿐. 그것도 익숙해지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길거리에서 갖가지 재주를 보이는 예인(藝人)도 그저 던져주는 푼돈에 끼니를 때우기 어렵고,

당장 이 객잔 안의 다른 손님 역시 장취차호를 일상으로 여기는 눈치.

처음 접했기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는 거다.

그래도.

“어이, 도차수, 라고 했지? 이리 와 보게.”

오소민이 대뜸 물러가려는 점소이를 불렀다.

장취차호를 뒤로 쓱 돌리며 얼른 다가온 키 작은 점소이. 손님에게 가까워지면 주둥이를 등 뒤에 감추는 것도 익숙하다.

자세히 보니 나이가 꽤 있다. 여기저기 흉터가 남은 주름진 얼굴에 어깨가 불끈 올라 꽤 험상궂은 느낌, 게다가 한쪽 다리를 저는 것처럼 조금 기우뚱거린다.

오소민이 소매에서 은자 부스러기를 몇 개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나는 처음 보는 구경이라. 이건 수고비야.”

도차수 점소이가 얼떨떨해하다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아, 고맙. 감사, 합니다. 손님들은 타지에서 오셨구먼요.”

영 어색한 인사. 수고비라는 게 낯선 모습이요, 탁한 목소리에 말투도 거칠다. 장취차호를 들지 않은 왼손이 머뭇거리며 탁자로 향하는 것도 점소이 같지 않고.

오소민은 또 다른 흥미가 생겼다.

“그렇네, 가까이서 보니 우리보다 연배가 위 같은데 이 장취차호는 얼마나 익혔는가?”

서른은 훨씬 넘었고, 주름살 사이의 흉터는 대부분 평범하지 않은 것들.

도차수가 은자 부스러기를 챙기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다.

“육칠 년 되었습, 지요. 왜 그런 걸…….”

습관이 되지 않은 말투, 왜 묻느냐고 말을 흐리지만,

“워낙 신통해서 말이야. 장안이나 가야 제대로 볼 줄 알았거든. 뭐라더라? 오 척 길이에 오 척 높이라던가. 대체 얼마나 익혀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오소민이 방금 들은 얘기를 즉석에서 써먹는다.

도차수가 어정쩡하게 얼굴을 들었다.

“그게, 에, 어려서부터 장취차호만 배운 녀석이 있다는데. 십오 년이 넘었답니다. 장안 제일의 요릿집인 취덕루(聚德樓)의 재칠(才七)이라는 점소이, 금강비(金剛臂)라는 별명까지 있지요. 그 녀석이 오장오고(五長五高)입니다.”

묻는 대로 답은 하지만, 그 얼굴에 얼핏 보이는 비웃음.

그게 같잖다는 조소란 걸 알아챈 오소민이 다시 질문을 던지는데.

“금강비? 대단한 이름이네. 그럼 자네는…….”

“아이고, 저희 도차수가 뭐 잘못했습니까? 이런, 이런.”

후다닥 달려와 끼어드는 늙수그레한 인물.

한 손으로 도차수를 끌어 물리고, 얼른 손을 모아 부산스럽게 예를 차리는 이는 바로 이 객잔의 주인이었다.

사고라도 쳤나 싶어 손님과 탁자 위를 훑는 시선이 바쁘다.

규모가 작다 해도 객잔. 점소이를 셋이나 두고 그중 한 명은 도차수를 고용한 주인이다. 잘 다듬은 수염이며 몸에 걸친 금포가 자못 부유한 티를 낸다.

불안한 눈빛과는 달리 만면에 푸근한 미소를 띠고,

“타지 손님이시군요. 장팔(張八)이가 여간해선 실수하지 않는데. 뭐 궁금하신 게 있는지? 장팔이는 말재주가 없어서 혹시 불쾌하셨을까 해서리.”

흔하디흔한 장팔이 도차수의 이름인 듯. 차를 따르는 재주는 뛰어나도 말재주는 없단다.

오소민이 히죽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불쾌는커녕 신기한 재주를 본 김에 수고비나 좀 쥐여 주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판이었지요. 괜히 주인이 신경 쓰게 한 모양이외다. 그나저나, 용케 장팔이란 친구를 데리고 있구려.”

가벼운 인사치레. 그러나 마지막에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주인이 움찔했다.

용케 데리고 있다.

