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조인자조(助人自助) (3)
“흐흐.”
오소민이 코를 문질러 웃음을 감춰서 해원기가 결국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출발하고 한 시진이 넘었는데도 또 저런다.
“그렇게 재미있었나?”
한심스럽다는 듯이 묻는데도, 오소민은 기다렸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울화통 도사에게 끌려가는 두 꼬맹이 얼굴 봤잖아. 거의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가 아니라 송아지지. 눈물까지 글썽글썽해 가지고. 무당산까지 가는 동안, 아니 무당산에 가서도 고생깨나 할 걸? 크큭.”
대놓고 키득거린다.
해원기가 혀를 차며 머리를 저었다.
인광과 수진. 소림사에서부터 진평현까지 같이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험한 일을 겪어서일까. 이별이 자못 아쉬웠다.
성승과 도봉의 맥을 이었다고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들. 조금 더 같이 있으면서 보살펴주고 싶었는데.
사람의 인연은 마음먹은 대로 되진 않는다.
해원기가 어떻게 생각하든.
오소민은 그저 울상이 되어 질질 끌려가다시피 한 두 꼬마의 모습이 우습기만 한가 보다.
해원기가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신시(申時)가 다 되어가네. 길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지대가 조금 높아진 곳.
사방으로 들판과 구릉이 거듭되어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막하다.
오소민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해원기를 보았다.
아주 화창한 오후, 아직 햇볕이 따갑다.
“자네 생각해서 천천히 움직인 거잖아. 제 속도를 냈으면 벌써 상락(商洛)에 접어들었겠지. 거기서 어디로 빠질지 정해야 해. 뭐, 어차피 저녁때에는 도착할 테니까.”
상락은 하남과 붙은 섬서(陝西)의 고을.
이쪽으론 와본 적이 없는 해원기라 오소민이 길 안내를 맡은 셈이다.
해원기가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나도 출발 전에 백초환을 먹었고,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별다른 기척은 없는 것 같구먼.”
진평현에서 떨어진 외진 촌락을 떠날 때부터.
오소민이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웠음을 알고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부덕도인 일행은 단강구를 건너기만 하면 바로 호북(湖北)이요, 복잡한 지리를 능숙하게 파악한 부덕도인이 있지만.
서쪽으로 가는 해원기와 오소민은 다시 진평현 아래쪽을 거쳐야 할 형편.
비록 수차제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그 기억까지 없앴다고 해도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오대마도의 하나를 익히고 영광교의 사도대법을 펼쳤던 조화부인은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상대. 동창이 관군을 동원해 공개적으로 나와도 귀찮아진다.
반룡령의 위탁으로 해원기의 정체를 밝힌답시고 희한한 작자들이 들러붙을 수도 있잖나.
게다가 해원기 자신이 거친 싸움 끝에 혼절까지 했었으니.
검왕이 아니라 옥황상제라도 힘이 없을 때는 하찮은 들개에게 쫓기는 법이다.
굳이 경공을 삼가고 그냥 빠른 걸음으로 한적한 길을 택한 게 다 그런 이유다.
물론 빠른 걸음만으로도 보통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했지만.
아직 상락까지는 꽤 먼 거리.
오소민이 해원기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찢긴 흑의 경장 대신에 촌락에서 구한 허름한 단삼, 이마를 질끈 동여매 더벅머리를 대충 가린 낡은 천. 허리에 찬 특이한 요대자만 없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농사꾼이다.
“아니, 심부름꾼 같군.”
“뭐?”
오소민이 툭 튀어나온 말을 얼른 바꾸었다.
“기척까지 살폈다면 완전히 회복한 모양이구먼. 그나저나 가슴팍의 판과가 없으니까 어쩐지 허전해.”
두서없이 말머리가 바뀌는 게 오소민의 말투.
엉뚱한 소리에 헷갈렸던 해원기가 미소를 삼켰다.
보는 이만 허전하겠나. 육 년 가까이 몸에서 떼놓지 않았던 판과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데 뭘.”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그게 대답이라기보다는 해원기 자신에게 하는 위로 같아서.
오소민이 슬쩍 투덜거렸다.
“아, 그러기에 그냥 잘 닦아서 쓰자고 했더니.”
“자네, 벌써 배고픈가? 혹시 뭐 또 감춰놓은 거 있는감?”
해원기가 대뜸 놀리듯 건네는 물음에 입을 삐죽거렸다.
검이라고 여기기 어려운 모양. 판과로 그 쇠꼬챙이를 만들었다는 말에는 정말 놀랐었다.
내공이 순수하고 두터운 경지에 이르면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킬 수 있다. 이 삼매진화라면 어떤 쇳덩이라도 능히 녹여버리겠으나, 동시에 일정한 형태로 가공하는 건 또 다른 얘기.
