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장 조인자조(助人自助) (2)
식은 점심을 치우지도 않은 식탁.
다시 자리에 앉은 부덕도인이 수염을 긁었다.
“간밤의 소나기가 비록 거세긴 했어도 그렇게 말짱하게 씻어 내리진 못했을 겁니다. 핏자국 하나 없더군요.”
해원기와 오소민이 저도 모르게 마주 보았다.
핏자국조차 없단다. 그렇다면 난잡했던 수차제나, 다수의 적과 치열하게 싸웠던 흔적은 어디 갔단 말인가.
오방신수의 이름을 딴 자들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수가 쓰러졌거늘.
“더구나 현성 사람들이 수차제는 금시초문이라고 합디다. 쯧.”
혀를 차는 게 이를 악무는 것처럼 보이는 부덕도인이 눈을 부라리고,
해원기와 오소민의 눈매도 날카로워졌다.
들판의 흔적을 지우는 건 어렵긴 해도 인력과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온 현성이 들썩일 정도로 화려했던 수차제가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이 되려면.
오소민이 마당에서 들었던 생소한 명칭을 다시 꺼내다가.
“그 들판에 펼쳐진 게 유탕섭백대진이라고 했었지? 혹시 그게 어떤…….”
“유탕섭백대진? 이 무슨!”
부덕도인이 버럭 소리를 치는 바람에 눈을 크게 떴다.
툭하면 화를 내는 성격이라 ‘울화통’이란 별명까지 붙은 양반이 지금은 소스라치게 놀라 안색까지 변했다.
오소민에게는 생소하지만, 부덕도인은 이 진세가 무엇인지 아는 듯.
해원기가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고.
“도장이 오기 전에 오 형과 함께 간밤의 일을 검토하면서, 그자들이 펼친 게 유탕섭백대진임을 알아냈습니다.”
부덕도인이 탁자에 올린 손에 힘줄이 퍼렇게 솟았다.
“그렇다면.”
씹어뱉듯 거친 음성에 오소민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잠깐. 나만 모르잖아. 일단 유탕섭백대진이 뭔지부터 알려주라고.”
해원기와 부덕도인이 다 아는 진세. 무엇인지 알아야 같이 대화할 수 있잖나.
부덕도인이 오소민의 준수한 얼굴을 돌아보다가 겨우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뺐다.
어려서부터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아이가 그새 이렇게 커서 해원기와 서로 믿는 벗이 되었구나.
대견스러워하는 표정이 드러나기 전에 얼른 입을 연다.
“남송 말기에 세상이 어지러운 걸 틈타 도문의 패류(敗類)와 좌도의 방사들이 곳곳에서 득세하여 온갖 해괴한 방술로 혹세무민, 일시에 천하 도문이 크게 쇠약해졌지.”
“그거야 다 아는 얘기. 남송뿐 아니라 요, 금, 나중에 원이 들어설 때까지 큰 해를 끼쳐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전진(全眞)이 일어선 거잖아요. 물론 전진도 얼마 가진 못했지만.”
“아는 척 말고 조용히 듣기나 해. 그 못된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사교(邪敎) 소속이란 건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 영정심광교(靈正心光敎), 흔히 영광교(靈光敎)라고 하는. 그 교주가 남송을 팔아넘긴 간신 진회(秦檜)였지.”
“어?”
이건 오소민이 모르는 사실. 그러나 영광교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퍼뜩 떠오른 것 때문에 입이 벌어졌고.
부덕도인이 다시 쓴 약을 들이마신 표정이 되어,
“그래, 벽세의 잔당이 만든 영광종(靈光宗). 그 영광종의 뿌리다. 그리고 그 영광교에서 백성들을 홀리던 사법 중 가장 유명했던 게 유탕섭백대진이고. 젠장.”
기어이 참았던 욕이 나왔다.
오소민도 욕설이 나올 것 같은 심정.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원기를 돌아보았다.
이건 조화부인이 오대마도의 하나를 시전한 것만큼 중대한 사안.
해원기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쪽같이 지워진 수차제의 흔적. 조화부인이 동창을 배경으로 두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그래도 대단히 기민하고 치밀한 뒤처리였다.
왜 그랬을까.
심지어 현성 사람들이 수차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뭔가 술수를 부렸기 때문.
수차제 자체를 지우려는 시도.
“유탕섭백대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군요. 사교에 모든 걸 바치도록 사람을 홀리던 사법에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해원기의 조용한 말에 부덕도인의 일그러진 얼굴이 홱 다가왔다.
“회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원기에게만은 한껏 예를 갖추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지부와 벽세의 잔당이 각각 오마왕전(五魔王殿)과 영광종이란 조직으로 연명하고 있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탁 소숙이 이자들을 박멸하고자 세상 밖에서 동분서주하시는 것도. 그런 분에게 강호에 지부의 오대마도와 영광교의 사도대법이 나왔다고 알려야 할까요?”
차분하게 묻는 말에 그만 말문이 닫힌다.