주인이 다시 한 번 오소민의 준수한 얼굴을 살피더니, 모았던 손을 풀고 숙였던 상체를 일으킨다.

“예사 분들이 아니시군요. 장팔이를 찾아오신 건 아니고, 흠, 실례지만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과연 객잔의 주인. 대번에 해원기와 오소민이 무림인인 걸 알아챈 듯. 말투가 더욱 조심스러워졌지만, 그렇다고 겁을 내는 것 같진 않다.

이것도 좀 특이하다. 멀쩡하게 생겼어도 무공을 좀 익혔다고 행패 부리는 건달들이 적지 않건만.

오소민이 일부러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하, 눈썰미가 있는 주인 양반이시구먼. 우린 그냥 유람객이오만, 섬서는 초행이라서. 꽤 과거가 있어 보이는 친구가 객잔의 점소이로 있는 건 드물지요. 경맥을 다치고 다리 근육도 상한.”

이미 다 알아봤다. 얼굴의 흉터는 대부분 칼자국,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역력하고 한때 심한 내외상을 입은 장팔은 점소이로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이 입맛을 쩍 다시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무림고수라면 알아본다고 하시더니. 어쩔 수 없군요. 일러주신 대로 순순히 고하는 수밖에요.”

묘한 소리를 하며 아예 옆 탁자의 의자까지 끌어다 앉는 모습에.

오소민뿐 아니라 해원기도 궁금해졌다.

점소이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으나 아무리 도차수라고 해도 과거에 험한 짓을 일삼던 무림인을 객잔에 고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손님도 그렇지만, 우선 객잔 주인이 겁을 먹어서.

그런데 이 주인은 누구에겐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까지 미리 들은 투.

묘하다.

장팔의 나이는 사십 초반, 이십여 년 전에는 섬서 남쪽에서 꽤 알려진 젊은 무인이었다.

혈기왕성한 소년에 실력도 꽤 갖췄으니 세상에 겁나는 게 뭐 있을까.

나쁜 짓도 자주 하고, 나중엔 못된 무리를 등에 업고서 제멋대로 설쳐댔다. 그 벌을 받아선지 어느 날 거의 폐인이 되어 고향인 상락으로 돌아왔으나.

그 험한 성질은 그대로.

매일 술에 취해서 고을을 돌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저지르는 통에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관아에서 잡아 가두어도 그때뿐. 몽둥이찜질을 해도, 돌을 던져도, 묶어서 조리를 돌려도 피투성이가 된 채 나 죽여라, 하고 달려드니.

차라리 길바닥에서 횡사하는 걸 바랄 정도였다.

그렇게 추운 겨울날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얼어 죽을 팔자였는데.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그런 장팔을 구한 이가 있었다.

장팔에게 사람의 도리를 일러주고 살아갈 방도를 가르치며 고을의 유지들을 찾아 간곡하게 부탁까지 한 사람.

그때부터 장팔은 새 사람이 되었다.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고 어떻게든 살려고 애를 쓰며 육 년이나 장취차호를 다루려고 노력해서.

마침내 당당히 객잔의 점소이가 되었다.

“장팔이 같은 놈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처음에 극구 반대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접니다. 그러다가 그분 말씀대로 되는 걸 보고선 꼼짝없이 제 객잔에 채용할 수밖에 없었죠. 허허.”

얘기를 마친 주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자,

오소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미담. 부유한 고을의 유지들이라면 이런 독종에게 한 푼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세태거늘. 뭐라고 설득했기에 마음이 바뀌었을까.

“진귀한 일이로군요.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주인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는 시늉.

“남을 돕는 게 자신을 돕는 거라고. 사람을 도우려면 그 사람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하라고. 조인자조(助人自助), 항상 그 말씀을 하셨지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도움을 받잖습니까? 상락 제일의 도차수를 둔 객잔이 되어서.”

오장오고는 아니지만, 이장이고(二長二高)도 훌륭한 재주. 오소민이 수고비를 줄 생각까지 했다. 과연 장팔은 이 상락에서 가장 뛰어난 도차수.

해원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이 누굽니까?”

주인의 시선이 돌아오고, 만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당대에 손꼽히는 협사요, 화산파의 장문인이신 화산검협 마 대협이시죠. 우리 상락은 전부 마 대협이 지켜주신다오.”

거창한 수식을 붙이며 힘주어 답하는 소리.

낯선 타지의 무림인 앞에서 당당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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