싸우는 도중에 판과를 검의 형태로 바꾸는 건 대체 어떤 능력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려 했더니만,
해원기가 바로 부숴버렸다. 원형이 뭔지도 모를 쇳조각으로 부수곤 아예 땅바닥에 묻어버리더니.
‘다시 음식을 만드는 판과로 돌릴 수는 없다나 뭐라나. 칫, 괜히 멋있는 척이나 하고 말이야.’
도로 판과로 만들 수 있냐고 물었던 오소민을 무색하게 했었다.
지금 그 얘기가 또 나올까 싶어 도리어 오소민을 공박하는 거다. 과거에 오소민이 소매에다 먹을거리를 곧잘 숨겨놓았으니까.
바부탱이 주제에 눈치는 빨라.
“쳇, 그럴 틈이라도 있었으면. 이봐, 낙양에서 부리나케 달려와서 식사라곤 울화통 도사가 차린 그 한 끼밖에 못 먹은 사람이라고.”
불만으로 입이 댓 발이나 나오자,
해원기가 무안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었다.
이 친구 덕에 이렇게 무사하거늘.
“미안하네. 보답으로 저녁은 제대로 대접하지. 상락에서.”
오소민이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순진한 친구.
“알았어. 그럼 예전처럼 확 달려보자고. 유시(酉時) 전에 그럴듯한 요리상 앞에 앉게.”
처음 서로 알게 되어 덕주까지 갔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건만.
다시 경공을 펼치게 된 게 새삼스럽게 반가웠다.
예상대로 유시가 되기 직전에 상락의 한 객잔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오소민이 자리에 앉아 객잔 안을 둘러보며,
“나쁘지 않구먼. 여긴 뭐가 유명할까?”
상당히 오래전에 지어진 듯한데, 주인이 부지런한지 아주 깔끔하다.
아래층에는 식탁이 여덟 개, 위층에는 객방이 여섯 개인 작은 규모지만, 점소이가 셋이나 있고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싹싹하다.
오소민의 혼잣말에 안내한 점소이가 얼른 입을 열었다.
“저희는 본래 전통의 면점(麵店). 어떤 요리를 시키셔도 일단 수전포(水煎包), 소롱포(小籠包), 산탕교자(酸湯餃子)는 기본적으로 드셔야 할…….”
“얼씨구, 주식(主食)부터 읊는 곳은 처음일세. 가만 있어봐.”
오소민이 경쾌한 점소이의 입부터 막아놓고 해원기를 향했다.
“자네가 낸다고 했었지? 그럼 자네가 주문하라고.”
기대하는 눈빛.
해원기가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걸 아는 오소민이 굳이 점소이의 추천을 들을까.
뭔가 생각하던 해원기가 그제야 얼굴을 바로 돌렸다.
“어, 그러지. 그럼 훈납육(熏臘肉)하고 대회채(大燴菜) 하나씩. 수전포와 산탕교자를 곁들여서. 먹다가 부족하면 그때 더 시키고.”
주르르 나오는 주문에 점소이가 고개를 끄덕끄덕.
오소민이 그 앞에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괜찮은 술도 하나.”
“네엡!”
주문이 끝나자 점소이가 냉큼 대답하며 활기차게 뛰어간다.
“괜찮네. 그런데 대회채야 이것저것 잡탕으로 끓여낸 것이겠지만, 훈납육은 뭐야?”
대회채는 흔하디흔한 요리 이름. 오소민이 처음 듣는 건 훈납육이란 요리였다.
해원기가 빙그레 웃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준수한 용모의 오소민. 항상 걸치는 큼직한 백의가 시원한 운치를 더하여 유람 나온 귀공자 풍류객으로 보이지만,
이 식탐이야말로 개방 순행장로의 본색이 아닐까.
“나도 들은 지식일세. 지역이 가까워서 여기도 남양 땅처럼 면이나 만두 종류가 많은데, 그래도 몇 가지 요리는 독특하다더군. 납육은 포를 떠서 절인 고기, 사천이나 호남에서도 즐기고. 여기는 훈제라지. 나도 맛이 궁금해서 시켰어. 장안과는 꽤 다른 맛이라나.”
“흠, 일리 있군. 상락은 섬서에서 하남, 호북과 붙어있고 사천으로 통하는 길목이니까 남쪽 요리의 영향을 받았겠지. 장안을 중심으로 섬서의 남북은 영 딴판이라는 소리는 나도 들었네.”
해원기의 설명을 들은 오소민이 동감을 표했다.
섬서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지형이고, 고원과 분지가 고르게 분포되었으며 유명한 산도 몇 개나 있다. 한때 천하의 중심이었던 장안이라는 고도(古都)가 중앙에 자리하여 여러 문물이 모인 전통을 지니기도 했고.
오소민이 처음에 점소이가 내온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쉬고 나면 어디로 갈지 정해야겠구먼. 어쩔 건가?”