당세에 누구나 손꼽는 천하제일인.
강호에 떠도는 수많은 전설 중에 유일하게 실존하는 영웅.
천극 탁관영.
무림이 안정되었다고 해도, 십오 년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마침 구름 속의 신룡처럼 여겨지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부덕도인이다.
하지만.
“사안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부의 마공과 벽세의 사법이 함께 등장했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난세를 겪은 사람으로서 천하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사마의 출현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요, 더구나 그것이 한곳에 동반되었기에.
해원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디서 오대마도의 하나를 얻었고, 무엇 때문에 사도대법을 사용했는지 하나도 모르는 판이니까요. 그래서 섣불리 탁 소숙을 경동시킬 수 없습니다. 강호를 지키고자 스스로 방벽이 되길 자처한 분들, 참으로 뵐 낯이 없군요.”
부덕도인의 일그러진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사마의 재출현, 그리고 이 사실을 탁관영에게 알려야 한다는 얘기였는데 해원기의 말 끝부분이 다른 느낌을 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논하는 해원기의 말소리는 처음부터 가라앉은 상태.
오소민도 옆에서 해원기를 뚫어지라 볼 뿐.
해원기는 이제 오소민도, 부덕도인도 보지 않는다.
호수처럼 그윽한 눈이 아득히 먼 곳을 보는 듯.
말이 이어진다.
“제가 워낙 어리석고 못나서 그간 강호가 어떠했는지 몰랐지요. 그러다가 이제야 조금씩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서. 흠, 약왕당의 단목 형님이 무지기라는 괴물의 여파를 찾는데 애를 쓰는 걸 직접 보았습니다. 화산파의 마 대협, 종남파의 청령선고도 어렴풋이 소식을 들었고요. 그리고 도장 어른을 포함한 풍진삼우 세 분. 모두 안에서 강호가 바르게 돌아가도록 힘쓴 분들입니다.”
스스로 낮추면서 비굴하지 않고, 부덕도인을 비롯한 당대의 고수를 높이면서도 과장하지 않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해원기의 손이 가만히 가슴팍에 닿았다. 이제는 판과가 없는.
“저도 강호 안에서 사는 자, 무림에 발을 디딘 사람입니다. 필부라도 자기가 사는 곳에선 잡초를 뽑는데, 하물며 사부의 훈도를 받은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허!”
“음.”
부덕도인이 탄성을 지르고, 오소민이 숨을 삼켰다.
말은 차분해도 담긴 의미는 결연하다.
성질 급한 부덕도인이 상체를 왈칵 일으키며 되물었다.
“그렇다면?”
따지듯 큰 목소리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해원기.
“우물물이 강물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사부님도 믿고 지키셨던 묵계. 아울러 금오혈석으로 여겨지는 아홉 개의 돌은 처음부터 제가 휘말렸던 일입니다. 설사 그 안에 과거의 사마가 재현되는 기미가 있더라도. 제가 맡으렵니다.”
털썩.
자리에 앉은 부덕도인이 멍하니 해원기를 보다가,
“으하하하하, 무량수불,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도호를 외웠다가.
오소민의 준수한 얼굴도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 두 사람에게 차례로 눈길을 보내며 마주 미소 짓는 해원기.
검왕이다.
부덕도인의 폭발하는 웃음소리에 놀랐나.
토란 같은 머리통 두 개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해원기가 청정력으로 체내의 탁기를 배제한 덕에 약효가 제대로 돌아서인지, 훨씬 생기가 도는 얼굴로 궁금한 듯 이리저리 머리를 돌리는 인광과 수진.
그 모습에 부덕도인이 얼른 손을 들어 부른다.
“어서 이리 앉거라. 너희 두 꼬맹이도 어차피 강호에서 구를 팔자들이니까. 허허허.”
웃음이 금방 멈추지 않고, 오소민이 그런 부덕도인의 모습에 피식거리며 두 아이를 살폈다.
“몸은 어떠냐?”
부덕도인의 뜬금없는 팔자타령보다야 오소민의 말이 알아듣기 쉬워서.
“네, 아주 상쾌합니다.”
“다친 곳이 하나도 아프지 않네요.”
붕대 감은 곳을 가볍게 움직이며 기운차게 대답하자,
부덕도인이 비로소 웃음을 거두고 해원기를 바라보았다.
“회주의 뜻, 잘 알아들었고, 아울러 빈도 역시 회주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비록 과거의 사마와 관련된 조짐이 보이지만, 맹주께 알리는 건 조금 더 미루지요. 뭐, 나중에 돌팔이와 의논도 거쳐야 하고요.”
천문노인의 맥을 이은 단목정. 강호에서 그의 지혜는 언제나 결정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여간 부덕도인은 뭔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얼굴이 풀어졌고,
눈치를 살피던 수진이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저, 도장께서 아까부터 회주, 맹주라고 하시던데 누굴 말씀하시는지요?”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을 모르니 당최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듯.
드물게 기분이 좋아진 울화통 도인이 흔쾌히 알려준다.
“여기 있는 해 소협이 바로 연검지회(練劍之會)를 주지하시는 회주, 만검지존이시지. 맹주는 천극 탁 대협을 가리키고.”
듣고 나니 더 모르겠다. 인광이 붕대로 감은 머리통을 갸웃거렸다.
“연검지회요? 그건 뭐고, 탁 대협께선 왜 맹주예요?”
해원기는 검왕이라던데 왜 회주일까. 탁관영이 천하제일고수인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알지만, 왜 맹주라고 부를까.
“그런 게 있어. 나중에 가르쳐주마. 너희와도 이어진 과거니까.”
기분 좋은 것도 잠깐. 귀찮아진 부덕도인이 말을 뚝 끊어버리자.
오소민이 슬쩍 부덕도인이 멘 송문고검을 손가락질하며 눈짓을 보냈다.
“회와 맹에 다 소속된 분이라서 그런 거란다. 특히 연검지회에는 혼자만 들어갔다고 술 귀신 사 형과 멍충이 선사한테 어지간히 뻐기시거든.”
인광과 수진의 시선이 자연히 부덕도인의 검을 향한다.
풍진삼우 중에서 유일하게 검을 쓰는 이. 연검지회라는 이름에서 검객만이 속한 모임이란 걸 알 수는 있어도, 그 회주가 검왕이며 만검지존이라.
그 안의 배경까지 짐작하기엔 아직 어리다.
호기심이 가득한 두 아이를 보면서 오소민이 빙그레 웃었다.
그 또한 진심으로 기뻤기에.
“꼬맹이 둘은 빈도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장교(掌敎) 진인께도 사정을 아뢰고, 가는 김에 돌팔이도 찾아보고요.”
부덕도인이 인광과 수진을 맡기로 했다.
조화부인의 등장은 그간 강호의 암류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외에 사마의 재현이라는 의미까지 품어서 조속히 무당산에 알릴 필요가 있었고, 차제에 단목정과 의논도 할 생각.
오소민이 평소의 범범한 얼굴로 돌아온 해원기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서 곧장 사천으로 넘어가려고?”
이미 서쪽으로 향하려는 뜻을 밝힌 해원기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물길로 갈 건 아냐. 육로로 섬서를 지나면서 상황을 살필 생각이네.”
오소민이 뺨을 긁었다.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 세력들. 동창, 하북팽가, 반룡령, 조양신문, 정수회, 조화부인, 그리고 악송령을 노린 삼보별저와 인광과 수진으로 하여금 산을 떠나게 만든 자들.
이들이 어떤 힘을 지녔고 어떻게 얽혀있는지는 아직 모호하다. 이들 말고 또 어떤 세력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일단 이들이 모습을 나타낸 시기나 과정이 금오혈석이라는 아홉 개의 돌멩이와 연관된다는 심증은 충분하다.
검왕으로서의 자각이랄까, 또는 무인으로서의 결심이랄까.
해원기는 아홉 개의 돌멩이에 대한 단서를 찾으면서 아울러 육악의 힘이라는 걸 확인할 셈이다.
오래된 묵계를 저버린 당대의 권력, 과거의 난세와 관련된 사마의 재현.
전부 바로잡겠다는 의지.
그야말로 강호를 혼자 지켜내겠다는 호기(豪氣)면서, 아울러 혼란에 휩쓸려 무고하게 해를 입는 자가 없도록 하겠다는 협기(俠氣)지만.
홀로 걸어가기엔 참으로 어려운 길이요, 두 손으로 버티기엔 너무 큰 풍파다.
뺨을 긁던 손을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쁘지 않구먼. 마침 자네가 소림사에서 당당히 관병들을 혼내준 탓에 집포령(緝捕令)이라도 내려오나 은근히 걱정했거든. 이참에 서쪽으로 빠지는 것도 괜찮겠어. 그러지 않아도 동쪽의 짭짤한 음식에는 질리는 판이라.”
해원기가 언뜻 쳐다보며 눈을 껌뻑였다.
“자네도 가려고?”
뜻밖의 말이라 되묻는데,
오소민은 당연하다는 듯 머리를 크게 끄덕거린다.
“그럼. 바부탱이 고구마대장만 내보내서야 마음이 놓이나. 더구나 상대가 상당한 숫자라면 우리도 대비를 단단히 갖추어야 해. 그런 연락은 전통적으로 개방이 맡아 왔고…….”
말을 끌면서 자신만만하게 들어 올리는 얼굴.
“이 몸이 바로 순행장로 아닌감. 어딜 가도 통하는 신용이니, 자넨 참 복도 많아.”
그러면서 과장되게 해원기의 어깨를 두드리곤,
“더구나 자네와 난 그 오리 알을 처음부터 쫓던 사이잖아.”
이런 소리까지 지껄이는 통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끼지 말라고 벌컥 화를 낼 것 같던 부덕도인도 왠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동의하니.
이렇게 길을 나누어 떠나게 되었다.