하남에서 서쪽으로 상락에 들어왔다. 갈 방향은 나머지 세 방향, 북으로는 화산이고, 서쪽은 장안을 거쳐 종남, 남쪽으로 돌면 사천이다.
해원기도 오는 내내, 조금 전까지도 그 궁리를 하고 있었기에,
“그러지 않아도 식사하면서 자네와 상의할 생각이었어. 섬서에는 아는 사람이 두 분이나 있네.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 두 분. 어렸을 때 한 번씩 뵌 적이 있으니까. 이번의 여정이 아미와 공동을 장악한 세 명, 육악의 힘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찾는 게 목적이지만, 아울러 그간 얻은 단서를 확인할 기회가 되고. 두 분은 큰 도움이 될 거야.”
찻잔을 쥐며 정리했던 생각을 털어놓자, 오소민도 안색을 고쳤다.
상락까지 오며 몇 차례 쉬는 동안 대화를 나누어서 그간의 사정을 더 자세하게 알았고, 그냥 길 안내만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들려던 찻잔을 내리고 대신 젓가락을 뽑았다.
“아미산은 복호사의 진여신승, 화엄탑의 오온존자라고 했지. 그리고 악산의 철장에서 만든 병기에다 당가 막내의 가출. 여기서 북쪽 감숙으로 넘어가면 공동산의 요술사라.”
옆으로 누인 젓가락은 사천, 그 끝에서 위로 놓인 젓가락은 감숙.
“그중에 당가와 관계된 단서를 여기 종남산에서 들어볼 필요는 있어. 그런데 이쪽도 그냥 지나치기 아깝단 말이야.”
종남의 장문인 청령선고는 당가의 인척이고 막내 당규의 가출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사천 쪽의 소식도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또 다른 젓가락이 사천의 반대쪽으로 올라간다.
“무엇보다 자네가 가장 먼저 얻은 오리 알. 진자현이 보주로 있는 장풍보가 섬서의 가장 북쪽에 있고, 술귀신 사형이 예전에 마 대협과 그쪽을 더듬어본 적이 있다고 했거든.”
가장 확실한 물증이 해원기의 수중에 있다.
겁표로 사라진 아홉 개의 돌멩이. 금오혈석을 나눠 가진 아홉 도적 중에 정체가 드러난 자는 진자현뿐. 화산파 장문인 화산검협이라면 장풍보에 대해 더욱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터.
해원기가 화산과 종남의 두 사람을 언급한 이유를 환히 알기에 이렇게 젓가락으로 표시해본 것이다.
“상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화음현(華陰縣), 화산의 바로 아래지. 거리로 봐선 여기부터 들르는 게 맞지만, 그러면 장안을 거쳐서 종남으로 가는구먼. 쯧.”
오소민이 혀를 차며 팔짱을 끼었다.
되도록 번화한 곳은 피하는 게 좋다.
해원기가 소림사에서 관병을 당당히 내쫓은 일도 있고, 동창이라면 이미 각지의 관청에 용모파기를 돌렸을 수 있으니까.
쓸데없는 귀찮음을 부르면 이 긴 여정이 꼬이기 십상.
그런데 해원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 놓인 젓가락을 거두었다.
“그러면 내일 일찍 화산으로 가도록 하세. 사천 쪽에 일이 많다고 제쳐놓을 수는 없지. 사천과 감숙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화산을 들른다는 보장도 하기 어렵고. 닥친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기회를 놓칠 수도 있네.”
툭, 툭.
젓가락 짝을 맞추어 오소민 앞에 한 벌, 자신 앞에 한 벌. 선선히 방향을 정한다.
해원기의 말이 이치에 맞지만, 오소민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겠나? 섬서의 상황이 하남과 다르기는 하지만.”
하남의 개방은 아무래도 관부와 거리가 멀고, 용문세가는 운신의 폭이 지나치게 좁다. 소림사도 당분간은 출입을 자제하며 관망하는 자세.
무림이 속세의 권력을 상대하는 건 참으로 난감한 일.
그에 비해 섬서의 화산과 종남은 엄연한 강호문파. 무림에서야 구주정문에 손꼽히는 명문정파라지만, 관부에서 보면 그저 산속에 모여 무술이나 익히고 도나 닦는 하찮은 은자들에 불과하다. 산에 있는 수많은 절과 도관이 전부 화산파나 종남파인 것도 아니요, 과거의 난세를 거쳐 중흥한지도 채 이십 년이 되지 않는다.
해원기는 여전히 차분한 얼굴.
“상관없어. 만사가 어찌 뜻대로 되겠는가, 그저 순간순간 전력을 기울여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겠지. 자, 우리가 시킨 요리가 오는구먼.”
점소이가 기민하게 올리는 푸짐한 요리.
처음 보는 훈납육이 궁금할 만도 한 오소민이 요리보다 해원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 친구, 달라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